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으로 즐거움이 백년이라…

色身見如來 不是如來境

色身且不見 況乃身之影

藏珠於袖 鳴琴大地

不着一手 不說一字

佛心常樂百年間

中事業夢中山 呵呵

 

“색신으로 여래를 보는가? 여래의 경계가 아니며/ 색신 또한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몸의 그림자이겠는가?// 소매에 진주를 감추고 거문고 소리 대지를 울리는데/ 손을 하나도 쓰지 않고 한 글자도 설하지 않는다.// 부처님 믿는 마음 항상 즐거움이 백년이요/ 인간의 일은 꿈속에 산이다. 가가~”

1852년 초봄에 권돈인(權敦印, 1783~1859)이 도암우신(度庵宇伸, 1801~1823 활동) 선사를 위해 지은 영찬이다. 도우스님의 영찬은 진영이 아닌 나무에 새겨져 있다. 나무에 새겨진 영찬은 권돈인에게 받은 글씨 그대로이며, 소아(所雅), 돈인인(敦仁印), 이제(彛齋) 등의 권돈인의 인장(印章) 역시 찬문과 시작과 끝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도암스님은 설송연초의 후손으로 청담준일의 스승이자 성담의전의 옹사(翁師)이다. 18세기 후반 통도사에는 소요문중, 편양문중에서 분화된 여러 문중의 계파가 공존하고 있었다. 편양계 설송문중은 응암희유(凝庵希愈)스님이 배출한 경파경심(慶坡敬審)과 연파덕장(淵坡德藏)스님이 통도사에 일어난 각종 불사에 기문을 짓고 증사를 맡으면서 여러 문중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연파스님의 제자인 도우스님 역시 선교양종도총섭(禪敎兩宗都摠攝)의 승직을 맡아 활동하는 한편, 통도사의 신앙 중심처인 대법당과 사리각 중수(1809), 금강계단의 중수(1823)에 화주, 시주자로 참여하면서 산내암자인 백련암과 극락암을 비롯해 인근 지역의 천성산 대둔사와 김해 은하사의 불사에 참여해 설송문중의 위상을 높여갔다.

도암스님의 진영 제작은 스님이 입적하고 여러 해가 지나 손상좌인 성담스님 세대에 이르러 진행됐다. 진영이 제작되자 성담스님은 평소 사이가 돈독했던 권돈인에게 청해 영찬을 받았을 것이다. 이에 권돈인은 직접 뵙지 못했지만 공(空)사상에 근거해 진영의 존재 의미를 되물어 보며 손을 대지도 않고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매에 진주를 품고 거문고로 대지를 울렸던 도암스님의 도(道)를 찬한 글을 지었다.

[불교신문3202호/2016년5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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