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 하면 나도 있고, 상대도 있고 또 상대를 대하는 대상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를 만나면 서로 인사하고 말을 주고받게 됩니다. 그 ‘말’은 내 마음에 품은 생각을 소리 내어 밝히는 것입니다. 입으로 나오는 소리를 귀로 들으면서 ‘아 이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더러 청산유수처럼 말을 하지만 상대가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뜻을 상대에게 잘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말없이 말하는 사람이고, 잘 듣는 사람은 듣지 않고도 듣는 사람입니다. 대부분 여기에 부합하지 못하니까 이러쿵저러쿵 말이 길어지는 것입니다.

불문(佛門)에 들어온 지 한 해 두해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삼사십년 된 사람도 있을 겁니다. 불문에 든 후 부처님 경전도 보고 선사들 법문도 듣고, 법당에서 예불도 드리고 여러 법석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스스로 돌아볼 때 이전보다 더 나아졌는지 살펴야 합니다. 불문에 들기 전과 든 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탐심과 진심을 냈다면 불문에 들어 온 후 그런 감정들이 사라졌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문에 들어와 교만 덩어리가 한 해 한 해 줄었는지 자조해 봄으로써 스스로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아야만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자기를 닦고 인품을 높이는 공부입니다. 가장 인품이 높은 분을 부처님이라 합니다. 여래는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하셨지만 가장 낮은 중생범부일지라도 항상 똑같이 대합니다. 부처와 범부가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범부들은 그런 사실을 모릅니다.

부처를 찾으려면 범부를 봐야 합니다. 내가 남보다 세력이 있거나 지식이 있다 해서 남을 업신여기지 않아야 하며,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굽실거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비록 자신이 가난하더라도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두려운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나아가다보면 결국은 미물과 곤충까지도 함부로 죽이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소와 돼지를 잡아먹는데, ‘잡아먹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심정을 살피지 못하고 그저 자기주장만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자기의 고집을 버리라 합니다. 그러면 벌레의 마음도 볼 수 있고 모든 고통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세계가 보입니다.

세계 속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 속에 본래도 있으므로 세계를 다 본다는 것은 본래를 보는 눈까지 열렸다는 말이 됩니다. 마치 기와집에 살든 초가집에 살든, 비단옷을 입든 누더기를 입든 그 안에 있는 내용이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십년 전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를 비교하면서 ‘내가 이렇게 나아졌구나.’를 알아차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때론 더 나빠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만이 높아지거나 교만심이 늘었을 수도 있습니다. 불교란 바로 자기를 닦으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을 정리하면 과연 무엇이 자기인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앉아있는 자기도 있고 몸속에 마음이라는 자기도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자기이므로 ‘나’의 무엇이 잘 되었는지 못 되었는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또 몸이 아프고 병이 생기거나 좋게 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원인과 결과를 보고 내 몸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교를 통해서 지금의 자신을 봐야 합니다. 바쁘게 쫓아다닐 때는 몸이 바른지 비뚤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동작을 멈추고 정좌해보면 한쪽 어깨가 비뚤어졌는지, 허리가 아픈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가 비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몸은 쉽게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은 마음은 봐야합니다. 몸은 눈으로 볼 수 있어서 바로잡을 수 있으나, 마음은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귀로 들을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지금 소리를 듣고 이러쿵저러쿵 생각을 합니다. 몸은 좌복에 앉아있으나 마음은 외부의 물건을 보고 소리를 듣습니다. 이 마음이 온전한 지 못한 지 한 번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미래에 무엇이 올지 걱정에 사로잡히지도 말고 현실로 지금 바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앞에 벽이 있으면 벽이 보일 것이오, 바람소리가 나면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벽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이상한 일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은 딴 생각에 사로잡혀 졸든지 혼탁해서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목탁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혹은 종소리를 듣고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똑같이 소리를 듣는데 왜 깨닫지 못합니까?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이냐를 알아야 합니다. 종소리를 들은 요놈을 찾는 것입니다. 종소리가 나지 않을 때는 요놈이 없습니까? 항상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를 놔두고 자기를 찾고 있더란 것입니다. 아무리 바깥으로 쫓아다니고 ‘도’다 ‘진리’다 해봐야 그런 것은 오지도 않고 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거두고 나면 깨닫는 것입니다. “왜 도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터득하지 못했느냐”고 고민하던 자신을 치우고 보면 바로 보이는 것입니다.

마음밖에 도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은 빼먹고 ‘진리’나 ‘도’를 찾았다면 마음을 확인하면 될 일입니다. 일상에서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알고, 물건을 보면 물건인줄을 아니까 거기에 대고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생각할 줄 아는 놈”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본래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성을 요달한다는 것은 나의 본래면목을 보는 것이요, 나의 주인공이라 것은 본래의 모습이라 합니다.
화가 나고 슬퍼하는 감정은 본래심이 아닙니다. 감정은 일어나면 사라지지만 본래심은 늘 있습니다. 그 자리는 부처님이든 중생이든 일체중생이 동일하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종소리를 듣고 깨달은 사람은 얘기합니다. “복잡한 생각으로 듣기 때문에 당신은 깨닫지 못했다.” 이 말은 종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거나 온갖 감정이 일어났지만, 이제는 그냥 종소리밖에 안 들리더란 것으로 거기서 나의 분별을 알아차렸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파도를 보고 “파도가 무엇이냐” 물으면 “물”이라고 답합니다. 파도는 물입니다. 파도의 본체는 물이고 본체가 움직이면 파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 때 공기는 ‘본체’고 공기의 흐름은 ‘작용’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생각을 하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이고, 깨닫는다는 것은 생각하고 있는 본체를 보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모든 동작을 쉬어버리면 파도가 잦아들어 물이 드러나듯이 본래의 모습이 확연해 집니다. 그러면 바깥에 종소리를 종소리인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체를 확인하지 못하더라도 작용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생기면 번뇌가 쌓이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만약 본체로 돌아가면 망상이 사라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 모습으로 남을 도우면 도와줬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은 바로 모습(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불교는 몸도 닦고 정신을 맑히라 합니다. 지식은 많으나 머리가 복잡하면 불교를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화엄경>이든 <법화경>이든 그것을 통해서 마음이 맑아져야지, 아는 것만 많아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면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담을 털어버리면 목전이 분명해 집니다. 그러면 상대와 내가 둘이 아니며, 세계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듯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작용과 자기가 둘이 아닌 것을 두고 일체삼매를 성취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정에 들 때 그냥 앉아 있은 것은 아닙니다. 바쁘던 것을 쉬고 자신을 조곤조곤 살핌으로써 몸과 마음이 명실공이 부동의 자세를 취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말입니다.
 
<금강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여래는 일반 사람과 다른 특수한 특징이 있느냐.”하고 수보리존자에게 물으니 수보리존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만일 누군가 여래에게 특별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보리존자에게 “과거 연등불처소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내가 그곳에서 도를 깨닫고 성취한 적이 있었느냐.”고 묻자 수보리존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그때 그곳에서 도를 깨닫고 얻었다고 한다면 연등불께서 석가모니 부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도를 얻고 깨친 바가 없었으니 내가 성불했다.” 하셨습니다. 자기를 알아차린 것을 얻었다고 이름 붙인 것이지, 실제로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임제록>에 선사가 대중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여 사대로 이뤄진 육체는 무상하다. 또 비위간담, 머리카락, 발톱, 손톱, 이빨 등도 물론 한때 잠시 존재한다. 너희들 가슴속에 오고가는 한 생각 한 생각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두고 보리수라하며 그것을 일러 깨달음이라 한다. 그렇지 못한 것은 무명수라 하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것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너희들이 만일 한 생각 한 생각에 실체가 없는 것을 알지 못하고 쓸데없는 생각에 이끌려 다닌다면 육도사생의 무명세계에 떨어지고 터럭 가죽을 입거나 뿔을 매다는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다.
 

너희들 모두 한 생각 쉬어버리면 그 자리 그대로 부처님의 청정한 국토다. 바로 그것이 깨달음으로 자유롭게 어떤 세계라도 들어갈 수 있고, 신통무애하게 뜻대로 중생을 제도할 수 있고, 어떤 괴로움이 올지라도 법희선열의 기쁨과 선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몸에 빛이 나서 저절로 비치는 것이니, 누더기 같은 옷을 입더라도 비단옷보다도 아름다우며 무엇을 먹더라도 백가지 맛을 갖춘 좋은 음식이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것과 마찬가지로 따라서 얻을 것도 없는 것이다. 너희들은 훌륭한 대장부가 아니냐. 그런데 무엇을 의심하느냐. 그놈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 요긴한 것이다. 이렇게 확인 되었다면, 이 세상 싫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은 만 가지 경계에 따라 변한다. 변하지 않는 그것이 본질인 것이다. 작용하는 데에 따라 근본을 맑히면 근심도 없다.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대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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