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조실 월서스님, 하안거 결제법어

조계종 제5교구본사 법주사는 지난 21일 ‘불기 2460년 병신년 하안거 결제’를 맞아 하안거 결제법회를 봉행했다. 이 자리에서 법주사 조실 월서스님은 방부를 들인 안거대중을 향해 결제법어를 설했다.

다음은 법어 전문이다.

오늘이 夏安居 結制 날입니다. 이번 안거에는 照顧脚下 발 밑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尋春莫須向東去 심춘막수향동거
西園寒梅己破雪 서원한매기파설
봄을 찾아 동쪽으로 가지 말라.
서쪽 정원에 매화송이 눈 속에 피었구나.

身在海中休覓水 신재해중휴멱수
日行嶺上莫尋山 일행령상막심산
내 몸이 바다 속에 있는데 물을 찾아 무엇하며
석양이 재를 넘는데 산을 찾아 무엇하는가?

우리는 선원 현관에 들어서면 照顧脚下(조고각하)라는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이 팻말은 발밑을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 현관에서 발밑을 살펴보라는 것은 우선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고 출입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방에서 하는 말 한마디는 단순한 충고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말은 나중에 이런 훌륭한 가르침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떤 수행자가 각명 화상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발 밑을 잘 살펴 보아라(照顧脚下).” (禪) 근본 뜻을 묻는 질문에 ‘네 발 밑이나 잘 살펴보라’는 대답은 어떤 대답보다 훌륭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처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차나 한잔 마시고 가게(喫茶去)’라는 대답처럼 명답이라 할 것입니다.

불교 공부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격을 전인적으로 바꾸는 것이 불교 공부입니다. 그것은 입으로만 하는 이론 공부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공부입니다. 입으로 하는 공부는 조금만 어려운 경계를 만나면 금방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하는 공부는 어떤 경계를 만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어른들은 다른 일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자기 발밑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엉뚱한 일에 한 눈 팔다가는 남의 소를 헤아리는 것처럼 아무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할 일은 남의 일이나 바깥일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나의 일 내면의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조고각하란 바로 너 자신을 알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현실 생활에서 모든 재난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를 외면하고 겉으로만 잘난 척 하다가는 금방 들통이 나고 맙니다. 그래서 불교 공부는 내외 명철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內外明徹 如淨瑠璃內含寶月 내외명철 여정류리내함보월

智는 白日과 같고 慧는 朗月과 같아서 智慧는 항상 明朗하지마는 外部는 塵境에 住著하여 妄想의 浮雲盖覆함이 되어서 明朗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如何히 大悟하고 知見이 高明한 것 같아도 實地境界에 있어서 熟眠時에 如前히 暗黑하면 이는 妄識의 變動이요. 實梧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寤寐一如의 境地에도 도달하지 못하고서 頓悟見性이라고 自負한다면 自誤誤人의 大罪過이며 修道過程에 있어서 可恐할 病痛이라고 했습니다.
公案을 타파하여 自性을 徹見하면 三身四智를 圓滿證得하고 全機大用이 일時에 現前하고 殺活自在하고 縱橫無盡한 妙法中妙法인 것입니다.

初發心是便正覺 초발심시편정각
最後自喩富初心 최후자유부초심
처음 발심하는 순간이 궁극적 깨달음이니
가장 뒤에도 그 초심과 부합됨을 절로 알리라.

看看萬法 간간만법 只此中 지차중
看取通萬法 간취통만법
온갖 법들을 살피고 또 살펴라.
바로 이것들 속에서 살핀다면 온갖 법들과 통하리라.

話頭를 들고 工夫하는 이여 話頭에 쉴새없이 매달려라. 話頭를 들면 산사람이요. 話頭를 놓치면 죽은 사람이다. 工夫하는 이의 생명은 이와 같다. 話頭를 깨치지 못하면 마음에 눈이 봉사다. 話頭를 지어가는 方法을 제시했는데 너무 空空寂寂만하면 無記와 睡魔에 떨어지기 쉬운 것이며 너무 惺惺만하면 煩惱와 妄想에 떨어지기가 쉬운 것이다. 惺惺寂寂하게해서 寂寂中에는 無記와 睡魔 惺惺中에는 煩惱와 妄想을 없게하여 惺惺寂寂하게 疑去疑來함이 眞實한 話頭法이니라.

茶 마시고 밥 먹는 것이 무슨 물건이냐?
누구든 이 물건을 알면 곧 부처이다.

疑着話頭 如咬生鐵 生死於是 是無生死 의착화두 여교생철 생사어시 시무생사

허운스님은 근 현대사에 가장 존경받았던 고승입니다. 부유한 가문에 태어나서 발심 출가할 당시 19세였습니다. 근대 중국의 격변기 속에서도 계율을 정립하고 사찰을 복원하는 등 120세에 입적하실 때까지 불교를 전하는 불사를 위해 헌신하신 분이셨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禪修行에 관한

參禪의 先決條件 歇卽菩提 攀緣萬緣放下一念不生

이구절의 말과 같이 결과에 이르지 못하면 참선은 말뿐이고 성공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참선의 目的은 마음을 밝히고 性品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의 汚染을 除去하고 自己性品의 참모습을 실답게 보는 것입니다. 汚染이라는 것은 妄想과 執著이며 自性은 바로 如來知慧德相이다. 다만 여러분과 나는 無量劫이래로 未혹되어 生死輪回의 바다에 빠져서 汚染된지 오래입니다. 단박에 망상을 벗어나 참된 본 성품을 볼 수가 없으며 그런 까닭에 참선이 필요한 것입니다. 參禪의 先決條件은 妄想을 없애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망상을 제거할 수 있을까?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은 수도 없이 많지만
歇卽菩提 쉬는 것만큼 간단한 것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온갖 인연에 생각 망상이 죽 끊듯 한다면 참선한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주혜해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스님은 도를 닦을 공력을 들이십니까?
그렇지
그럼 어떻게 공덕을 드리십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지
그거야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나는 밥 먹을 때 밥만 먹고 잠 잘 때는 잠만 잔다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밥 먹을 때 욕심을 먹고 잠잘 때 꿈 속에서까지 온갖 생각을 일으킨다네.

우리가 평상시에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옳고 그르다는 분별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느 쪽으로 향한다는 것은 시비나 선악의 분별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시비나 선악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옳다고 해도 상대가 그르다고 한다면 시비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比如暗中寶 비여암중보
無燈不可見 무등불가견
佛法無人說 불법무인설
雖慧莫能了 수혜막능료

어둠 속에 보배는 등불이 없으면 볼 수가 없고 불법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찌 능히 알 수가 있겠는가?

絶學無爲閑道人 절학무위한도인
不除妄想不求眞 부제망상불구진
無明實性卽佛性 무명실성즉불성
幻化空身卽法身 환화공신즉법신

배울 것도 없고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제거하지도 않고 참 마음을 구하지도 않는다.
무명의 본성이 곧 불성이며
환화의 헛된 몸이 곧 법신이로다.

法身覺了無一物 법신각료무일물
本源自性天眞佛 본원자성천진불

법신을 깨닫고 보니 아무것도 따로 없고
내 자성이 오직 부처다.

배운다는 것도 공부한다는 것도 진실한 뜻에 볼 때 모두가 망상이다. 정진해도 정진의 정진의 相이 없는 그것이야말로 無爲한 閑道人

只把一枝無孔笛 지파일지무공적
爲君吹起太平歌 위군취기태평가

한 가닥 구멍 없는 퉁소를 가지고
그대를 위해 태평가를 부르리라.

禪家에서는 無孔笛니 無底船이니 木馬石人이니 劫外春이니 하는 말들을 많이 쓰고 있고 있지만 세속적으로 볼 때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구멍 없는 퉁소, 밑 없는 배, 돌사람 세월 밖의 봄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존재들이며 格外의 名詞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합법화하고 호말의 과장과 거짓이 없다는 것은 오직 불교뿐이며 진여세계 분이라는데 묘미가 있고 멋이 있다는 것입니다.

地獄天堂俱淨土 지옥천당구정토
虎穴魔宮總蓮邦 호혈마궁총연방
山下不碍家鄕路 산하불애가향로
塵塵刹刹自在遊 진진찰찰자재유

지옥천당이 모두 정토요,
호랑이굴 마구니 집이 다 극락이면
산과 물이 고향길을 막지 못하니
티끌세계 그대로가 자유스런 처소이다.

범부의 눈에는 분명히 지옥도 있고 천당도 있으며 호랑이굴과 마군이 집도 있겠지만 깨달은 경지에 어찌 지옥천당이 있을 수 있으며 마궁과 호혈이 구애될 수 있겠는가?
是와 非가 떨어지고 선과 악이 없는 자리 衆生諸佛이 둘이 아니며 美醜長短이 둘이 아닌 一理齊平 한자리, 塵垢가 다한 淸淨한 고향일 것입니다.

雲開月色家家白 운개월색가가백
春過山河處處紅 춘과산하처처홍
구름이 걷히니 집집마다 달빛이요.
봄 지낸 산봉우리 곳곳마다 꽃일레라.

父母恩重終有別 부모은중종유별
妻子義深也分離 처자의심야분리
人情似鳥同林宿 인정사조동림숙
大限來時各自飛 대한래시각자비
부모의 은혜가 크다지만 필경은 이별할 날이 있고
처자의 정이 깊다지만 결국은 흩어지네.
인정이란 마치 새떼가 모여 자는 것과 같아
날이 새면 각자가 제갈 길을 가네.

부모니 처자니 하는 것이 영원의 생명을 얻지 않고서는 이 무사의 수레바퀴를 면할 길이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春色無高下 춘색무고하
花枝自長短 화지자장단
봄빛은 높고 낮음이 없는데
꽃가지는 제멋대로 길기도하고 짧기도 하다.

虛空境界豈思量 허공경계기사량
大道淸幽理便長 대도청유리변장
但得五湖風月在 단득오호풍월재
春來依舊百花香 춘래의구백화향
허공결계를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큰 도는 깊고 맑아 이치 또한 깊나니
오호 풍월은 알기만 하면
봄이 올 때 여전히 꽃향기가 가득하여라.

허공경계란 우리들의 심성을 비유한 말입니다. 우리들의 심성 곧 불성이란 조화난측하고 불가사의하여 범부의 사량분별로서는 도저히 측량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로란 깊고 맑아 이치 또한 길어서 언설이 못한 것입니다.

오호 풍월은 다시 말해 반야, 지혜, 우주본성원리를 깨치기만 하면 격외 봄은 항상 푸르기만 하고 백화의 향기는 영원히 가득할 것이란 뜻입니다.

이번 병신년 하안거에는 반야지혜, 오호 풍월인 우주본성을 깨달으려면 오직 여기는 大憤心, 大怖苦, 大勇猛, 大精進 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같은 결심으로 모인 결제대중 여러분은 일치된 한마음 한뜻으로 험하고도 무서운 이 관문을 돌파하여 해제되는 날 첫 새벽에 모두 함께 성불의 법좌에 빠짐없이 오르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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