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머무신 8개 도시 <18> - 마가다 왕국의 수도, 라자가하⑥

그 누구보다 총명했던

아자타삿투 왕은

아버지를 죽인 죄업이 깊어

법문을 들어도 깨달음을 얻는

기쁨을 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부처님을 뵙고 난 후

그를 괴롭혔던 불면증과

두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전륜성왕이라 칭송받던 빔비사라 왕이 지하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비구들과 함께 라자가하 부근의 기사굴산에서 안거를 보내고 계셨다. 당시 아자타삿투는 아버지를 죽인 왕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빔비사라 왕의 목숨을 단칼에 끊어놓는 대신 그를 서서히 굶어죽게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엄중한 감시를 피해 밀가루와 꿀반죽을 몸에 바른 채 감옥을 찾은 베데히 왕비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빔비사라 왕은 삶을 조금 연장할 수 있었다.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이 계신 기사굴산이 있는 방향을 향해 예배를 올리며 법문을 들려주시길 간절히 청했고 그의 마음을 훤히 보신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이 뛰어난 마하 목건련 존자와 부루나 존자를 그에게 보내주었다.

부왕을 잔인하게 고문한 아자타삿투

마하 목건련과 부루나 존자는 삼엄한 궁중의 경비를 가뿐히 통과하였고 날마다 빔비사라 왕을 찾아가 계를 내리고 법문을 들려주었다. 시시각각 찾아오는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괴로워하던 빔비사라 왕은 법문을 들으며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평온을 맞을 수 있었다. 빔비사라 왕은 자신을 유폐한 아들 아자타삿투에 대한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품는 대신 그가 어린 왕자였을 시절, 가장 어여뻤던 모습만을 떠올리며 힘겨운 시간을 견뎌나갔다. 그렇게 21일이 흘렀다.

아자타삿투는 간수를 불러 빔비사라 왕이 살아있는지 물었다. 감옥에 유폐한 뒤 음식의 지급을 중단한 지 20여 일이 지났으니 빔비사라 왕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간수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간수가 말하길 빔비사라 왕은 베데히 왕비가 다녀가고 나면 기력을 회복한다고 했다. 그토록 감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데히 왕비가 여전히 몰래 음식을 가져다주고 있다는 소리였다. 아자타삿투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를 분노하게 한 것은 마하 목건련과 부루나 존자가 날마다 빔비사라 왕을 찾아와 법문을 해준다는 이야기였다. 어떤 방법으로도 그들이 지하 감옥에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간수의 말을 들은 아자타삿투의 눈에는 살기가 돌았다.

간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자타삿투는 즉시 베데히 왕비를 왕궁 깊숙한 곳에 가두었다. 다시는 빔비사라 왕을 만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왕궁에서 가장 예리한 칼을 잘 다루는 이발사를 불러 빔비사라 왕의 발바닥을 난도질하라고 명한 뒤 피로 범벅이 된 상처가 아물지 못하도록 소금을 뿌리라고 시켰다. 또한 빔비사라 왕이 다시는 걸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이미 참혹하게 두 발을 불로 지져버리기까지 하였다.

늘 활기찼던 라자가하의 거리가 고요해졌다. 행여 빔비사라 왕을 동정하는 말을 꺼냈다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고 자신들의 철학을 뽐내던 사상가들과 논사들도 숨을 죽였다. 새로 왕위에 오른 아자타삿투가 어떤 왕인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아버지 빔비사라 왕을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비극 앞에서 백성들은 말을 잃었다.

 

관무량수경 배경은 라자가하 비극

한편 베데히 왕비는 방에 갇힌 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아들의 폭주도, 남편의 죽음도 막을 힘이 없던 그녀는 기사굴산이 있는 방향을 향해 간절하게 예배를 올렸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마하 목건련 존자와 아난존자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을 날아 베데히 왕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처님을 뵌 베데히 왕비는 그 앞에 몸을 던진 채 피를 토하듯 울부짖으며 법문을 청했다.

언제나 우아함을 잃지 않았던 베데히 왕비의 초췌한 몰골에 아난존자는 마음이 아파왔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평정을 잃지 않으셨고 그녀를 위해 법문을 설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부처님의 미간은 금빛으로 환하게 빛났고 설법을 하실 때마다 입에서는 오색광명이 뿜어져 나왔다. 이날 베데히 왕비는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며 아미타 부처님이 상주하시는 극락정토의 장엄한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하였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친견하였다. 이에 그녀가 환희심을 느끼며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서원하자 부처님께서는 베데히 왕비가 극락왕생하게 될 것이라고 수기를 주셨다.

베데히 왕비가 안정을 되찾자 부처님은 홀연히 허공을 걸어 기사굴산으로 돌아가셨다. 부처님과 함께 돌아온 아난존자는 대중들과 비구들을 위해 자신이 보고 들은 법문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관무량수경>이다. 라자가하를 뒤흔든 빔비사라 왕과 베데히 왕비의 비극이 깨끗하고 청정한 불국토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준 아름다운 경전으로 승화된 것이다.

기사굴산에서 아난존자에 의해 <관무량수경>이 다시 한 번 설해지자 천신과 보살들이 기뻐하며 부처님께 예배를 올렸고 베데히 왕비는 슬픔과 고통을 잊고 청정한 마음을 되찾았다. 하지만 빔비사라 왕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겨진 두 발은 피고름으로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였고 차가운 감옥 바닥에 엎드린 채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자타삿투의 왕비가 아들을 낳았다. 흉흉함이 감돌던 왕궁에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궁녀들은 웃음을 터트리며 기뻐하였고 신하들은 왕에게 축하를 전했다. 연일 살벌한 소식으로 가득했던 라자가하에서 왕자의 탄생은 모처럼 찾아온 훈훈한 소식이었다. 자식은 부모가 되어봐야만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들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자타삿투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언제나 자신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아버지 빔비사라 왕의 다정한 얼굴이었다.

 

부왕의 죽음과 아자타삿투 왕의 참회

“아직 보지 못한 아들도 가슴이 뭉클하도록 사랑스럽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인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도 이런 마음이었단 말인가?”

왕자의 탄생이 아자타삿투의 마음을 바꿔놓은 것이다. 아자타삿투는 급히 신하를 보내 빔비사라 왕을 석방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아자타삿투 왕이 보낸 신하들이 지하 감옥으로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은 빔비사라 왕은 또 다른 혹독한 고문을 당할까 두려운 나머지 공포에 질려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빔비사라 왕의 죽음을 확인한 아자타삿투 왕은 그때서야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

기사굴산서 설해진 또 하나의 경전

빔비사라 왕이 세상을 떠난 뒤 아자타삿투는 후회와 번민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빔비사라 왕을 죽게 만든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 고통을 위로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업자득이었다. 갈 곳을 잃은 아자타삿투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베데히 왕비 앞이었다. 그는 베데히 왕비가 그랬던 것처럼 가슴을 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참회하며 통곡하는 아들을 보면서 베데히 왕비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자타삿투는 마침내 데바닷다가 아닌 부처님께 귀의한다.

“대왕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분, 부처님 밖에 안 계십니다.”

불면증과 두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위해 왕실 주치의 지바카는 목숨을 걸고 처방전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아자타삿투와 부처님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지바카의 망고나무 정원에 들어와서도 몇 번이나 망설이던 아자타삿투는 부처님을 뵌 후 부처님의 제자이자 교단의 보호자로 거듭났다. 아자타삿투는 누구보다 총명했으나 아버지를 죽인 죄업이 너무나 깊어 법문을 들어도 깨달음을 얻는 기쁨을 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부처님을 뵙고 난 후 그를 괴롭혔던 불면증과 두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 후 아자타삿투는 재위 기간 내내 부처님을 깍듯하게 섬겼고 나라 안팎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부처님께 조언을 구했다. 또한 교단에 공양을 올리고 법문을 듣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자타삿투 왕이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경전은 바로 <법화경>이다. 대승경전의 꽃이자 경전의 왕이라 불리는 <법화경>은 한 때 라자가하의 비극을 담은 경전, <관무량수경>이 탄생한 기사굴산에서 설해졌다. 아자타삿투가 저지른 비극을 상징했던 기사굴산이 최고의 경전으로 불리는 <법화경>이 설해진 배경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으니 이 또한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글 조민기

[불교신문3203호/2016년5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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