경허선사의 법문과 게송집

경허선사어록

거부스님 역주/ 무이정사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격동기를 살면서

조선시대 사그라들었던

불법과 선의 종풍을

활화산처럼 피어오르게 했다

 

숱한 기행과 일화서 보듯

막힘없는 대자유인의 삶을

살다 홀연히 사라진 스님

도광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거부스님은 범어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범어사승가대학 강사와 수덕사승가대학장으로 활동했다. <초발심자경문>을 비롯해 <치문> <서장> <도서> <선요> <능엄경> <금강경> 등 승가대학 교재에 주해를 달아 완간한 바 있다. 또 표충사에 주석하면서 <사명대사어록>과 <사명대사 난중어록>을 발간했다. 현 밀양 무이정사 주지다.

 

“붓을 잡으려니 마음이 비롯 산란하지만/ 한낱 경계를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고니 희고 까마귀 검다함은 마음밖의 말이니/ 부처와 중생은 없어도 산과 물은 있음이로다.(因筆及此心緖 遮個境界共誰伊 鵠白烏黑心言外 無生佛兮有山水)” 당대 선지식이었던 허주스님에 경허스님이 보낸 이 글에서 경허스님의 유유자적한 경계를 엿볼 수 있다.

근대불교 중흥조로 칭송받는 경허스님은 1849년 8월 전주 자동리에서 출생했다. 속명은 송동욱. 태어난지 3일간 울지 않아 주변이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9살 때 청계사에서 출가했다가 14세 때 동학사에서 만화보선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23세에 동학사에서 강의를 열었는데 “사방의 학인들이 마치 물이 동쪽에서 흐르는 것처럼” 운집했다고 한다.

강사로서 명성을 떨치던 스님에게 큰 계기가 된 사건은 31세 되던 여름, 스님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비를 피하기 위해 수십 집을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한 일이었다. 잠시 비를 피하는 것조차 거절을 당하던 스님이 한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역병이 돌아 다른 사람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문자로는 생사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스님은 참선을 시작, 석달만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스님은 이후 법문과 게송을 다수 남겼는데, 그 가운데서도 경허스님의 십우송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명문장으로 읽히고 있다.

“한숨 자고 가세나. 어찌 그리 바쁘게 설치는가. 혼자서 일없이 앉아 있으니 봄이 오고 풀이 저절로 푸름이로다. 이것은 무릇 종기 위해 쑥 뜸질하는 것과 비숫함이라다. 도를 보지 못했는가. 곧 바로 푸른 하늘이로다. 비가 내리기 좋은 때는 비가 내리지 않고, 맑은 하늘 바랄 때는 하늘이 개지 않음이로다. 이것은 무슨 마음의 행인가. 양 눈썹을 아끼지 않고 그대를 위해 드러내 보이노니,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들어 감출 곳이 없는데,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음이로다.” 심우도 7번째 그림인 망우존인(忘牛存人)에 대해 경허선사는 이렇게 해석했다.

거부스님은 그동안 발간된 경허선사의 어록집, 즉 한암선사 필사본과 <경허당 법어록> <경허법어> <경허집> 등을 비교 정리하며 잘못 전해진 것은 버리고, 현장답사와 자료조사를 통해 새로운 자료를 발굴, 어록집으로 정리했다.

경허스님은 한 사찰에 오래 머물지 않고 전국 사찰을 다니며 불교중흥을 위해 힘썼다. 스님은 64세 때인 1912년 법랍 56세로 입적했다. 거부스님은 “경허선사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격동기를 살면서, 조선시대 사그라들었던 불법과 선의 종풍을 활화산처럼 피어오르게 하신 분”이라며 “숱한 기행과 일화에서 보듯, 스님은 막힘없는 대자유인의 삶을 살았다. 말년에는 마치 일부러 자취를 감추듯 홀연히 세인의 눈에서 사라진 분”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경허스님의 막힘없는 법문과 경지를 초월한 게송, 그리고 서정적인 문장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 <경허선사어록>은 스님의 문학적 소양과 법문을 접할 수 있는 기회다.

[불교신문3217호/2016년7월13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