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불장 혜성대종사

진불장혜성대종사 문도회 펴냄/ 화남

저 딱한 중생.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할꼬.

꿈 깨고 보면 원수도 친구요,

마음 한번 돌리면

그대로가 내 사랑인데,

우리는 원수라고

언제나 미워하고,

꿈 속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니

항상 괴롭고 고통스럽다.

너도 나도 서로 용서하고,

나도 너도 항상 사랑하며

언제나 용서하는

자비의 마음으로

웃고 웃으며 인생을 살자꾸나.

 

- 혜성스님의 시 ‘용서’

지난 6월21일 서울 도선사에서 혜성대종사를 만나 불자들을 위한 가르침을 묻자, 스님은 ‘자비무적’ 네 단어로 답을 했다.

 

“자비무적(慈悲無敵)입니다. 자비로움으로 세상을 위해 일을 하면 적이 없습니다. 자비심으로 마음의 광명을 일구어 내서 갈등과 대립이 없이 늘 화합하는 모습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간직하고 있는 평생의 가르침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입니다.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삶에서 실천할 때 진정한 불자입니다.”

지난 6월21일 서울 도선사에서 혜성스님을 만나 불자들을 위한 가르침을 묻자, 스님은 ‘자비무적’ 네 단어로 답을 했다. 도선사 입구에 써있는 이 말은 청담스님에 이어 혜성스님 평생의 화두이면서 법문이었다고 한다. 스님을 만나고 다시 산을 내려오는 길, 절 입구에 새겨놓은 ‘자비무적’ 문구는 산을 오를 때도, 내려갈 때도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대해 관대한가. 조금이라도 싫은 소리를 듣거나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핏대를 올리며 사는 우리의 삶에 이 단어 하나 새긴다면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까.

 

“참된 현실을 바로 깨기 위하여 미혹한 마음을 하루 속히 씻어 참다운 배움길에 들어서 현실을 간파하고자 몸부림치는 이 순간이 즐겁지 않으랴!”(1959년 혜성스님 행자일기 중)

도선사 청담문도회 문장 혜성스님이 지난 1일 연세 80세를 맞았다. 20세 되던 해 출가했으니 법랍 60세를 맞은 것이다. 이날을 맞아 도선사와 진불장혜성대종사문도회에서 <인생 80년, 수행 60년 진불장 혜성대종사>를 펴냈다. 지난 4월 대종사 법계를 품수한 스님은 청담스님을 은사로 1957년 출가한 이후 한국불교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60년 은사 청담스님을 보필하며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한 것을 비롯해 암자 수준이던 도선사를 현재와 같이 서울 강북의 중심사찰로 성장시켜 냈다. 특히 1964년 도선사 주지로 재임하면서 당시는 건축 신재료였던 콘크리트와 전통건축 양식을 조화시킨 호국참회원을 건립했다. 또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도선사 진입로를 개설포장하고, 포교지 <도선법보>를 창간한데 이어 1975년 평택의 팽성중학교를 인수해 청담학원으로 개편해 중고등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김기용 보살이 운영난을 겪던 혜명복지원 운영을 인수 받았다.

“당시 많은 스님들이 반대했어. 사찰 재정도 어려운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어. 당시로는 당연한 걱정이었지. 하지만 자비를 실천하는 불교에서 어떻게 고아원 시설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스님은 당시 불교계 최초의 복지법인인 혜명복지원을 설립하고, 1978년에는 고아원에 이어 양로원 시설까지 건립했다.

“중생의 삶에서 수행력이 발휘되어야 해요. 치열하게 수행을 하고, 일상에서는 깨달은 바를 실천해야 해요. 부처님의 말씀을 현 시대에 맞춰 적용하되,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사회에 자비를 실현해야 한다는 혜성스님의 의지는 1990년 중앙승가대 학장 때 행보로도 알 수 있다. 스님은 중앙승가대 명의로 삼전종합사회복지관을 수탁 받은데 이어 서울 보람어린이집, 명성어린이집 등 수많은 어린이집을 위탁받아 스님들이 운영하게 했다. 또 혜명아동복지종합타운을 건립해 지역아동센터를 설립하는 등 아동복지사업에 특히 헌신했다. 조계종에서 본격적으로 사회복지사업을 시작한 것이 1996년이니, 그에 앞서 불교복지를 이끌어 온 것이다. 혜성스님은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은 시설을 들러 운영상태를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있다.

사회가 아프면 스님도 아팠다. 혜성스님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월남전에 참전을 하자 직접 베트남 사이공을 방문해 군인을 대상으로 위로법회를 열고,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용된 영가들을 위해 사이판으로 달려가 천도재를 봉행했다. 설날이면 혜명보육원을 찾아 아이들에게 일일이 용돈을 나눠주며 격려하기도 했다. 이런 역사는 혜성스님 개인의 역사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 한국불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불교가 조금씩 사회적 역할을 자리매김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산승은 선방에서 화두만 참구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대중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도선사를 중심으로 부처님 자비를 실천하는 복지불교, 대중을 일깨우는 교육불교의 틀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산승의 꿈은 제자들을 거쳐 사부대중에게 전해져 언젠가는 부처님의 올 곧은 진리의 말씀이 온 누리에 두루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혜성스님에게 포교는 아직까지 미완성이다. 포교를 통해 부처님의 진리를 전할 사람도, 지역도 아직 많다. 하지만 몸이 부자연스러워 “좋은 법문을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스님. 혜성스님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10·27 법난의 휴우증으로 인해 신체가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지금도 새벽예불에 참가하고 오전8시면 도선사 일주문을 나선다. “복지관, 보육원, 청담 중·고등학교 등 아직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어서란다.

<진불장 혜성대종사>의 책을 받아들고 몇 장 펼치니 익숙한 찬불가가 눈에 띈다. “내 몸의 자유자재 바라고 있다면/ 잡히어 죽을 목숨 풀어서 살리고/ 병 들은 중생을 도와서 고치면/ 자유는 돌아와서 내 몸을 지키네.” ‘자비방생의 노래’로 혜성스님이 작사를 하고 서창업 작가가 곡을 붙인 것이다. 그 노래 가사가 마치 혜성스님의 원력처럼, 화두처럼 느껴졌다.

큰 안목으로 불교가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먼저 그 길을 걸었던 혜성스님. 스님의 60년 수행자의 길을 정리한 이 책에는, 격동기 이후 한국불교의 다양한 모습이 오버랩 돼 있다.

[불교신문3215호/2016년7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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