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안종사는 알음알이부터 끊어준다

중도실상을 밝힌 선(禪)은 일심

온갖 것을 나투는 ‘마음자리’는

자신이 직접 체험해야 분명해져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깨달음이란 마음의 실상(實相)을 자각하는 것이다. 마음은 본래 완벽하게 드러나 있어서, 흔히 ‘공개된 비밀’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본래 완전한 마음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전도몽상에 빠진 이들은 이 마음을 등지고 밖으로 분별함으로써, 고해(苦海)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본래 청정한 마음에는 무명업식(無明業識)은 물론 반야지혜(般若智慧)조차 없다. 그러나 직접 깨달음을 체험하기 전에는 마음이란 단지 의심의 대상일 뿐, 알 수 없는 것이다.

미혹한 사람에게는 깨달음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깨달은 사람에게는 미혹은 물론 깨달음도 없다. 깨달음이란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의 당처에는 ‘미혹과 깨달음’이라는 상대적인 분별, 그 자체가 이미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래 마음자리에는 깨달음은 물론 그 어떤 흔적도 있을 수 없다.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생각이 도달할 수 없는 그 자리를, 할 수 없이 방편으로 ‘무시무종(無始無終)’이나 ‘무생법인(無生法忍)’ 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음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본래부터 생겨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깨달음에는 궁극이란 말도 성립하지 않으며 과정이란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이 깨달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미혹한 이를 제도하기 위한 방편이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예외 없이 억측이며 알음알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미혹한 상태에서는 깨달음을 두고 여러 가지 형태로 묻게 되겠지만, 실제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되면 그런 물음은 단지 분별망상일 뿐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깨달음 없이 깨달음에 대해 이런 저런 논의를 하는 것은 헛된 관념의 향연일 뿐이기에, 눈 밝은 명안종사라면 차라리 법을 물어오는 공부인의 모든 알음알이를 끊어주고 정신적인 벽에 바로 부딪치게 해서, 오직 무명을 타파하고 근본실상에 계합(契合)되도록 이끌어준다.

스스로 텅 비어 있으면서 온갖 것을 나투는 이 ‘마음자리(心地)’는 직접 체험해야 분명해지므로, 모든 논의를 접어두고 실제로 깨닫게 하는데 집중토록 하는 것이 선(禪)이다. 중도실상을 밝힌 선은 일심(一心)이며 불이법(不二法)이다. 선불교는 상대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언어적인 가르침에 의지하는 대신, 단도직입으로 마음의 실상을 깨닫도록 하는 돈교법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부촉한 법등은 서천 28대로 면면히 상승(相承)하여 달마대사에 의해 중국으로 전해졌다. 선종의 초조(初祖)가 된 달마대사는 오직 일심법만을 전했다. 이것은 ‘문자를 세우지 않고, 교(敎)밖에 따로 전하며,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는 것으로, 선종의 종지(宗旨)가 됐다.

달마대사의 일심법을 이어받은 육조혜능 대사는 ‘돈교법문’을 열었다. 이것은 누구나 본래 갖고 있는 본래면목을 몰록 깨치도록 이끄는 가르침이다.

조사선이란 깨달음을 완성한 역대 조사들이 본래 갖추어져 있는 성품을 바로 눈앞에서 드러내 보여주신 법문이다. 이때 언어와 생각의 길이 끊어진 자리에서 한 생각 돌이켜 스스로의 성품이 본래 부처임을 명확히 깨달으면,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재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스승은 제자로 하여금 이심전심으로 정법의 안목을 체득케 하였다. 이 일단의 일은 눈 밝은 선지식의 점검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불교신문3214호/2016년7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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