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탄허택성

 

 

①스님과 재가자는 물론 일반인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알린 탄허스님이 강의하는 모습. ②출가 이전에 한학을 깊이 연찬한 탄허스님의 20세 무렵. ③탄허스님의 친필. ‘월정대가람’이라고 쓰여 있다.

내외전, 유학 도교까지 ‘섭렵’

학승이며 선승, 대석학 ‘존경’

한문 경전 한글 번역에 ‘헌신’

 

 

○… 1956년 4월1일.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아 사회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불교계 역시 1954년부터 본격화된 정화운동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몰아치는 상황이었다. 이때 탄허스님은 월정사에 ‘오대산 수도원’의 문을 열었다. 불교와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했다. 전통강원 대교과를 마쳤거나 세간의 대학을 졸업한 이들을 대상으로 했다. 유가의 사서(四書)를 수료한 이들도 받아들였다. 승속(僧俗)은 제한하지 않았다. 강의는 탄허스님이 전담했고, 때로는 문인들을 초청해 특강을 했다. 수도원 운영에 필요한 재원은 건봉사 주지 청우스님이 마련했다. 하지만 ‘교육결사(敎育結社)’로 평가받는 오대산 수도원은 재정난과 불교정화의 와중에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탄허스님은 1959년 남은 제자들과 삼척 영은사로 옮겨 ‘영은사 수도원’을 개원했다. 이 수도원은 1962년까지 이어졌다.

 

○… “법당 100채 짓는 것 보다 스님들 공부 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1966년 화성 용주사에서 열린 동국역경원 역장(譯場, 번역 장소) 개원식에서 탄허스님이 한 말이다. 번듯한 건물 보다는 사람이 결국 일을 한다는 뜻으로 인재 양성에 대한 탄허스님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탄허스님은 “좋은 인재들이 많이 나와야 나라도 좋아지고 세상도 좋아진다”면서 “나라 전체와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을 길러내는 데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출가자의 공부만 주장하지 않았다. 재가에게도 벽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밥 짓고 반찬 만드는 공양주 보살이나 허드렛 일을 도맡아 하는 사찰의 부목 거사도 강의를 듣게 했다. 끼니마다 공양을 준비해야 하는 공양주 처지를 고려해 아침에 점심 준비까지 같이 하게 했다. 대신 점심공양은 찬밥으로 대신했다.

 

○… 탄허스님이 주석할 무렵 오대산 월정사에는 여름방학이면 대학생 수련회가 많았다.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유불선 삼도와 동서양사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스님의 명강의는 학생들을 새로운 세계로 안내했다. 함께 온 지도교수들도 꼬박꼬박 강의를 들었다. 신학문에 관심이 깊은 탄허스님도 교수들의 강의를 빼놓지 않고 청취했다. “학문의 세계의 끝이 없다”는 학해무변(學海無邊)을 강조하며 “배움에 있어 나이가 많고 적음을 가려서는 안 된다”고 스님은 강조했다.

 

○… 탄허스님의 이야기할 때 은사 한암스님을 빼놓을 수는 없다. 출가 전 탄허스님은 3년간 한암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교류했으며, 두 스님이 주고받은 서한은 20여 통에 이른다. 탄허스님은 생전에 동양사상을 특강하며 출가 동기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20대부터 노장사상을 파고들다 선생님이 없었다. 선생을 구하다 방한암 스님이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했다. 참으로 도반이 넓은 것 같아 3년간 굉장히 연애가 깊어져 따라와서 중이 됐다.” 한암스님의 깊은 식견과 수행자의 위의는 물론 넓은 인품에 매료된 것은 아닐까 싶다.

은사는 제자의 머리를 삭발하면서 삼킬 탄(呑), 빌 허(虛)라는 법명을 주었다. 한문의 뜻 그대로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암스님은 탄허스님에게 “지식이 있는 자는 경전을 배워 중생에게 이익을 주도록 해야 세상의 업보를 갚는 것”이라고 했다.

 

○… “요즘 젊은이들은 한글세대가 돼 놔서 승려에 뜻을 두고 입산(入山)한 청소년의 대부분이 어려운 한문 경전을 익히자면 큰 애를 먹지요.” 한학에 밝고, 깊은 식견이 있었지만 탄허스님은 한문을 고집하지 않았다. 1974년 대교과 교재인 <화엄경>을 번역한데 이어, 사미과 사집과 사교과 등에서 배우는 <계초심학입문(戒初心學入門)> 등을 한글로 옮겨 1981년 6월 완성했다. 이때 스님은 <동아일보>와의 대담에서 “현재 승속 간에는 내 경전 이해를 전해줄만한 전수자를 찾지 못해 우리말 번역을 생각하게 됐다”면서 “약 100년쯤 지나 내가 지금 번역한 내전(內典)을 읽고 나를 이해해 줄 창제자가 나선다면 큰 다행”이라고 했다. 이 대담에서 스님은 “이젠 자꾸 나이(법납 47년)가 연상돼 몇 가지 번역만 3년 내로 끝내고 승려생활 50주년을 기념도 할겸 출판기념회나 가져볼까 한다”고 밝혔다. 이때가 1981년 6월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로부터 2년 뒤 스님은 열반에 들었다.

 

○… 스님은 남다른 예지력으로 세인을 놀라게 했다. 한국전쟁, 10·26 사태,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 삼척 무장간첩 침투, 일본대재앙 등을 예견했다. 스님의 예언은 운명으로 받아 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잘 대비하여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강원도 지역 군부대에서 지휘관으로 근무할 당시 탄허스님과 인연이 닿았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월정사를 방문한 그는 “군부대에 있으면서 스님을 찾아뵐 때마다 북방과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며 “대통령이 된 뒤에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회고했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 이후 러시아와 중국 등 북방외교를 시작해 한국 외교사의 지평을 확대했다.

 

○… 1977년 11월11일 오후9시15분, 전북 이리시(현 익산시)의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대형 열차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한국화약(현 한화)의 제1605호 화물열차가 인천을 떠나 광주로 가는 도중 이리역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일어난 사건이다.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40t이 폭발해 역 주변 500m 이내의 건물 9500여 채가 파괴되고, 사망자 59명, 부상자 1343명이 발생한 대형참사였다. 이재민도 9973명이 발생했다.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한 스님은 ‘이리역 재난 이재민 돕기 서예전’을 개최해 수익금 전액을 희사하며 자비행을 실천했다.

 

○… 탄허스님 전강제자인 무비스님(전 조계종 교육원장)은 “큰스님께서는 불자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엄청난 본보기를 보여주셨다”면서 “승려교육에 필요한 교재의 번역을 담당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관심이 컸다”고 회고했다. 무비스님은 “<화엄경>을 통해 ‘만유(萬有)가 곧 부처님’임을 나타낸 ‘만유개불(萬有皆佛)’의 가르침을 전했다”면서 “대사회적인 문제나 국가의 운명 등에 대해서도 고견을 밝혔다”고 말했다. 서울 금강선원장 혜거스님은 “은사 스님이 일생을 <화엄경> 갖고 공부하셨다”면서 “기일에 맞춰 <화엄경> ‘세주묘엄품’을 봉정하고, 전국 강원에 보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탄허스님 발자취

 

1913년 음력 1월15일. 전북 김제 출생. 속명은 김택(金鐸). 법명 택성(宅成 또는 鐸聲). 법호는 탄허(呑虛). 어려서 10여 년간 부친과 조부에게 유학 공부. 17세 기호학파 이극종(李克宗) 선생에게 경서(經書)를 배움. 20세 즈음 ‘도(道)란 무엇인가?’에 관심 갖고, 한암(漢岩)스님에게 서신 보냄, 1934년 음력 9월 5일. 오대산 상원사 입산. 한암스님을 은사로 구족계 받고 3년간 묵언 수행. 1936~39년 강원도 3본산이 상원사에 설치한 승려연합수련소에서 강의.

은사 한암스님 모시고 15년 동안 선원에서 좌선. 1955년 조계종 강원도 종무원장 겸 월정사 조실 추대. 1956년 4월 오대산 수도원 개원. 1962년 월정사 주지, 1965년 동국대 대학선원장, 1966년 동국역경원 초대 원장, 1975년 동국학원 이사 역임. 스승 유촉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 원고 1967년 마무리. 공로 인정받아 1975년 제3회 인촌문화상과 조계종 종정상 수상. 말년까지 매일 원고 집필. 1983년 음력 4월 24일(양력 6월 5일) 월정사 방산굴에서 ‘일체무언’ 임종게 남기고 원적. 세수 71세, 법랍 49세. 6월22일 정부에서 은관문화훈장 추서. 완간 저서 내외전 합쳐 16종 75권.

상좌는 보경, 만화, 시은, 소요, 수중, 인보, 현수, 혜거, 각수, 삼지, 삼보, 현장, 현각, 포일, 난승, 부동, 명주, 환원, 정광, 삼락, 삼혜 스님이 있다. 전강제자로 각성, 통광, 무비스님 등이 있다.

 

■ 탄허스님 어록

 

우주가 한 법계(法界)라면 법계는 우주의 핵심이다. 법계가 우주의 핵심(核心)이라면 우주는 법계의 영상(影像)이다. … 이 경(經)은 제불(諸佛) 중생의 평등한 불성(佛性)과 본진(本眞)한 덕용(德用)을 바로 보인 것이다.

- <신화엄경합론역해>의 서(序)

 

도덕정치가 바로 민주주의의 근본이다.

- 1983년 6월 <경향신문>

 

우리 선조가 적선해온 덕으로 우리 한국은 필경 복을 받게 된다. 세계의 멸망이냐, 구원이냐 하는 무서운 화탕(불구덩이) 속에서 인류를 구출해 낼 수 있는 방안을 가지고 있는 이는 한국인 이외는 또 다시 없기 때문이다.

- 탄허스님 법어집 <부처님이 계신다면>

 

불경(佛經)속에 이미 현대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해답들이 있다.

- 1975년 10월 <동아일보> 인터뷰

 

상생(相生) 속에 상극(相剋)이 있고, 상극 속에 상생이 있다.

- 1980년 김지견 박사와 <경향신문> 대담에서

[불교신문3203호/2016년5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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