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향봉향눌

“대중이 스승이니 대중과 정진하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서하지 않아

한학 등 내외전 겸비 참선수행도

<수양의 다화>에 실린 향봉스님 모습(사진 왼쪽)과 1951년 범어사 선원에서 입승 소임을 볼 당시의 향봉스님.

 

○… 향봉스님은 조그만 실수도 용서하지 않았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어야 했다. 그런 까닭에 스님을 시봉하는 시자 소임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른 회상에 있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었지만, 젊은 상좌들은 너무나 엄격한 스승을 어려워했다. 일화 하나. 연세가 들어 노쇠한 스승을 부축하여 방에서 출입할 때 미닫이문을 완전하게 닫지 못해 2~3cm의 빈틈이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두 마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시간이고 꿇어앉아 꾸중을 들어야 했다. 또 다른 일화. 스님은 보통 오후8시면 잠자리에 들었다. 해가 긴 여름에는 미처 어둠이 내리지 않는다. 그럴 때면 커튼으로 창을 가리고, 다음날 새벽이면 커튼을 올리는 것이 시자의 소임이다. 그런데 둘둘 말아 올린 커튼이 반듯하지 않고 조금만 옆으로 삐져 나오기라도 하면 꾸중을 감내해야 했다. 광주 무각사 주지 청학스님은 “사실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모든 일을 반듯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은사 스님의 가르침이었다”고 회고했다.

○… 향봉스님은 조카상좌인 법정스님에게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어느날 신도들이 불일암에서 늦은 시간까지 머물다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향봉스님은 법정스님에게 “신도들이 오면 해지기 전에 빨리 보내야 한다”고 경책했다고 한다. 자존감이 강한 법정스님이 마음이 상했을 수도 있다. 몇 개월간 왕래가 없었다. 결국 법정스님이 향봉스님을 찾아와 참회하면서 일단락 됐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취봉스님은 “향봉스님이나 되니까 법정스님에게 그런 꾸지람을 한거지”라고 했단다. 법정스님은 사숙인 향봉스님 열반 후 비문의 글을 지었다. 이 글에서 법정스님은 “선사께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철저한 수행승을 만들기 위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준엄한 훈계와 경책을 아끼지 않았다”면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그처럼 철저한 도제교육을 그 어디에서도 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 “소임을 맡게 되면 최소한 3개월은 기도를 해라.” 향봉스님이 상좌들에게 늘 당부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이다. 부처님에 대한 감사(感謝)와 참회(懺悔)가 출가사문의 본분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기도는 출가수행자가 제일 먼저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강조하면서 100일 기도나 1000일 기도를 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대중이 스승”이라면서 독살이를 하지 말고 대중과 함께 정진하며 수행하기를 권했다.

○… 노년에 조계총림 송광사로 돌아온 향봉스님. 방장 구산(九山)스님의 사숙(師叔)이었다. 구산스님 은사인 효봉(曉峰)스님과 향봉스님이 사형사제였으니 항렬이 위였다. 하지만 향봉스님은 구산스님을 ‘산중의 어른’인 방장으로 깍듯하게 대했다. 어느날 광주에 외출할 일이 생긴 시자가 향봉스님에게 인사를 했다. “큰스님, 오늘 광주에 다녀오겠습니다.” “방장 스님에게 말씀드렸느냐” “인사 드리지 못했습니다.” “네, 이놈. 산중의 어른이 방장 스님인데, 나한테 인사해야 되겠느냐. 얼른 방장 스님에게 가서 출타한다고 말씀드려라.” 시자는 향봉스님 말씀에 따라 방장 구산스님이 주석처로 가서 인사를 했다. “방장 스님, 오늘 광주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향봉 큰스님께 인사드렸느냐.” “방장 스님께 인사드리라고 합니다.” “네, 이놈, 어른은 향봉 큰스님인데, 왜 나한테 와서 인사하면 되느냐.” 사숙이었지만 방장을 위하고, 방장이었지만 사숙을 위한 향봉스님과 구산스님의 이 같은 일화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 운허스님은 <수양의 다화>에 향봉스님과의 인연을 기록했다. 운허스님은 “향봉 기숙(耆宿, 나이가 많아 덕망과 경험을 쌓은 이)과는 오래 전부터의 지구(知舊, 오래된 친구)였다”면서 “다십년(多十年) 선탑(禪榻, 참선할 때 앉는 의자)에서 정연(精硏, 자세하고 치밀하게 연구)한 온축(蘊蓄, 오래 연구하여 학문이나 지식을 쌓음)이 경(境)에 촉(觸)하고 연(緣)을 수(隨)하여 발로(發露, 드러냄)한 것이 어느 한마디 현언(玄言)이고 선화(禪話) 아닌 것이 없다”고 높이 평했다.

○… 향봉스님은 대한제국(조선)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와 인연이 깊었다. 망국(亡國)의 설움을 의연히 이겨낸 효황후는 깊은 신심을 지닌 불자로 향봉스님의 법문을 자주 청해 들었다. 1960년 향봉스님 제자들이 <수양의 다화>를 펴낼 때는 화주(化主) 명단에 수록되기도 했다. 1966년 2월 황후가 서거한 후 장례를 치르는 기간에 향봉스님은 상경하여 끝까지 빈소에 머물며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스님은 황후를 모시는 상궁들의 정신적 의지처였다. 특히 엄 상궁과 김 상궁은 스님이 입적할 때까지 왕래하며 가르침을 들었다. 서예에 일가견이 있었던 스님에게 두 상궁은 지필묵(紙筆墨)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시했다.

 

■ 상좌 청학스님이 말하는 향봉스님 

“가장 큰 선물은 혼자 살지 말라는 가르침” 

“제가 지금 이렇게 수행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은사 향봉스님을 비롯해 구산스님과 법정스님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의 예를 표합니다.” 향봉스님의 상좌로 오랜 기간 시봉한 광주 무각사 주지 청학스님은 “어른들의 가르침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라고 옛일을 돌아 보았다.

청학스님은 “은사 스님은 조그만 실수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면서 “그 때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돌이켜보면 출가수행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강릉 백운사에서 은사를 시봉하면서 너무 힘이 든 청학스님이 어느 날 밤 걸망을 꾸렸다. 은사 스님이 잠든 사이에 몰래 절을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하루 종일 시봉하고 사중(寺中)일을 하다 보니 걸망을 꾸리다 그만 그 위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새벽에 눈을 떠보니 등에 이불이 덮여 있었다. 성품은 불 같아도 절을 떠나려고 걸망을 싼 상좌를 야단 치기는 커녕 추울까봐 이불을 덮어주었던 것이다. 청학스님은 “은사 스님의 그 따뜻한 마음과 배려심에 서운한 감정이 눈 녹듯 녹아버렸다”고 회고했다.

“이제는 은사 스님의 가르침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다”고 밝힌 청학스님은 “지금은 세상도 바뀌고, 절집도 변화가 많다”면서 “그러나 은사 스님을 비롯한 어른 스님들의 가르침은 후학들에게는 여전히 등불과 같다”고 말했다.

청학스님은 “은사 스님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출가수행자로 살면서 혼자 살지 말라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자기를 속이지 않을 정도가 되면 혼자 살아도 되는데,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대중생활을 하면 게으름을 피우기도 어렵고, 수행자 본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경계하신 것이지요.”

청학스님은 “무심한 세월이 흐르다 보니, 어느새 옛날 어른 스님들의 나이에 도달했다”면서 “과연 그분들처럼 살고 있는지 자주 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진심으로 불법(佛法)에 의지해 수행자의 길을 반듯하게 걸은 은사 스님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나가는 것이 상좌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스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진실한 마음으로 수행하고 정진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향봉스님의 발자취 

1901년 5월16일 전남 보성 출생.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사서삼경을,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문을 공부했다. 출가 전에 ‘송운(松韻) 거사’로 불릴 정도로 신심이 돈독했다. 1940년 4월 송광사에서 석두(石頭)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1942년 3월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에게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금강산 마하연선원에서 3하안거를 , 덕숭산 수덕사 만공(滿空)스님 회상에서 2하안거를 마쳤다. 오대산 상원사 한암(漢岩)스님 회상에서 3년간 정진했다. 동래 금정선원, 도봉산 망월사, 충무 용화사 조실로 수좌들을 인도했다. 왜색불교 청산을 위한 정화불사에 동참했지만, 15일간 상주 남장사 주지와 몇 달간 중앙종회의원을 맡은 것 외에는 소임을 사양했다. 강릉 백운사에 20여 년간 주석했다. 1977년 30여년 만에 송광사로 돌아와 임경당(臨鏡堂)에 머물렀다. 1983년 4월19일(음력) 서울 법련사에서 열반했다. 세수 83세, 법납 44세.

청현(淸賢, 광주 무각사 회주)ㆍ청우(淸宇, 강릉 등명낙가사 주지)ㆍ철우(哲牛, 전 파계사 율주)ㆍ청전(淸典, 티베트서 수행)ㆍ청학(淸鶴, 광주 무각사 주지) 스님 등이 제자이다. <운수산고(雲水散稿)>와 <수양(修養)의 다화(茶話)>를 제자들이 펴냈다.

 

■ 향봉스님 어록 

선(禪)은 인간생활의 지남침(指南針)이오, 정신수양의 청량제(淸凉劑)이다.

- <수양의 다화>에서 

직지(直指), 참회(懺悔)의 두 문을 경유하지 않고는, 세상이 그릇되어 풍속이 매우 어지러운 이 시대에서는 항상 번민과 불안 속에서 살게 된다.

- <수양의 다화> ‘자서(自序)’에서 

스님이라면 누구나 계(戒)를 철저히 지켜야 돼. 계행(戒行)이 없으면 중이 아니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끝마치기 전엔 꾸준히 정진해야 돼. 

- 1967년 불교신문 ‘염화실 탐방’ 

만방(萬邦)의 일은 아침 새해로 바꿨으니, 숙겁(宿劫) 동정(同精)이 어찌 우연한 인연이랴, 풍운을 일소하니 강산이 깨끗하다, 비로소 금조(今朝) 안계 활연(豁然)을 깨닫는다.

- 1955년 원단(元旦) 소감 ‘정화시말(淨化始末)’ 

그 ‘고난’이 내가 걷고 있는 앞길을 마장(魔障)한다면 그것을 철석같은 마음 수련의 재료로 삼아 수양의 힘을 얻는 ‘이익’을 도모하는 게 좋다. - 1960년 부산 금강원 소요대에서

[불교신문3201호/2016년5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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