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봉암사 수좌 적명스님

일체세간은 마음이 만든 심상
부처가 세상 만들어낸 것처럼
중생도 세상 창조주이자 주인
마음과 부처 중생 다르지 않아
중생심이 불심, 불심이 중생심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다면
얼굴이나 몸매 앞세우기보다
정신적인 美로 세상 대처해야
아름다움은 욕망 절제서 나와
수행으로 스스로 컨트롤하길

문경 봉암사 수좌 적명스님이 봉암사를 찾은 대중들을 위해 특별히 법상에 올랐다. 지난 4월30일 ‘마가스님과 함께하는 53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선재동자의 명상여행’ 14번째 법회에 참석한 600여 명의 불자들을 위해 마음에 관한 법을 설했다. 스님은 “나와 부처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달으면 깨달았다고 하는데 이는 초보적인 깨달음”이라며 “이 세상 모든 것, 예컨대 앉아 있는 법당, 봉암사, 너와 나 모든 것이 내 자신이고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깊이 있는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봉암사에는 많이 살 때는 100여 명 정도 지내면서 참선에 정진한다. 추구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마음에 관한 것이다. 참선해서 바로 보고 자세히 보고 깨닫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을 참구하는 선(禪)도량에 오신 여러분들을 위해서, 마음에 대한 얘기를 해드리겠다.

마음에 관한 얘기에 앞서 마음의 종류에 대해 살펴보겠다. 마음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동심(動心)이고, 다른 하나는 부동심(不動心), 나머지는 전변심(轉變心)이다. 움직이는 마음은 바로 우리 마음이다.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능히 짐작되듯 부처님 마음이다.

동심과 부동심은 공기와 바람에 비유할 수 있다. 문 닫힌 방안에 앉아 있으면 우리는 바람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움직이기 시작하면 대번 느낀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날리고,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태풍이 몰아칠 때 먼지가 오르고, 낙엽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야! 저 바람 봐라” 하고 말한다. 바람이 느껴지고, 눈으로 보는 것 같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 알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 있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 우리만 모르는 게 아니라 부처님도 모른다고 한다. 부처님도 모르시는 게 없지만 오직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다.

선문에서는 유명한 게송이 있다. ‘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석가유미회 가섭기능전(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옛 부처가 나기도 전부터 응연히 한 상이 뚜렷했더라. 석가모니도 몰랐거니 가섭이 어떻게 전승했겠는가”라는 뜻이다. 옛 부처가 나기도 전은 부처를 보는 마음이고, 마음이 이 세계를 만들어냈다고 하기 때문에, 옛 부처가 나타나기도 전은 이 세상이 존재하기도 전이란 의미한다. 뚜렷한 한 상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알지 못했는데, 가섭존자가 어떻게 전수했을까 하는 말이다.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부처님도 몰랐다는 얘기가 있다.

세 번째 전변심에서 전은 구르다는 것이고, 변은 변화했다는 뜻으로, 어떤 물건이 제자리에 있지 않고 모양도 달라지는 게 전변이다. 물로 예를 들어보겠다. 물은 여러 형태가 있다. 그릇에 담긴 물도 있고, 호수, 강물, 바다도 있다. 형태만 여러 가지가 아니라 자기 모습도 변화시킨다. 겨울에 펄펄 내리면 눈이고, 얼음도 물이고, 구름도 물이라고 한다.

주전자에서 끓어 오르면 수증기가 된다. 수증기가 되면 기체의 일부로 간주된다. 수증기는 공기량의 1000분의 1가량이다. 법당의 1000분의 1가량은 수증기라는 물로 채워져 있다. 공기니까 안 보이는 것이다. 기체, 고체, 액체로 모양을 바꾼다. 모양을 바꾸면 물이라고 안한다. 얼음을 보고 물이라 하지 않고 눈을 보고 물이라 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름도, 모양도, 형태도 달라지는 게 물이다.

마음이 자기 모습을 완전히 바꿔서 다르게 나타내는 것을 전변심이라고 한다. 전변심은 무엇인가. 법당에서 탁자 위에 올린 거룩한 부처님을 본다. 그 부처님이 우리들의 전변심이다.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심상이란 뜻이다. 법당도 여러분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고, 봉암사도, 희양산도 마찬가지다. 하늘과 땅과 온 대지는 여러분의 전변심이 구현해낸 것이다.

<화엄경>에 보면 “마음은 화가와 같아 가지가지 오온을 그려내나니 일체 세간 가운데 만들어내지 않은 것 아무것도 없다”는 구절이 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우리 정신과 물질을 오온이라고 말한다. 옛날에 세상을 단순화 시켜 말할 때 형상 있는 것을 통틀어 정신, 물질적으로 나눴다. 이걸 불교식으로 세분화하면 오온이 된다.

이 세상에 있는 물질적인 것 그것이 산이든지 바다든지 허공이라도 모두 마음이 만들었다. 우리가 좋아하고 기뻐하는 감정, 갖가지 마음들을 다 근본적으로는 마음이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걸 구분하려고, 근본적인 마음을 진여심 혹은 본심이라고 말한다. 만들어진 마음을 그냥 마음이라고 하고 망령, 망심이라고 한다.

<화엄경>에 보면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우리 마음과 이 세계 모두를 마음이 만들어, 일체 세간 가운데 마음이 만들어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더 나가서 여심불역이(如心佛亦爾)라고 했다. 부처님보다 마음을 먼저 내세워서 마음이 그러하듯이, 마음이 세계를 만들어낸 것처럼 부처도 마찬가지다. 부처가 이 세상을 창조해낸 것처럼 중생 또한 그렇다. 중생도 이 세상 창조주고 주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과 부처 중생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게 <화엄경> 중심 법문이다.

그러니까 중생심이 바로 불심이고 불심이 중생심이다. 이 말은 곧 흔들리는 우리 마음이 흔들림 없는 부처님 마음이고, 흔들림 없는 부처마음이 흔들리면 중생마음이다. 그러니 나와 부처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깨달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을 깨닫는 것은 초보적인 깨달음이다.

깊이 있는 깨달음은 이 세상 모든 것, 예컨대 앉아 있는 법당, 봉암사, 너와 나 모든 것이 내 자신이고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내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깊은 깨달음이라고 한다. 참선해서 마음에 대해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여러분도 봉암사에 왔으니 이 기회를 빌려 참선하고 도 닦는데 마음을 내 보길 부탁드린다.

오늘 만난 인연으로 제가 30대 초반 쯤 겪었던 일을 들려주고자 한다, 출가 사찰이 나주 다보사인데, 거기에 은사 우화스님이 계셨다. 초파일이면 찾아가서 일을 봐드리고 나왔는데, 일을 다해 마쳤다 싶어 걸망지고 인사하고 나왔다. 젊을 때라 그런지 그날 따라 싱숭생숭해서 오늘은 땅만 보고 걷자고 생각했다. 발끝만 쳐다보고 목적지 없이 가자고 했다. 점심 먹고 나와 결심한대로 발끝만 보고 걸었다. 가다가다 해가 저물어서 더는 계속 갈 수 없어 잘 곳을 찾았다. 행인에게 이 근처 절이 없나 물었더니 산길을 따라 가라고 하더라.

전에도 본 적 없고, 지금까지도 그런 절을 못 봤다. 누각이 45도 정도 기울었다. 넘어지지 말라고 통나무를 받쳐놓아 위태로웠다. 누각 지나서 마당에 들어서니 법당이 있었다. 법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우다다닥 소리가 나더라. 쥐들이었다. 법당 문이 뚫려서 쥐가 마음대로 들락날락했다. 나한전으로 갔는데, 성한 나한이 하나도 없었다. 팔이 부러지거나 다리가 부러지고, 옻칠이 벗겨져서 새카맣더라.

요사채에 가서 주인을 찾았더니 노장 한 분이 나오는데 대처승이었다. “스님 객이 하룻저녁 쉬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절인데 중이 못 쉬어”하고 답을 하기에 따라 들어갔다. 보살님이 저녁을 해줘서 먹었더니, 노장이 채 익지 않은 보리를 베어 왔다. 그 이삭으로 아침밥을 짓는 것이다. 문득 노장이 “우리 집은 묘를 잘못 썼는가. 내가 어려서 아버지 따라 절에 들어왔는데, 아들이 고등학교로 광주를 보냈더니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다” 하더라. 3대가 출가해 스님이 된 사실을 알았다.

아침이 돼 나가려고 하니 보살님이 나와 “스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고 좁은 산길을 쫓아내려갔다. “보살님이 차비를 챙겨주라고 저렇게 쫓아 나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절집에 차비를 챙겨주는 게 미덕이었다. 먹을 것도 없는 집에서 염치없이 차비를 어찌 얻어갈 수 있겠나. 보살이 그러거나 말거나 옆에 찻길로 걸망을 지고 내려갔다. 그랬더니 보살이 지름길로 쫓아 내려왔다. 나는 떨어트리려고 걸음을 더 빨리 하고 내려왔는데, 보살님이 단념을 하지 않더라. 지름길로 쫓아와 모퉁이마다 나타나 나를 불렀다. 결국 내가 항복하고 다시 돌아갔다.

보살님은 봉투를 하나 전해주면서, “제가 이렇게 기를 쓰고 쫓아온 것은 부탁드릴게 있어서”라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엇이냐 물었더니, 그렁그렁한 눈으로 “우리 스님이 집을 나간 지 3년이 됐는데, 어느 절에 어느 스님 상좌가 됐고 법명은 무엇이다” 하며 “다니시다가 우리 스님 만나면 말씀 좀 전해 달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대뜸 “보살님 걱정하지 마세요. 그 스님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집에 가서 어머니 한 번 뵙고 가라고 전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보살이 울면서 “그게 아니고요, 우리 스님 만나면 절대 집에 오면 안 된다고, 이 어미를 보고 싶어 하면 안 된다고 전해주세요. 오직 부처님 길만 가달라고, 엄마가 그렇게 부탁하더라고 전해주세요.”

그 말에 내가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 이후에도, 그 이전에도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여기도 제법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은데, 여러분 나이대면 얼굴이나 몸매로 승부하면 안 된다. 여러분 무기는 정신적인 아름다움이다. 정신적인 아름다움으로 세상 삶을 대처할 생각을 해야 한다. 정신적인 아름다움은 자기 욕망 절제하는데서 나온다. 수행은 자기 마음을 컨트롤해서 자기 손아래 두는 것이다.

40~50년이 지나도 아들이 보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누르고 부처님 길을 가라고 당부하며 울고 서있는 보살의 모습이 거룩하게 느껴진다. 얼굴 아름다운 것은 잠깐이지만, 정신적인 아름다움은 영원하다는 것을 잊지 않길 바란다.

[불교신문3203호/2016년5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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