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丙申年 하안거 결제법어

 

진제스님

조계종 종정

 

衆生諸佛不相侵

山自高兮水自深

萬別千差明底事

鷓鴣啼處百花香

 

모든 중생과 모든 부처님이 서로 침범하지 아니함이요/ 산은 스스로 높고 물은 스스로 깊도다.// 천차만별로 이 일을 밝히니/ 자고새 우는 곳에 백 가지 꽃이 향기롭도다.

알겠는가?

금일은 병신년(丙申年) 하안거 결제일이라. 전장(戰場)에 나서는 장수가 오직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앞만 보고 나아가듯이, 태산을 오르는 사람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정상을 향해 쉼없이 올라가듯이, 결제에 임하는 대중은 신심(信心)과 용맹심으로 모든 반연(攀緣)을 다 끊고 모든 습기(習氣)에 놀아나지 않고 각자의 화두를 성성(惺惺)하게 챙겨서 팔만사천 모공(毛孔)에 의심이 사무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삼생(三生)의 중생업(衆生業)에 놀아나지 않고 24시간, 365일 화두의심과 씨름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이번 석 달 동안은 옆도 돌아보지 말고 삼시 세 때 먹는데 초연하고 삼생의 습기(習氣)에 털끝만큼도 끄달리지 않고 뼈골에 사무치는 의심을 하루에도 천번만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두가 있는 이는 각자 화두를 챙기되, 화두가 없는 이는 “부모에게 이 몸 받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하는 이 화두를 들고 오매불망 간절히 의심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눈앞에 화두가 떠나지 않아 졸리는 바도 없고 망상이 일어나려야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부가 무르익어지는 것입니다.

혼신의 정력을 쏟아 무한히 노력하다보면 문득 참의심이 발동하여 화두의심 한 생각만이 또렷이 드러나게 되는데,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밥을 지으나 청소를 하나 직장 일을 하나 잠을 자나, 일체처일체시(一切處一切時)에 화두 한 생각만 흐르는 냇물처럼 끊어짐 없이 흘러가게 됩니다. 사물을 봐도 본 줄을 모르고 소리를 들어도 들은 줄을 모르게 되니, 다겁다생(多怯多生) 이어온 모든 습기가 다 녹아 없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화두일념 상태로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시간이 흐르고 흐르다가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에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남과 동시에 자기의 참 모습이 환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여래(如來)의 땅에 이르게 되고 천칠백 공안을 한 꼬챙이에 다 꿰어버리게 되는 것이니, 누가 어떠한 법문을 물어와도 척척 바른 답을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화두일념삼매의 경계가 오지 않고는 견성이 불가능합니다. 참선으로 견성하는 특징이 여기에 있습니다.

“천하를 종횡하려면 정진의 고삐 늦추지 말아야” 

일생을 머리를 깎고 시주밥을 먹고 석 달 안거를 하는 이들이 부지수인데 어째서 견성을 못하느냐 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화두와 씨름을 안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석 달간은 진짜 오늘부터 참 출가를 해서 부처님 견성법을 깨달아야 겠다는 확고한 신심으로 모든 반연이 재(灰)가 되고 분별망상이 재가 되어 오로지 화두를 들고 간절한 의심으로 화두와 씨름한다는 각오로 결제에 임한다면 이번 안거동안에 누구라도 크게 쉬는 땅에 이르러 불은(佛恩)과 시은(施恩)을 다 갚고 천하를 종횡하는 대자유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각일초도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라.

당대(唐代)에 부배(浮盃)화상의 명성이 세간에 유명해지자, 하루는 능행파(凌行婆)가 찾아와서 절하고 물었다.

“힘을 다해 말한다 해도 이르지 못한 진리를 누구에게 부치려 하십니까?” 그러자 부배화상이 말하기를, “나는 그것에 대하여 말할 수 없노라”하니, 능행파가 “멀리서 듣기로는 부배라는 이름이 자자하더니, 와서 보니 듣던 바와 같지 못하구나!”하고 부배화상에게 한 방망이를 내렸다.

“달리 장처(長處)가 있다면 그대가 드러내 보라.” 부배화상이 이렇게 말하자, 능행파가 “아이고, 아이고!” 곡(哭)을 하면서, “이 가운데 원수의 고통이 더욱 깊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부배 화상이 묵묵히 있자, 능행파가 “말의 바르고 치우침도 알지 못하고, 이치의 옳음과 그릇됨도 모르면서 남을 위한다고 한다면 재앙이 생긴다”고 말했다. 부처님의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면서 법문을 한다든가 남을 지도한다는 것은, 정법(正法)을 그르치고 만인(萬人)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므로 허물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 한 승(僧)이 부배 선사와 능행파의 이 문답을 남전(南泉)선사께 말씀드리니, 남전선사께서 들으시고는 이렇게 평(評)을 하셨다. “슬프도다! 부배가 그 노파에게 한 차례 꺾였구나!” 능행파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웃으면서, “남전노사가 그래도 조그마한 기틀을 갖추었구나!” 라고 하였다.

그런데 거기에 마침 징일(澄一)이라는 선객(禪客)이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물었다. “어째서 남전선사께서 조그마한 기틀을 갖추었다고 하는가?” 그러자 능행파가 곡(哭)을 하면서, “슬프고 애통하도다!”하니, 그 선객이 어리둥절해 하였다. 다시 능행파가 “알겠느냐?”하고 다그치자, 선객은 속수무책으로 합장하고 서 있기만 하였다. 그러자 능행파가 탄식하며, “죽은 송장과 같은 선객이 부지기수(不知其數)로다”라고 하였다.

후에 징일이 조주(趙州)선사를 찾아가서 능행파와의 이 문답을 말씀드리니, 조주선사께서 듣고는 말씀하셨다. “내가 당시에 그 구린내 나는 노파를 보았더라면 한 마디 물어서 벙어리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징일이 그 말을 듣고 여쭙기를,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그 노파에게 어떻게 물으시렵니까?”하자, 조주선사께서 별안간 징일을 때리셨다.

“어째서 저를 때리십니까?” “이 송장같은 선객을 이 때에 때리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느냐?”

능행파가 이 일을 전해 듣고서 말하였다. “조주선사가 나의 방망이를 맞아야 옳다!” 조주선사께서 이를 전해 듣고 곡을 하시며, “슬프고, 슬프도다!”하셨다. 능행파가 다시 이것을 전해 듣고 탄식하며 일렀다. “조주선사의 눈빛이 사천하(四天下)를 비춤이로다.”

조주선사께서 이 말을 전해 들으시고는 능행파에게 사람을 보내 물으셨다. “어떤 것이 조주의 눈이냐?” 이에 능행파는 주먹을 내밀었다.

조주선사께서 이것을 전해 듣고 송(頌)을 지어 보내시기를,

當機覿面提 覿面當機疾

報你凌行婆 哭聲何得失

“기틀에 당해 보는 찰나를 잡으니/ 보는 찰나에 기틀을 당함이 쏜살같더라.// 그대 능행파에게 답하노니,/ 곡하는 소리에 어찌 얻고 잃음이 있으리오”하시니, 이에 능행파가 회답하였다. 

哭聲師已曉 已曉復誰知

當時摩竭令 幾喪目前機

“곡(哭)하는 소리를 이미 아셨나니/ 이미 아신 뜻을 다시 누가 알리오.// 당시 마갈타국 설법에/ 목전의 기틀을 잃음이 얼마였던고.” 

시회대중(時會大衆)은 남전, 조주 두 분 선사를 알겠느냐? 남전, 조주선사는 천하 선지식(善知識) 중의 선지식이로다. 능행파를 알겠느냐? 선지식을 능가하는 고준한 안목을 갖추었으니, 보살 가운데 으뜸이로다. 부배선사를 알겠느냐? 이름만 분분했지, 실속없는 허수아비로다. 대중아! 네 분의 문답처(問答處)에 대해서 한 마디 일러보아라. (대중이 말이 없으니) 

三箇四箇漢 一坑埋却 噓 噓!

“세 분, 네 분을/ 한 구덩이에 매장함이로다./ 허! 허!”

 

 

 “어찌 시간을 허비하겠는가”

고산스님

쌍계총림 쌍계사 방장

 

出格丈夫意衝天

打破鐵輪成太平

萬類含識自在遊

娑婆變爲極樂國

“격식에 뛰어난 대장부가 뜻이 하늘에 사무치니/ 철륜을 타파하고 태평한 세상을 이루었도다.// 만류의 함식중생이 자유자재함을 얻었고/ 사바세계가 변하여 극락세계가 되었도다.” 

수행자가 한 생각 몰록 깨달으면 부처님과 조사와 손을 잡고 자재로이 유희하거니 어찌 많은 시간을 허비하겠는가(修行者 一念頓悟 捉敗佛祖 自在遊戱 何用多時麽).

그 혹 그러하지 못할진대 저 본참공안에 간절히 간절히 참구해서 전후제가 끊어지고 의심이 독로해서 24시간 가운데 성성하여 매하지 아니하면 점점 아름다운 경계에 들어가리니(其或未然 於本叅公案上 叅祥 前後際斷 疑團獨露 二四時中 省省不昧 漸入佳境), 이러한 시절에 이르러서 생사 두 글자를 이마 위에 붙이고 한 칼로 두 끝을 내어서 마음을 취모리검과 같이 해서 잠자고 밥먹는 것도 잊고 저 화두공안에 세밀하게 공부를 지어가되 1칠일 내지 2칠일, 3칠일을 이와 같이 하면 홀연히 본지풍광을 답착해서 곧 생사일대사를 요달하리니 간절히 참구할지어다(到此時節 生死二字 付着額上 一刀兩斷 心如吹毛利劍 廢寢忘餐 於公案上 密密做去 如是七日乃至二七日, 三七日 忽然踏着本地風光 即了生死一大事 叅祥). 

一拳打倒須彌山

縱橫行步無罣碍

奉鉢淸香滿盛飯

供養十方佛菩薩

“한주먹으로 수미산을 쳐부수니/ 종횡으로 걸음함에 걸림이 없도다.// 한 발우에 가득한 청향반을/ 시방의 불보살님께 공양하도다.” 

 

“일심이 곧 만상…안개를 걷어내라 ”

 

설정스님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만공선사(滿空禪師)께서 세계일화(世界一花)를 주창하셨다.

“한 떨기 신령스런 이 꽃은 만고(萬古)에 찬란한 심성(心性)의 꽃이다.”

이 꽃은 계절에 관계없이 피고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핀다. 그 모양은 고금(古今)에 화려하고 그 향기는 안으로 온갖 미묘함을 머금고 밖으로 삼라만상(森羅萬像)에 훈훈하다. 이 꽃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주인이 되고 모든 법의 왕이다. 이것은 넓고 넓어서 그와 견줄 것이 없고 높고 높아서 그에 짝할 것이 없다. 참으로 미묘하고 신비하여 천지보다 먼저 생겼으되, 그 시작을 알 수 없고 천지보다 오래 있으되 그 끝남을 알 수 없으니 공(空)이라 할 수도 없고 유(有)라 할 수도 없는 이것은 ‘마음의 꽃’이다.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들이 만고의 보배를 다 지니고 있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육도(六道)에 윤회하면서 가지가지 고통받는 것을 탄식하시고 이것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저 고해(苦海) 중에 무차대비(無差大悲) 용선(龍船)을 타시고 무위정법(無爲正法)을 설하시니 묘한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진리의 물결이 하늘에 가득하여 고해에 빠진 중생들을 열반묘락(涅槃妙樂)으로 향하게 하셨다.

만공선사께서도 이 산중에서 진리의 꽃을 활짝 피워 학인들을 제접하시니 때로는 금강(金剛)과 같은 할(喝)로 인아(人我)의 조잡한 수풀을 베어버리고, 때로는 지혜의 방(棒)으로 첩첩한 어둠을 비춰 미혹의 안개를 걷어내시어 그들로 하여금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의 구렁에서 나오게 하여 진리의 계단에 오르게 하고 만행(萬行)의 꽃을 피워서 법성(法性)에 계합(契合)하게 하였다.

일심(一心)이 곧 만상(萬像)이요 만상이 곧 일심인 것을, 이것은 원만(圓滿)하기가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으며 멀지도 가깝지도 않으며 가고 옴도 없어서 옛과 지금이 없으니 천강(千江)에 비친 달이요 구름 한 점 없는 만리(萬里)의 푸른 하늘이여라.

“밝고 밝은 빛이 대천세계에 비치니/ 여섯 창문(窓門)은 환하고 평온하여라/ 모든 것이 늘고 줆이 없음을 분명하게 알았거니/ 네 벽에 맑은 바람은 겁 밖에 오묘 하구나.”

 

“파도는 물입니다…축생으로 태어나겠는가” 

 

지유스님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우리’라 하면 나도 있고, 상대도 있고 또 상대를 대하는 대상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를 만나면 서로 인사하고 말을 주고받게 됩니다. 그 ‘말’은 내 마음에 품은 생각을 소리내어 밝히는 것입니다. 입으로 나오는 소리를 귀로 들으면서 ‘아 이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더러 청산유수처럼 말을 하지만 상대가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뜻을 상대에게 잘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말없이 말하는 사람이고, 잘 듣는 사람은 듣지 않고도 듣는 사람입니다. 대부분 여기에 부합하지 못하니까 이러쿵저러쿵 말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불문(佛門)에 들어온 지 한 해 두해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삼사십년 된 사람도 있을 겁니다. 불문에 든 후 부처님 경전도 보고 선사들 법문도 듣고, 법당에서 예불도 드리고 여러 법석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스스로 돌아볼 때 이전보다 더 나아졌는지 살펴야 합니다. 불문에 들기 전과 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탐심과 진심을 냈다면 불문에 들어온 후 그런 감정들이 사라졌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문에 들어와 교만 덩어리가 한 해 한 해 줄었는지 자조해 봄으로써 스스로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아야만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자기를 닦고 인품을 높이는 공부입니다. 가장 인품이 높은 분을 부처님이라 합니다. 여래(如來)는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하셨지만 가장 낮은 중생범부일지라도 항상 똑같이 대합니다. 부처와 범부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범부들은 그런 사실을 모릅니다.

부처를 찾으려면 범부를 봐야 합니다. 내가 남보다 세력이 있거나 지식이 있다 해서 남을 업신여기지 않아야 하며,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굽실거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비록 자신이 가난하더라도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두려운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나아가다보면 결국은 미물과 곤충까지도 함부로 죽이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소와 돼지를 잡아먹는데, ‘잡아먹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심정을 살피지 못하고 그저 자기주장만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자기의 고집을 버리라 합니다. 그러면 벌레의 마음도 볼 수 있고 모든 고통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세계가 보입니다.

세계 속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 속에 본래도 있으므로 세계를 다 본다는 것은 본래를 보는 눈까지 열렸다는 말이 됩니다. 마치 기와집에 살든 초가집에 살든, 비단옷을 입든 누더기를 입든 그 안에 있는 내용이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십년 전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를 비교하면서 ‘내가 이렇게 나아졌구나’를 알아차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때론 더 나빠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만이 높아지거나 교만심이 늘었을 수도 있습니다. 불교란 바로 자기를 닦으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을 정리하면 과연 무엇이 자기인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앉아있는 자기도 있고 몸속에 마음이라는 자기도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자기이므로 ‘나’의 무엇이 잘 되었는지 못 되었는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또 몸이 아프고 병이 생기거나 좋게 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원인과 결과를 보고 내 몸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교를 통해서 지금의 자신을 봐야 합니다. 바쁘게 쫓아다닐 때는 몸이 바른지 비뚤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동작을 멈추고 정좌해보면 한쪽 어깨가 비뚤어졌는지, 허리가 아픈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가 비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몸은 쉽게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은 마음을 봐야합니다. 몸은 눈으로 볼 수 있어서 바로잡을 수 있으나, 마음은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귀로 들을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지금 소리를 듣고 이러쿵저러쿵 생각을 합니다. 몸은 좌복에 앉아있으나 마음은 외부의 물건을 보고 소리를 듣습니다. 이 마음이 온전한지 못한지 한 번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미래에 무엇이 올지 걱정에 사로잡히지도 말고 현실로 지금 바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앞에 벽이 있으면 벽이 보일 것이요, 바람소리가 나면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벽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이상한 일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은 딴 생각에 사로잡혀 졸든지 혼탁해서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목탁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혹은 종소리를 듣고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똑같이 소리를 듣는데 왜 깨닫지 못합니까?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이냐를 알아야 합니다. 종소리를 들은 요놈을 찾는 것입니다. 종소리가 나지 않을 때는 요놈이 없습니까? 항상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를 놔두고 자기를 찾고 있더란 것입니다. 아무리 바깥으로 쫓아다니고 ‘도’다 ‘진리’다 해봐야 그런 것은 오지도 않고 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거두고 나면 깨닫는 것입니다. “왜 도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터득하지 못했느냐”고 고민하던 자신을 치우고 보면 바로 보이는 것입니다.

마음밖에 도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은 빼먹고 ‘진리’나 ‘도’를 찾았다면 마음을 확인하면 될 일입니다. 일상에서 소리가 나면 소리인줄 알고, 물건을 보면 물건인줄 아니까 거기에 대고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생각할 줄 아는 놈’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본래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성을 요달한다는 것은 나의 본래면목을 보는 것이요, 나의 주인공이라 것은 본래의 모습이라 합니다. 화가 나고 슬퍼하는 감정은 본래심이 아닙니다. 감정은 일어나면 사라지지만 본래심은 늘 있습니다. 그 자리는 부처님이든 중생이든 일체중생이 동일하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종소리를 듣고 깨달은 사람은 얘기합니다. “복잡한 생각으로 듣기 때문에 당신은 깨닫지 못했다.” 이 말은 종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거나 온갖 감정이 일어났지만, 이제는 그냥 종소리밖에 안 들리더란 것으로 거기서 나의 분별을 알아차렸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파도를 보고 “파도가 무엇이냐” 물으면 “물”이라고 답합니다. 파도는 물입니다. 파도의 본체는 물이고 본체가 움직이면 파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 때 공기는 ‘본체’고 공기의 흐름은 ‘작용’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생각을 하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고, 깨닫는다는 것은 생각하고 있는 본체를 보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모든 동작을 쉬어버리면 파도가 잦아들어 물이 드러나듯이 본래의 모습이 확연해집니다. 그러면 바깥에 종소리를 종소리인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체를 확인하지 못하더라도 작용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생기면 번뇌가 쌓이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만약 본체로 돌아가면 망상이 사라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 모습으로 남을 도우면 도와줬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은 바로 모습(相)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는 몸도 닦고 정신을 맑히라 합니다. 지식은 많으나 머리가 복잡하면 불교를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화엄경>이든 <법화경>이든 그것을 통해서 마음이 맑아져야지, 아는 것만 많아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면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담을 털어버리면 목전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면 상대와 내가 둘이 아니며, 세계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듯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작용과 자기가 둘이 아닌 것을 두고 일체삼매를 성취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정에 들 때 그냥 앉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쁘던 것을 쉬고 자신을 조곤조곤 살핌으로써 몸과 마음이 명실공이 부동의 자세를 취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말입니다.

<금강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여래는 일반 사람과 다른 특수한 특징이 있느냐”하고 수보리존자에게 물으니 수보리존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하였습니다. 만일 누군가 여래에게 특별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보리존자에게 “과거 연등불처소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내가 그곳에서 도를 깨닫고 성취한 적이 있었느냐”고 묻자 수보리존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그때 그곳에서 도를 깨닫고 얻었다고 한다면 연등불께서 석가모니 부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도를 얻고 깨친 바가 없었으니 내가 성불했다”하셨습니다. 자기를 알아차린 것을 얻었다고 이름 붙인 것이지, 실제로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임제록>에 선사가 대중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여 사대로 이뤄진 육체는 무상하다. 또 비위간담, 머리카락, 발톱, 손톱, 이빨 등도 물론 한때 잠시 존재한다. 너희들 가슴속에 오고가는 한 생각 한 생각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두고 보리수라하며 그것을 일러 깨달음이라 한다. 그렇지 못한 것은 무명수라 하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것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너희들이 만일 한 생각 한 생각에 실체가 없는 것을 알지 못하고 쓸데없는 생각에 이끌려 다닌다면 육도사생의 무명세계에 떨어지고 터럭 가죽을 입거나 뿔을 매다는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다.

너희들 모두 한 생각 쉬어버리면 그 자리 그대로 부처님의 청정한 국토다. 바로 그것이 깨달음으로 자유롭게 어떤 세계라도 들어갈 수 있고, 신통무애하게 뜻대로 중생을 제도할 수 있고, 어떤 괴로움이 올지라도 법희선열의 기쁨과 선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몸에 빛이 나서 저절로 비치는 것이니, 누더기 같은 옷을 입더라도 비단옷보다도 아름다우며 무엇을 먹더라도 백가지 맛을 갖춘 좋은 음식이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것과 마찬가지로 따라서 얻을 것도 없는 것이다. 너희들은 훌륭한 대장부가 아니냐. 그런데 무엇을 의심하느냐. 그놈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 요긴한 것이다. 이렇게 확인되었다면, 이 세상 싫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은 만 가지 경계에 따라 변한다. 변하지 않는 그것이 본질인 것이다. 작용하는 데에 따라 근본을 맑히면 근심도 없다. ”

 

“살아있는 오늘 공부해 마쳐야” 

원각스님

해인총림 해인사 방장

 

 

無爲閑道人

在處無蹤跡

經行聲色裏

聲色外威儀

“함이 없는 한가한 도인이여./ 어디 있으나 그 자취가 없도다.// 행이나 소리나 빛깔 속에 있어도,/ 소리나 빛깔을 벗어난 행위로다.” 

황벽(黃檗)스님은 법명은 희운(希運)이고 백장회해(百丈懷海)선사의 법을 이었습니다. 황벽스님이 어느 날 대중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모두 다 술지게미를 먹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행각해서야 어느 곳에 깨달을 날이 있겠는가? 대당국(大唐國)안에는 선사가 없다는 것을 알겠느냐?” 그때 어떤 스님이 앞으로 나와서 말하였다. “그렇다면 여러 곳의 선원에서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있는 분들은 누굽니까?” 황벽스님께서, “선(禪)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스승이 없을 뿐이다”라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 만송노인(萬松老人)은 말했다. 어느 날 황벽스님께서 “그대들 모두는 무엇을 구하는가?”하고 몽둥이로 내쫓았다. 대중이 흩어지지 않으니, 선사께서 다시 이르되 “그대들은 모두 술지게미나 먹는 사람들이다”하였으니 당나라 때에는 사람을 꾸짖을 때 술지게미를 먹는 놈(噇酒糟漢) 이라고 했다.

제(齊)의 환공(桓公)이 당(堂)위에서 글을 읽는데 윤편(輪扁)이 당(堂) 아래서 수레바퀴를 깎다가 망치와 끌을 놓고 당(堂)위에 올라와 물었다.

“감히 묻노니 공(公)께서 읽으시는 것은 누구의 말씀입니까?” 공이 답하되, “성현들의 전적이라 하였다.” 윤편이 다시 묻되 “성인이 어디 계십니까?”하니 공이 답하되 “이미 떠나셨느니라”하였다. “그렇다면 공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의 지게미입니다.” 공이 이르되 “과인이 글을 읽는데 수레바퀴나 깎는 주제에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해명할 말이 있으면 옳거니와 해명할 수 없으면 죽음을 각오하라”하니 윤편이 이르되 “신이 신의 일로써 관찰하건대, 수레를 깎는데 느슨하면 헐거워서 견고하지 못하고 꽉 조이면 빡빡해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느슨히 하지도 않고 꽉 조이지 않으려면 손에서 얻어지고 마음에서 느껴져야 합니다. 말할 수 없으나 묘함은(이치는) 그 사이 존재합니다. 신도 신의 자식에게 가르치지 못하고 자식 역시 신에게 배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의 나이 칠십이 되도록 수레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도 전하지 못하고 죽었을 터인즉, 공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사람의 지게미입니다”하였다. 

사자(獅子)는 교인(咬人)하고,

한로(漢盧)는 축괴(塊)니라.

“사자는 흙덩이를 던지면 사람을 무는데,/ 한나라 개는 흙덩이를 쫓는구나.” 

당나라 헌종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목종(穆宗), 하나는 선종(宣宗)으로 선종이 바로 대중천자이다. 열세 살 어린 나이로 민첩하고 영악하여 항상 가부좌하기를 좋아하였다. 목종(穆宗)이 재위할 때 일찍 조회를 파하자 대중천자가 장난삼아 용상(龍床)에 올라가 여러 신하들에게 읍하는 시늉을 하였다. 훗날 목종의 셋째아들인 무종이 왕위에 오르자 항상 대중천자를 멍청이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종은 지난날 대중이 장난삼아 부친의 자리에 올라간데 대하여 원한을 품고서 드디어 그를 때려 후원에 내다버리고 불결한 똥, 오줌을 끼얹었는데, 다시 살아났다. 마침내 남모르게 도망하여 향엄지한(香嚴志閑) 회상에 있다가 머리 깎고 사미(沙彌)가 되었는데, 뒤에 염관(鹽官)스님의 회하에 가서 서기 소임을 맡고 있었는데, 황벽스님이 그곳의 수좌(首座)로 있었다.

하루는 예불하는 황벽스님을 보고서 사미가 물었다.

“부처에게 집착해서 구하지 말고, 법에 집착해서 구하지 말고, 대중에 집착해서 구하지 말라고 했거니 무엇을 구하려고 예배하십니까?” “부처에게 집착하여 구하지 않으며, 법에도 집착하여 구하지 않으며, 대중에게도 집착하여 구하지 않으면서 항상 이처럼 예배를 하느니라.” “예배를 해서 무엇하려구요?” 황벽스님이 갑자기 뺨따귀를 후려치자 대중이 “몹시 거친 사람이군”이라고 하자, 황벽스님은, “여기에 무엇이 있다고 거칠다느니 섬세하다느니 지껄이느냐?” 하며 또 한 차례 뺨따귀를 쳤다.

대중이 후일 제위를 계승하여 황벽스님에게 추행사문(醜行沙門) 즉, ‘행동이 거친 중’이란 법호를 주려고 하자 상공 배휴(裵休)가 간청하기를 ‘폐하에게 세 번 손질한 것은 삼제윤회(三際輪廻)를 끊는 뜻입니다’라고 하여 단제선사(斷際禪師)라는 호를 내렸다.

여기에 대해서 설두(雪竇)스님께서 송(頌)하시길 

凜凜孤風不自誇

端居寰海定龍蛇

大中天子曾輕觸

三度親遭弄爪牙

“늠름하고 고고한 풍모 자랑하지 않고,/ 단엄하게 세상에 거처하며 용과 뱀을 구분지었네.// 대중천자가 일찍이 가볍게 건드렸다가,/ 세 번이나 따귀를 얻어맞았네.” 

황벽스님께서 한때 홍주(洪州)땅의 개원사(開元寺)에 머물고 계셨다. 상공 배휴거사가 어느 날 절로 들어오다가 벽화를 보고 그 절 주지 스님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슨 그림입니까?” “고승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고승들의 겉모습은 여기에 있지만 고승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 절 주지 스님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배휴가 “이곳에 선승은 없습니까?”하고 물으니 “한분이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상공은 마침내 대사를 청하여 뵙고, 주지 스님에게 물었던 일을 대사께 되물었다. 그러자 대사가 불렀다.

“배휴!”

“예!”

“어디에 있는고?”

상공은 이 말 끝에 깨치고 대사를 다시 청하여 개당설법하시게 하였다. 

明月淸風共一家

“명월과 청풍은 같은 한 집이로구나.” 

동안거 해제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병신년 하안거 결제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너무 빠릅니다. 우리 공부가 늦어지는 까닭은 시간 여유가 있거니 하고 항상 미루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고나면 오늘은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살아있는 오늘에 공부를 마쳐야지 내일 어찌 믿으랴 생각하고 애써 정진해야 합니다. 

日月似電光

光陰良可惜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세월이 번개처럼 빠르니,/ 시간을 어찌 아끼지 않을손가.//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리오.”

 

“무더위에 시원한 것 있느니…” 

보성스님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오늘 결제법문은 향운계 보살이 설해 마쳤습니다.

설해 마쳤습니다.

설해 마쳤습니다.

무엇이라 설하였습니까?

 

摩訶大法王

無短亦無長

本來非皂白

隨處現靑黃

“마하대법왕이여,/ 짧지도 길지도 않도다.// 본래 검지도 희지도 않건만,/ 곳에 따라 푸르고 누런색을 나타내도다.”

아시겠습니까? 올해 여름은 여름 그대로 덥습니다. 아무쪼록 애써서 더운 가운데에서 시원한 것을 얻어 가면 여름공부는 잘해 마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름 무더위에 시원한 것을 얻어 가십시오.

애써 정진 해주기를 바라며 오늘 법문을 마칩니다.

 

“철저한 반조가 공부의 시작”

원명스님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一切無非佛事 何須攝念坐禪

妄想本來空寂 不用斷除攀緣

“일체모든 것이 불사 아닌 게 없거늘/ 어찌 생각을 거두어 좌선만 하려하는가?// 망상이 본래 공하여 적적한 것이니/ 인연들을 애써 끊으려하지 말지어다.”

 

수행에 있어서 제일 우선은 직관의 지혜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월의 빠름이 폭포수 같다고 했는데 헛된 시간을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청안의 눈을 가진 이들이 일대사를 결판짓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반드시 결판내고 말겠다는 용맹심과 결단을 지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지어가는 이 공부는 나를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불사입니다. 지혜의 눈으로 보면 세상사 모든 일이 불법 아닌 게 없고 짓는 일마다 불사 아닌 게 없습니다. 온갖 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에서부터 공경 예배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말합니다. 참 불사는 형식의 틀에 구애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것이 중생에게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공부의 진정한 묘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불사가 되기 위해서는 현상을 꿰뚫어 보고 이치에 밝아야 합니다. 수월도량에 앉아서 공화만행을 닦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속에 비친 달빛 같은 도량과 허공 꽃 같이 집착없는 만행을 한다는 말입니다. 수행하기 좋은 특별한 장소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고요한 산속에서 부동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경계를 대함에 있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끊으려 하는 번뇌 망상도 그 근본이 본래 공하다는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번뇌가 보리요 무명 그대로가 실다운 성품이라고 역대조사가 누누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말에만 떨어져 있고 반조가 없으면 동쪽으로 가려하지만 서쪽을 향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철저한 반조가 이 집안 공부의 시작인만큼 이번 안거는 법계안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망상의 유혹에도 자기본심이 부동하고 매 순간마다 정념에 안주하는 안거를 말합니다. 높고 높은 산 정상에 우뚝 서 있는 것처럼 당당하고 깊고 깊은 바다 밑을 걸어가는 것처럼 세밀하게 사무치는 공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手把靑秧揷滿田 低頭便見水中天

心中淸淨方爲道 退步原來是向前

“벼 모종을 손에 움켜쥐고 모내기를 하노라면/ 고개를 숙일 적마다 물속에 하늘이 보이네.// 마음이 청정한 것을 도라 하나니/ 뒷걸음질 치지만 앞으로 나가는 이치같다 할까?”

[불교신문3204호/2016년5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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