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맑은 수행자 마음도량 넓히는 ‘비밀의 정원’

큰 법당 뒤편으로 이어져 있는 

인적 드문 수행자들 포행길 

울창한 나무…식생도 다양해 

 

국립수목원으로 처녀림 이어져

대낮에도 하늘 가린 비경 간직

일반인에게 출입은 허락 안돼

①봉선사 템플스테이에 참가자들이 지도법사 스님과 국립수목원을 산책하고 있다.(사진제공 봉선사)

 

많이 변했다. 예전에 남양주 봉선사를 찾아가는 길은 굽이굽이 돌아가던 길이었다. 서울에서는 청량리에서 버스를 타고 남양주 지선버스를 타고 두 시간은 족히 가야 했던 시골길이었다. 하지만 서울 외곽순환도로가 이어지고 굽었던 길이 바로 펴졌다. 버스 대신 승용차로 휙하니 다녀올 수 있는 편리한 길이 됐다.

절도 많이 변했다. 물론 원형은 그대로 보존돼 있지만 사격은 몇 배로 커졌다. 특히 일주문을 새로 신축했고 템플스테이 공간은 새로 부지를 마련해 건립했다.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옛 고사성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생각난다. 과거에는 봉선사에서 하룻밤 묵어 가려면 힘이 들었지만 지금은 마음만 내면 충분히 가능할 듯하다.

봉선사 가는 길과 사찰은 변했지만 숲은 여전히 웅숭깊다. 물론 숲은 변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숲이 내뿜는 기운은 변함이 없다. 봉선사 입구에 장대하게 서 있는 전나무는 올곧은 수행자를 닮았다.

봄이 오는 길목에 봉선사를 찾았다가 숲길에 매료되어 지난 3일까지 네 번이나 찾았다. 처음에는 비 내리던 날 큰 법당 옆 운하당 난간에 앉아서 건너편 산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보는 경치가 좋아 넋을 놓고 하염없이 한나절을 앉아 있었다. 불교대학에서 공부하는 젊은 불자들의 수런거림이 적막한 산사의 정적을 깨우기도 했지만 산사의 운치는 잠든 감성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봉선사를 찾는 불자들 중에는 젊은 분들도 많았다. 과거에는 사찰을 찾는 불자라고 하면 의례껏 나이가 드신 장년이나 노년으로 생각하지만 지금은 젊은 여성불자도 늘었다. 사찰이 사회복지 활동을 광범위하게 펼치다 보니 자원봉사를 하려는 불자들도 절 문턱을 자주 넘어드는 듯하다. 템플스테이 공간이 넓어진 봉선사도 이제는 과거 고즈넉한 산사가 아니라 현대와 과거가 교차해 신행과 수행이 함께하는 종합수행포교 도량이 되어 있었다.

봉선사는 이제 스님들만의 수행공간이라기보다는 불자들의 신행공간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 일반인들이 산사를 찾아 흐트러진 자신을 추스르는 치유의 공간으로 이용되는 템플스테이도 활성화 되고 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이 즐비한 천년고찰이 온 국민에게 마음치유 공간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봉선사의 역사는 1000년이 넘는다. 고려 광종 20년(969년)에 법인국사가 창건해 운악사로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해 교종 중심사찰이 됐다. 세조의 비 정희왕후는 세조를 추모하여 89칸의 규모로 중창한 뒤 봉선사(奉先寺)로 사명을 변경해 왕실사찰로 삼았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는 항일 독립운동을 한 태허스님이 활동했던 사찰로 민족의 정기가 스며 있다. 같은 시대에 운허스님도 봉선사에 주석하며 경전의 한글화에도 앞장섰다. 그 뜻을 현재 조실 월운스님이 이어 한문대장경의 한글화에 앞장서고 있다. 그래서 ‘큰법당’ 현판도 한글로 되어 있기도 하다.

숲길을 찾아 봉선사 경내를 두리번 거리다가 봉선사 포교팀장인 김근덕 거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②지난 4월 방문했을 때의 봉선사 사색의 숲길로 연둣빛 숲이 아기자기하다. ③지난 1일 방문한 숲으로 녹음이 우거져 울창한 모습이다. ④산딸기가 지천을 이루고 있는 봉선사 사색의 숲길.

“봉선사 숲 길을 한번 가 볼 수 있나요?”

“광릉 국립수목원과 연결돼 있는데 스님들이 이용하는 길이 있어요. 기자님에게는 특별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누구나 돌아볼 수 있는 길은 일주문에서 큰 법당 주변까지다. 김 팀장이 안내해 준 길은 큰법당 동쪽 언덕을 올라 큰 법당을 돌아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내려오는 1km정도의 숲길이었다. 이 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생태가 잘 보존돼 있었다. 걸으면 저절로 사색에 젖어드는 길이었다. ‘봉선사 사색의 숲’으로 불러보니 참 잘 어울린다.

길 섶 곳곳에는 애기나리를 비롯한 온갖 야생화들이 저마다 새치름히 자라나고 있었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저마다의 색깔을 우주에 발산하는 들꽃. 척박한 땅에서도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고 저마다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는 성실함은 사람들도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닌가 싶다.

숲은 거대한 소나무와 전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간간이 하늘빛이 드러난 곳에는 잡목이 그 사이를 메우고 있다. 나무와 나무는 조화를 이루면서도 경쟁하듯 자라고 있다. 그 여백에는 다양한 들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엄청난 애기나리 군락을 만났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았더라면 벌써 사라져 버렸을법한 군락이다. 크기로 봐서 곧 잎에서 꽃들이 지고 난 뒤 열매를 맺는 듯 하다. 새벽이슬도 아직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다.

무질서한 듯이 보이지만 숲은 나름대로 간격을 유지하는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봉선사 스님들이 숲을 돌 본 흔적이다. 숲은 방치해 두면 건강하지 않다. 나무와 나무가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간벌(間伐)이 필요하다. 천년 숲이 유지되어온 곳에는 언제나 천년사찰을 지키는 스님들이 숲을 지켜온 덕분이다.

“사람도 훌륭한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보살핌이 필요하듯 나무도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함께 숲을 걷던 김 팀장이 던진 말이 가슴에 턱 꽂힌다. 내소사와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이 생각났다. 통도사의 소나무 숲길도 뇌리를 스쳤다. 맞장구치듯 대답이 나왔다.

“숲도 보살핌이 필요하군요.”

한낮의 뜨거움이 대기에 가득했지만 사색의 숲은 서늘했다. 숲이 뿜어내는 기운 덕분에 30도가 넘는 더위도 힘을 쓰지 못했다. 4월에 왔을 때는 휑해 보였던 숲이었지만 6월1일에 방문했을 때는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빽빽했다. 봉선사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풍경도 확 달라졌다. 산딸나무 꽃이 무성했던 자리에는 산딸기가 가득 달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⑤4월 사색의 숲에서 내려다 본 봉선사 전경. ⑥지난 1일 사색의 숲에서 내려다 본 봉선사 전경.

무성한 숲길이라 하산 길을 못 찾아 이리저리 헤맸다. 겨우 길을 찾아 내려오는데 한 스님을 만났다.

“이곳에는 출입이 금지된 지역입니다. 입산이 금지된 곳에 들어오시면 자칫 벌금을 물을 수 있으니 찍으시던 사진 찍으시고 내려가세요.”

얼른 카메라를 추슬러 하산하니 템플스테이 공간이다. ‘수행공간 출입금지. 입산금지’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껏 돌아본 사색의 숲길은 포교팀장이 기자에게 준 특권이었다. 이 천혜의 비경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다보면 훼손의 우려가 있기에 다행스런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사 동전의 양면성이 이런데도 적용되는 듯하다.

숲길을 한 바퀴 돈 뒤 큰법당 앞에 다시 서니 우측에 방적당(放跡堂)이라는 전각이 보였다. ‘발걸음을 자유롭게 놓아 준다’는 뜻. 수행자가 일정기간 수행을 한 뒤 발걸음을 멈추고 쉬는 공간이다. 20여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사색의 숲길을 걸었지만 오랫동안 수행을 하고 돌아온 듯 뿌듯하다. 방적당에 발걸음을 멈추고 편안하게 쉬어가고 싶어졌다.

[불교신문3210호/2016년6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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