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병 환자처럼 

비 내리는 마로니에 공원 앞 횡단보도

한 움큼의 약 봉지를 받아들고 약국을 나왔다

신호등은 선혈처럼 붉었다

맞은편 신호등 옆에는 박인환이

만삭의 젊은 여인과 함께 핏기없는 얼굴로 서 있고

그 곁에 버버리 옷깃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김수영이 서 있었다

몇 사람 건너 백석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늘에서는 이상이 반팔 옷을 입고 비를 맞으며 막 내려오고 있었다

저들은 왜 또 추적추적 비를 타고 내려와 여기에 있는가

태우다 남긴 꽁초와 마시다 남은 해장술과

마무리하지 못하고 버려둔

너덜거리는 몇 줄의 시 때문인가

잎은 지고 바람은 불고 비는 내려 질척한 보도에서

나는 플라타너스 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저들이 길을 건너올 때까지 기다리며 서 있었다

떨어지는 누런 잎을 바라보고 있었다

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명 시인이 네 번째 시집 <벽암과 놀다>를 펴냈다. 첫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이후 출판을 거듭하면서 시가 쉬워졌다. 읽는데 부담이 덜하지만, 느낌은 더 짙게 다가오는 시가 <벽암과 놀다>에 실렸다.

 

 

내 삶의 시 

내 삶의 시는 아바나의 거리에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새가 된다.

하늘 멀리 구름이 되어 오는 시

설산에 있는 히말라야 봉우리 위에

하이얀 눈꽃이 되어 날개를 달고

어둠이 없는 곳으로 날아간다.

 

쿠바 아바나에 머문 이 몸은

혁명의 성지 민중의 지도자

카스트로의 외침이 울리는 거리

위대한 영웅들의 속삭임 같은

대자연의 승리자 민중이 되자

 

아바나에 와서 무엇을 구하라

태평스런 민중들의 삶 속에

내 삶의 고독은 일시에 일어나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저물어 오는 밤을 씻어 내린다. 

진관스님이 쿠바 여행을 하면서 그 여정을 200여 편의 시로 담았다. 쿠바의 카스트로가 혁명가인지 독재자인지 모른다. 하지만 진관스님은 민족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산 그를 혁명가로 본다. 민중을 위한 삶은 어쩌면 스님이 수행자의 길을 걷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날고 싶다 

노랑부리저어새는 저 먼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날아가 여름을 나고 개똥지빠귀는 손바닥만한 날개에 몸뚱이를 달고 시베리아를 떠나 겨울 주남저수지에 온다고 한다 

나는 철 따라 옷만 갈아입고 태어난 곳에서 일생을 산다 

벽돌로 된 집이 있고 어쩌다 다리가 부러져도 붙여주는데가 있고 사는게 힘들다고 나라가 주는 연금도 받는다 

그래도 나는 날아가고 싶다 

40년간 문단에서 활동한 이상국 시인의 시는 쉬우면서 쉽지 않다. 울림이 너무 크다. 그러면서도 애뜻함을 전해준다. 이런저런 해석을 달지 않고, 시어를 따라 머릿속에 풍경을 그려가다 보면 행복한 미소를 만들어 주는 힘이 있는 시다. 이상국 시인은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정지용문학상과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한 중견 작가다.

 

송광사 가는 길 

가을 햇살이 엿가락처럼 늘어나

휘어진 산길을 힘껏 끌어당긴다

늘어날 대로 늘어난 팽팽한 틈새에서

저러다 딱, 부러지면 어쩌나

더 이상 갈 길을 못 찾고 조마조마하던 차에

들녘을 알짱대던 참새 떼가 그걸 눈치챘는지

익어가는 벼와 벼 사이를 옮겨 다니며

햇살의 시위를 조금씩 느슨하게 풀어주고 있다

비워야 할 일도 채워야 할 일도 없다는 듯

묵언정진 중인 주암호를 끼고

한 시절이 뜨겁고 긴 송광사 가는 길

참, 아득하기만 하다 

송광사를 사랑하는 사람들 회원으로, 깊은 불심을 가진 우정연 시인. 어머니로서 역할을 마친 나이에 시인으로 뒤늦게 등단했다. 우 시인의 시에서는 산지기의 냄새가 난다. 산사를 지키며, 묵묵히 우리의 정서를 담아낸 시가 시집 곳곳에 담겨 있다. 전남 광양 출신의 우 시인은 2013년 <불교문예>로 등단했다.

 

 

벽암록을 읽다 13 

나무 그림자

검은 고양이처럼 휙 지나간다

온종일

늦가을 바람에 넋이 나간

머리 위 느티나무

붉은 달이 간신히 붙들고 있다

이제

죽어도 좋을때라는 생각 자꾸 드나보다.

아무것도 그립지 않은 듯 밟히는

담벼락 아래 낙엽들.

 

시는 무덤

무덤속에 누워 다시 푸른 바위를 읽다

한 생각이 만 년이면 만 년도 한 생각이겠네.

지긋지긋하지만도 않겠는데?

1990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한 노태맹 시인이 <벽암록>을 읽으며 그 느낌을 시로 적었다. 연작시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찾아가려는 마음 이면에 사회의 변화를 바라보는 시인의 의지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

 

 

나도 그랬었지 

지하철 올라가는 계단에서

짧은 미니스커드를 입는 아가씨를 보며

나도 저 나이에는 그랬었지.

 

손이 꽁꽁 나도 그랬었지, 추운 날에

얇은 스타킹 하나에

하이힐을 신은 아가씨를 보며

나도 그 나이에는 그랬었지

비오는 날 밤,

수신인도 없는 편지에 밤을 사 담으면서

문틈 새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감동하던

어여쁜 두 가닥 땋은 머리 여고시절,

그때 쓴 그 편지는 아직도 있으려나.

 

철없는 아이들의 조잘대는 애기를 들으며

낙엽만 폴폴 날려도 까르르 숨 넘어가던

그땐 나도 그랬었지.

 

논산 가는 버스 안에서

문득 나의 철없던 시절이 떠올라

유리창에 긁적거려 보네. 

➲ 배선희 시인은 세계 198개국을 여행한 국제포교사다. 지금은 국내 전통사찰 여행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때론 음악연주를 들으면서 받았던 감동도, 절을 가면서 느끼는 소회도 시와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다. 풍경을 담백하게 담은 시에서 활기찬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은 배 시인의 에너지가 시에 담겨 있어서일까.

[불교신문3211호/2016년6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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