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초월동조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적극 참여

만해스님과 견주어 부족함 없어

참선수행, 교학연찬 겸비한 고승

서울 진관사 매년 추모다례 엄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형무소에 수감될 당시 초월스님. 오른쪽 사진은 진관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태극기 비석과 초월스님의 유작. 제목은 묵매도(墨梅圖). ‘月下佟爲(월하동위) 雪風前(설풍전) 覺來香(각래향) 不咸山人(불함산인) 龜國堂(구국당)’이란 내용이다. ‘불함산인 구국당’은 초월스님이다.

○… 오대산 월정사에서 학인들을 지도할 때이니 1930년대 후반의 일이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중대(中臺)를 참배하고 난 초월스님이 두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함께 갔던 일행이 깜짝 놀란 것을 당연한 일이다. 당시 초월스님은 월정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지인들에게 “금강산에서도 만세를 불렀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이 누구보다 뜨거웠던 스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 1928년 또는 그 이듬해의 일이다. 당시 초월스님은 계룡산 동학사에서 강사(講師)로 있으면서 학인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초월스님 회상에서 공부한 이대영 선생(법명 금암)은 “(초월)선사의 고매박학(高昧博學)은 당시 한국 불교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수도정진하심과 보살도의 정신으로 우국우민(憂國憂民)하시며 세태의 변천에 따라 왜인들의 강승(强勝)을 질타하며 왜황(倭皇)의 사진이 지상(誌上)에 나타나면 반듯이 침을 발라 지두(指頭, 손가락 끝)로 압견(壓肩)하심을 수차 발견했다”고 회고했다.

○… 초월스님은 교학(敎學)에 밝았다. 범어사와 해인사 강사를 지내고 동국대 전신인 중앙학림 초대 강사로 위촉될 정도로 불교 교학을 깊이 연찬했다. 다수의 글을 남기고 <혁신공보> 등 지하신문을 발행한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와함께 그동안 깊이 조명 받지 못했지만 초월스님은 선사(禪師)였다. 출가 사찰인 지리산 영원사 조실로 추대된 것이 20대 후반이었으며, 1907년에는 해인사 선원에서 정진한 이력도 확인된다. 계룡산 동학사에서 학인들을 지도할 때의 일이다. 스님은 방안에 죽은 거북이를 헝겊으로 싸서 조석(朝夕)으로 참선을 했다고 한다. 요시찰 인물인 스님을 동태를 확인하고 감시하기 위해 동학사를 찾은 일본 경찰이 그러한 모습을 보고 정신이상자로 생각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스님의 깊은 뜻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조선독립의 열망을 숨기려는 뜻도 있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죽은 거북이’를 놓고 참선공부를 했던 스님의 수행 깊이를 짐작할 뿐이다.

○… 또한 초월스님은 대중포교에도 진력을 다해, 속리산 법주사 청주포교당인 용화사에 포교사로 부임해 활동했으며, 서울 진관사 마포포교당에서도 활약했다. 수많은 민초들을 불자의 길로 인도했다. 특히 1927년 스물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이역만리 스리랑카에서 입적한 이영재(李英宰) 스님은 청주 용화사에서 월초스님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기독교인으로 충북도청 학무국에 근무하던 ‘청년 이영재’는 업무차 법주사를 방문했다가 불교로 개종하고 출가했다. 이영재 스님은 일본대학 종교학과에서 공부한 수재로 <조선불교혁신론>을 주창한 당대의 지식인 승려였다.

○… 不咸山人(불함산인). 초월스님이 남은 묵적(墨跡)에는 스스로를 ‘불함산인’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불함산 사람’이란 뜻으로 스님의 별호(別號)인 셈이다. 그렇다면 불함산은 어디인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白頭山)의 또 다른 이름이 불함산이다. <진서통전(晋書通典)>과 <산해경(山海經)> 등 중국 고서(古書)에는 백두산을 불함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불함이란 의미는 신무(神巫) 조화(造化)를 부리는 흰산이란 의미이다. 초월스님이 백두산을 나타내는 불함산을 주로 사용한 것은, 민족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 “삼각산 마루에, 새벽빗 비쵤제, 네 보앗냐 보아, 그리던 태극기를, 네가 보앗나냐, 죽온 줄 알앗던, 우리 태극기를, 오늘 다시 보앗네, 자유의 바람에, 태극기 날니네, 이천만동포야, 만세를 불러라, 다시 산 태극기를 위해, 만세 만세, 다시산 대한국 …” 일제강점기 초월스님이 진관사 칠성각에 숨겨 놓은 <독립신문> 제30호 1면에 실린 ‘태극기’란 제목의 시 가운데 앞부분이다. 조국사랑과 독립의 강렬한 의지가 확인 가능한 3연 45행의 시이다. <독립신문> 제32호에는 ‘태극기신설(太極旗新說)’이란 제목의 글이 실렸는데, 태극기 의미와 제작법을 알려주고 있다. 항일 독립의 원력을 실현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실천한 초월스님도 읽었을 <독립신문>은 해방을 간절하게 원했던 선조들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1919년 3·1 운동은 민족대표 33인을 중심으로 세계만방에 조선의 독립을 선포하고, 들불처럼 민중이 일어나 만세를 외친 역사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그해 가을의 또 다른 독립선언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초월스님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11월25일 경성 종로 일대에 태극기와 단군기념기를 내걸고,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날은 음력 10월3일로 민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단군이 고조선을 개국한 개천절이다. 초월스님은 이밖에도 승려독립선언서 발표, 의용승군(義勇僧軍) 등의 사건으로 체포되어 숱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스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 진관사 주지 계호스님은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에 출가자로 수행정진하는 한편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다방면으로 헌신한 초월 큰스님의 자취와 가르침은 지금은 물론 후대까지 전해져야 마땅하다”면서 “스님의 독립운동정신을 기리는 다양한 선양 활동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계호스님은 “매년 3·1절 기념행사와 초월스님 추모다례를 봉행하고 있는데, 올해는 은평구 일대에 ‘진관사 태극기’를 게양해 불자들은 물론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다”면서 “초월스님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진관사는 칠성각에서 초월스님이 숨겨 놓은 태극기 등 독립운동 자료가 발견된후 매년 3·1절 기념행사와 추모다례를 봉행하고 있다. 사진은 2011년 3월1일 진관사에서 열린 ‘3·1절 기념 독립운동가 초월스님 추모법회’ 동참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

■ 초월스님 행장 

1878년 2월17일 경남 고성군 출생. 부친 백하진(白河鎭) 선생, 모친 김해 김씨. 3남 가운데 차남. 속명 백도수(白道洙). 어려서 경남 진주로 이사했다. 14세(1892년)에 지리산 영원사에서 남파(南坡)스님을 은사로 출가. 법명은 동조(東照), 인영(寅榮). 법호는 초월(初月). 별호는 구국(龜國). 의수(義洙), 의고(義告), 최승(最勝), 자인(自忍), 인산(寅山)이란 이명(異名)도 썼다.

1903년 영원사 조실, 1907년 해인사에서 동안거 수행. 1910년 한일강제병합후 임제종 운동에 참여. 1915년 조선불교 선교양종 30본산연합사무소 상치원(常置員) 총회에서 중앙학림(中央學林, 동국대 전신) 초대 강사로 위촉. 계룡산 동학사(1929년 또는 1931년), 신촌 봉원사(1935년 3월), 오대산 월정사(1930년대), 서울 진관사 마포포교당 극락암(1937년) 등에서 강의.

3·1운동 후 독립운동단체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 결성. <혁신공보(革新公報)> 발간. 1919년 11월 ‘의친왕 이하 33인의 (독립) 선언’에 참여. 1939년 경성발 봉천행 열차에 ‘대한독립만세’ 구호 사건의 배후 인물로 체포, 3년형 받고 투옥. 1943년 4월 출소. 재차 구금 대전형무소 거쳐 청주형무소로 이감. 1944년 6월 순국. 법납 53세. 세수 67세.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2009년 5월 진관사 칠성각에서 불단과 기둥 사이에 숨긴 태극기, 독립신문, 신대한신문 등 초월스님 유물 발견. 2010년 정부에서 총 6종 20점의 사료를 등록문화재로 지정, 이후 매년 진관사에서 추모다례 엄수. 2014년 6월 국가보훈처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 초월스님 어록 

“내 이 몸이 부서져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조선독립이 되도록 결심 했다.”

- 생전에 지인들에게 자주 한 말.

“초월(初月)이 동조(東照)하니 회광(晦光)이 자멸이라. 초승달이 동쪽에서 비추어 오니, 그믐날 빛은 스스로 소멸할 것이다.”

- 친일파 승려 이회광에 맞서 조선불교수호를 위한 임제종 운동을 할 당시.

“이 놈아 밥을 치면 떡 밖에 더 되겠느냐. 아무리 행패를 부리더라도, 계를 가지고 삼각산을 쳐도 삼각산이 없어질리 없다. … 내가 왜 미쳐, 너희 왜놈들이 미쳐서 남의 나라 땅을 강점하고 있는 것이지, 내가 왜 미쳤단 말이냐, 너희가 미쳤지.”

- 일경에 연행되어 고문 받을 당시.

“번개불 번쩍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

- 봉원사에서 학인들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좌고우면’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불교신문3213호/2016년6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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