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년 쯤 전, 동료 시인들과의 대화 자리에서 역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문턱값’이라고도 부르는 역치는 말하자면 과학 용어이지만, 마음이나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한 번 경험한 감정, 한 번 느껴 본 자극은 반복되었을 때 처음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한다. 공포영화를 볼 때 잔인한 장면들이 처음에는 무섭게 느껴지지만, 계속 보다 보면 어느새 둔감해지면서 그 두려움을 즐기기까지 하는 과정을 ‘공포의 역치가 올라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쏟아져 나오는 두려운 뉴스들을 하나하나 넘겨보면서 그렇게 고통에 둔감해지는 마음, 두려움의 역치가 올라가는 요즘에 대해 생각했다. 혐오와 고통과 분노는 최근의 우리 주위에서 최대치에 이르고 있는 감정들이다. 강남역 10번 출구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은 지금 우리 주변에 부정적인 감정들이 얼마나 많이 들끓고 있는지를 다시 자각하게 해 주었다. ‘묻지마 살인’ 이라기에는 성별과 나이와 힘의 유무를 너무나 섬세하게 물어보았고, ‘분노조절장애’라기에는 자신보다 강한 자인지 아닌지 아주 정확히 따졌다는 점에서 이것은 다른 성격의 사건이다. 극단에 이른 혐오의 역치가 더욱 높이 치솟아가는 과정을 보는 것 같다. 사회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분노가 약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는 과정은 불행하고도 추하다.

이렇게 사회적 파토스가 극치에 이른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한 존경하는 시인의 시집을 보며 조금의 힌트를 구해 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관(世界觀)이 아니라 세계감(世界感)이다. 세계와 나를 온전하게 느끼는 감성의 회복이 긴급한 과제다. 우리는 하나의 관점이기 이전에 무수한 감점(感點)이다.”(이문재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 중에서). 세계를 감각하는 마음을 되찾는 것이 지금 이 시대의 가장 시급한 책무인 것 같다. 공감하는 법, 더불어 연민하는 법, 다른 이의 아픔에 슬퍼하는 법을 잊는 순간 우리는 무심과 고통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잠시 멈춰 우리의 감정과 감성을 차분히 다시 바라볼 때, 극으로 치달아가던 마음들이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 갈 것이다. 내가 단순히 나라는 개인이 아닌 ‘우리 우리들’임을 알게 될 때 말이다.

[불교신문3213호/2016년6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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