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는

최소한 우리가 사람으로서

자존심을 지켜야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명분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절망 속에 있더라도

아무리 싸움과 다툼이 그치지 않는

사바세계라 할지라도

희망을 만들어가며

서로를 보듬어야 되지 않을까 

경제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이 공동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재화를 획득, 이용하는 활동 및 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회관계’를 칭한다. 지난 4월13일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을 뽑고자 전국이 술렁거렸다. 지난 19대 국회의 공과를 따지며 입법부와 행정부의 정치역학적인 관계를 가늠하고 평가했다.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대로 지난 4년간의 실적을 경제적 실적에 비추어 평가를 했고, 행정부는 행정부대로 경제적 실적을 앞세워 자기홍보를 했다. 여당은 실책의 책임을 야당의 비협조를 빌미로 책임 전가를 하고, 야당은 경제정책의 비효율성과 무능력을 집중 성토했다. 요컨대 이편도 경제, 저편도 경제를 앞세웠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은 국민대로 여와 야를 막론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경제적으로 비옥하게 하는 편이 ‘우리 편’이라는 잣대로 쟀다는 것이다. 어쨌든 토네이도처럼 광풍(狂風)의 시절은 지나갔고 각 당의 내부에서는“네 탓” “내 탓”의 책임소재를 놓고 한창 내부 재정립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그런데 사전적 의미에서 보더라도 경제는 인간이 공동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짐승이 아닌, 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무엇인가 창출하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경제의 의미가 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인간은 서로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가짐에 있는 것이 아닐까? 196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의 모든 것은 소위 말하는 경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어느 쪽, 어느 편에서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에 관해서는 말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사람은 짐승과 달리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것이다. 적어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뿜어져 나오는 욕망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聖人)들이 계율이란 것을, 계명이란 것을 말씀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경제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자 하는 부분 중에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경제의 본래의 뜻을 제처 두고 누가, 얼마나, 더 욕망을 충족시키고 편하고, 우아하게 생활하는데 필요한 재화를 확보하는 것이 지상최대의 목표가 돼 있다.

그래서 그것을 갖고자 정치인이건, 관료이건, 교육가이건, 저자거리의 일반시민이건 더, 더, 더 목말라 하면서 행여 자기의 것을 빼앗기기라도 할까봐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다. 경제적 효율성의 극대화를 위해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 달리고 있다. 단 한번도 ‘사람이 사람이기를 위해 살아가고자’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절간에 일일 시재금의 금액이 얼마인가 또는 시주함의 불전이 얼마나 있는가에 따라 좋은 절, 나쁜 절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교회에서도 주간시보에 공포하는 헌금액과 헌금함의 현찰의 액수에 따라 은총의 많음과 적음을 비교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무한한 우주의 시간 속에 ‘우리’라는 존재의 잔여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는 최소한 우리가 사람으로서 자존심을 지켜야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명분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절망 속에 있더라도, 아무리 싸움과 다툼이 그치지 않는 사바세계라 할지라도 희망을 만들어가며 서로를 보듬어야 되지 않을까?

[불교신문3204호/2016년5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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