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고 참고 기다려라” 철저한 인욕의 삶

“자네는 자네 생각대로

곧게 가려고만 고집하는가

세상엔 곧은 길만 있지않아

성정이 그러하면 남들과

잘 부딪히지 않겠는가”

 

‘범어사다운 범어사’ 일궈

격동기마다 주지 소임 맡아

사찰 정비 후 훌쩍 떠나…

 

상좌들도 스승 뜻 이어

지역불교 큰 일꾼 자리매김

 

동주당(東洲堂) 벽파(碧坡)대선사(1939~ 2001)는 범어사의 사격(寺格)과 위상을 견지하고 이어가는데 전력을 다했다. 선찰대본산으로서의 범어사, 동산(東山) 대종사의 청정수행 가풍이 깃든 범어사, 불도(佛都)라 일컫는 부산에 사는 시민들의 안식처인 범어사가 흔들리지 않고 ‘범어사다운 범어사’로 자리를 굳게 지키도록 애썼다. 범어사 주지를 세 번이나 맡을 정도로 범어사는 당신을 필요로 했고 당신도 이 일을 묵묵히 수행했다. 그러나 세 번의 주지를 맡은 기간은 한 만기 임기인 4년도 되지 않았다. 그처럼 벽파스님은 범어사의 격동기에 큰 임무를 맡았고 일이 마무리 되면 서슴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벽파스님을 일러 ‘이(理)와 사(事)에 원융하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스님’이라고 하는 연유도 당신의 이런 행적에서 나온 말이다.

“선찰(禪刹) 고사(古寺)에 전생에 실은 인연 많았던가/ 한 번 와서 석장을 꽂음이여, 42년이로다/ 근엄하고도 위의(威儀)가 있어 종문(宗門)의 총수요/… 선정(禪定)은 산악처럼 서 있고 계율은 얼음처럼 깨끗하구나….”

“선사의 평소 성품을 돌아보건대 근엄하면서 청렴결백하여 의(義) 아닌 것에 몸을 굽히지 않고 검약(儉約)에 편안히 하셨으며 평정한 마음으로 일에 응하고 공평함에 일관하여 조금의 사곡(私曲)도 없었으며 진실되고 성실함에 바탕이 되어 허위(虛僞)를 엿볼 틈이 없었다.”

벽파스님에 대한 이런 글들을 보아도 당신의 살아 온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후학들은 알 수 있다.

“순리대로 살아라. 도를 닦는다 해도 경우와 순리에 어긋나면 안된다. 도인은 이치에 맞게 사는 사람이다.” 벽파문도회장 정여스님은 스승의 이 말을 귀감삼아 살고 있다. ‘물 흐르듯 바람에 구름 가듯’ 살라는 말이라 한다.

벽파스님은 체구가 보통사람 보다 큰 장부였다. 키가 180cm에 체중도 85kg 정도였다. 그러나 항상 말을 아끼고 과묵했다. 시자들에게도 참 편하게 대해 주었다고 한다. 아침에 당신이 드실 찻물을 갖다 드리고 나면 저녁 때까지도 시자를 찾는 때가 별로 없었다. 당신이 손수 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자들은 당신이 방에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잘 모를 정도였단다. 시봉을 힘들게 하지 않은 스님이라고들 한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칠석날 행사를 크게 했다. 산내 암자 스님들도 오고 해서 근 300여 명의 스님과 신도들이 모였다. 공양을 짓느라 큰 방 부엌에 불을 때니 방이 더웠다. 벽파스님은 그런데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당신은 방바닥에 나무토막을 갖다놓고 그 위에 좌복을 깔고 앉아 있었다. 마치 찜질방에 앉은 것 같았다. 그런데 스님의 공양을 차려드리는 걸 시자들이 깜빡했다. 손님 접대하느라 바쁘게 설치다 보니 정작 스님의 공양 차림을 잊은 것이다. 불호령이 내릴까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는 시봉에게 스님의 말은 “뭐, 한 끼 굶으면 어떠냐”였다.

말년에 머물던 금강암을 중창할 때다. 스님은 상좌 정여스님을 불러 “네가 책임지고 잘 해 봐”라는 말 뿐이었다. 정여스님은 금강암을 번듯하게 중창했다. 법당 현관과 주련 등도 모두 한글로 했다. 사찰 건물 주련의 한글화에도 벽파스님은 앞장섰다.

현 금강암 주지 정만스님은 “스님은 기다리고 참는데 달인이시다”라고 한다. 화를 낸 일이 없는 분이란다. 당신 스승이신 동산스님이 일러주신 ‘감(堪)·인(忍)·대(待)’ 즉, 견디고 참고 기다린다는 가르침을 철저히 따른 분이라 한다. “이 사람아, 자네는 자네 생각대로 곧게 가려고만 고집하는가. 세상엔 곧은길만 있는게 아니야. 자네 성정이 그러하니 남들과 잘 부닥치지 않는가.” 정만스님은 스승의 이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산다. 그러나 때로는 스승의 말씀에 ‘내가 타고난 성정을 어쩌지 못함’을 생각할 때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만스님은 스승의 마지막을 모시고 산 자신을 복이 많은 제자라 한다.

“절 살림은 여러 사람의 힘을 합쳐야 한다. 내 의견이 옳다 해도 다른 사람 의견도 들어야한다. 중의(衆議)를 걸러서 해야 한다. 그게 바로 원융살림이다.” 범어사 안 살림을 오래 산 정현스님(부산 가야사 주지)도 스승의 원융함을 따라 절 살림을 살고 있다. “말사 주지를 나가려면 본사에 봉사하지 않으면 어렵다. 본사에서 봉사 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찌 말사를 맡아 나가겠는가. 본·말사의 책임자 소임은 한 사람이 맡아 할 수는 없다. 본·말사 소임은 순환보직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말사 주지를 맡아 일해가면서 정현스님은 은사의 말씀을 곱씹는다고 한다. 정현스님이 범어사 원주 소임을 볼 때다. 은사가 주지니까 책임감도 무겁게 느껴졌다. 정현스님은 스승에게 “신도들이 와서 기도 잘하고 편하게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했다. 그 때도 스승의 말씀은 “자네가 알아서 잘 하게”였다. 정현스님은 스승이자 주지인 벽파스님에게 이런저런 말도 않고 스스로 알아서 도량정비를 했다. 종무소 옆 돌계단도 정비하고 담장과 축대도 번듯하게 했다. 국가의 보조금도 사중의 예산도 쓰지 않았다. 물론 청구도 하지 않았다. 신도들이 주는 약값, 보시금 등을 모아 놓은 돈으로 도량정비에 썼다. ‘불사는 원력만 가지면 이룰 수 있다’는 평소 수행자로서의 신념으로 해낸 것이다.

벽파스님은 이렇듯 제자들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제자가 뭐라고 하면 “그래, 자네가 알아서 잘 해봐”라는 말씀뿐이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들이었다.

부산 기장 장안사 주지 정오스님은 스승이 사형들을 대하는 풍도를 지켜보면서 자신도 그런 법향(法香)에 젖어 수행하고 있다. “은사 스님이 법문 하실 때는 노스님의 말씀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웅전 주련의 글귀도 자상하게 풀어서 설해주셨지요. 불이문 주련인 입차문내(入此門內) 막존지해(莫存知解)라 쓴 노스님의 친필 내용도 깊이 있게 해설 하셨습니다.” “스님은 언행이 일치한 분이였으며 실언(失言, 허튼소리)을 하지 않은 분이시지요.” “때가 되면 다 알게 된다.” 정오스님은 스승의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산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절에 와서 무엇이든지 얼른 하여 성과를 얻고 싶은 마음이 앞설 때 스승이 들려준 말씀이란다. 그 역시 노스님의 ‘감인대’ 가르침이다. ‘견디고 참고 기다려라’ 간략한 법문이지만 수행하면서 새기고 또 새겨도 그 깊은 뜻을 따르기는 어렵다고 한다.

벽파스님의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제각기 포교와 정진에 힘쓰면서 지역 불교계의 큰 일꾼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정여스님은 문도회장이자 보현장학회 대표이사, 사단법인 세상을향기롭게 대표와 부산불교사회복지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정현스님은 사회복지법인 동주의 대표이사로 스승을 기리고 있으며 불국토의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정만스님은 원효학원 해동중 대표이사로, 정오스님은 종회의원, 사회복지법인 범어 이사, 인연을향기롭게 대표, 기장불교연합회장, 기장다도문화대학 학장 등을 맡고 있다. 교육불사, 복지사업 등을 지역 사찰들과 함께 활발히 하면서 스승의 큰 뜻을 이어가고 있다. 논설위원

 

 

도움말: 벽파문도회 정여스님, 정현스님,
정만스님, 정오스님

자료: 벽파대선사 비문

사진: 석공스님(범어사 주석, 사진작가)

 

[불교신문3213호/2016년6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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