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야구 시구 처음한 ‘조계사 마당’

1917년 보성고 앨범에 실린 최초의 야구 시구 사진(사진 왼쪽)과 지금의 서울 조계사.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은 프로야구.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올해 관중 800만 명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한국야구의 기원은 1904년으로 보고 있다. 초창기 야구 자료가 드문 가운데 1920년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이 최초의 시구(始球)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지금의 조계사 마당에서 한국 야구 최초의 시구가 있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1917년 보성고 앨범 ‘확인’

각황사 옆 운동장에서 야구

최린 교장 연미복입고 던져

사찰 주변경관, 북악산 ‘또렷’ 

1917년에 나온 보성고 제8회 졸업앨범에는 여러 장의 야구 사진이 실려 있다. 오영식 보성고 교사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16년과 1917년 졸업앨범에 8장의 야구사진을 확인 할 수 있다. 특히 1917년 앨범에는 당시 보성고 최린 교장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시구를 하는 모습이 실려 있다. 연미복을 입고 중절모를 쓴 최린 교장 뒤에는 한복을 입은 심판이 서 있다. 또 포지션별로 자리한 흰색 옷 입은 선수들이 타석을 응시하는 모습도 확인 가능하다.

최초의 야구 시구가 있었던 곳이 바로 지금의 서울 조계사인 것이다. 1917년 당시 조계사에는 보성학교(普成學校, 지금의 보성고등학교)가 있었다. 보성고 앨범에 실린 야구 사진에는 조계사 이전에 있었던 각황사(覺皇寺)의 모습이 선명하다. 각황사는 1910년에 창건됐다. 팔작지붕 모양으로 전형적인 일본 사찰의 형식을 지닌 각황사 옆에는 교사와 학생으로 보이는 관중들이 선 채로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초창기 한국야구의 민낯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귀한 자료이다. 또한 사진 속 각황사 법당 앞에는 오래된 나무가 서 있다. 운동장 뒤쪽으로는 한옥이 줄 지어 있고, 북악산(北岳山)이 또렷하게 보여 당시 서울 도심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오영식 보성고 교사는 “당시 학교 교정은 지금의 조계사 자리에 있었다”면서 “(사진의) 각황사 옆에 보이는 나무가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 앞에 있다”고 밝혔다. 사진 속 시구자를 최린 교장으로 추정하는 이유에 대해 “당시 연미복 차림의 최린 교장 사진이 학교 자료에 자주 등장한다”면서 “그 무렵에 10년간 최린 교장이 근무했다”고 설명했다.

보성고 제1회 졸업생 전익영 씨는 생전에 “내가 보성에 입교한 것이 1906년으로 졸업한 해가 1911년이 되니 꽤 오랜 세월 전의 이야기”라면서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조계사 자리가 교사(校舍)였으며, 백여 칸이나 되는 한옥을 적당히 개조해서 교실로 썼다”고 회고한바 있다. 지금의 서울 조계사에 학교 건물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보성고 제1회 졸업생 변영태 씨도 생전에 “학교 위치가 조계사 자리로 그 동네를 박동(礡洞)이라 불렀다”면서 “전동(典洞, 지금의 인사동)에 실골목으로 통하는 운동장은 동쪽 돈대 위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와함께 변영태 씨는 “운동장 한쪽 담이 바로 민충정공(閔忠正公, 민영환)이 망국한을 품고 자결한 (이완식의) 집 담이기도 했다”면서 “의혈(義血) 젖은 옷을 간직했던 장판 마루방의 틈을 비집고 의죽(義竹)이 났다 해서, 구경꾼들이 경향 각지에서 모여드는 틈에 끼여 나도 여러 차례 가본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고 했다. 현재 조계사 옆과 우정공원에는 민영환의 생가 터라는 표지석과 충정공의 동상이 서 있다. 하지만 변영태 씨의 증언에 의하면 민영환이 자결한 곳은 자택이 아니라 이완식이라는 인물의 집으로 여겨진다.

일제강점기 보성고 운동장에서 열린 야구 경기. 지금의 조계사 자리이다. 사진출처=<보성백년사>

지금의 조계사 자리에 있던 사립 보성학교는 1906년 한성 중서 박동 10통 1호에서 개교식을 거행했다. 고종 황제는 “널리 사람다움을 열어 이루게 한다”는 의미의 보성을 교명(校名)으로 하사했다. 당시 교사는 7인, 신입생은 246명이었다. 개교 두 달 전에 예조참의를 지낸 김교헌(金敎獻) 소유의 가옥 200여 간을 매입해 수리를 거쳐 교실로 만들었다. 김교헌은 나중에 대종교 2대 교주로 추대되었으며,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설립자는 대한제국에서 내장원경(內藏院卿)과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이용익(李容翊)이었다. 친일파의 견제를 받으며 일제에 저항한 그는 러시아로 망명했다가 블라디보스톡에서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보성학교는 보성소학교, 보성중학교, 보성전문학교, 보성사(普成社) 등이 함께 건물을 사용했다. 이 가운데 보성사는 1919년 3ㆍ1운동 독립선언서를 전량 인쇄한 역사적 공간이다. 당시 재판 과정에서는 2만1000여 장을 인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3만5000장을 제작했다. 조계사 뒤 수송공원으로 바뀐 보성사 자리에는 기념비가 역사의 자취를 전하고 있다.

보성고 제19회 졸업생 홍봉진 씨는 “1926년 가을에 보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입학했는데, 그 때 보성학교는 지금 중동학교(현재 수송공원) 건너편에 몇 백 년 된 느티나무 한 개가 남아있는 1000평 남짓한 자리에 회색빛 목조 2층 건물로 그리 크지 않으나 … 5학년 되는 봄에 학교는 불교 계통의 동광학교와 합해가지고 혜화동 학교로 옮겨왔다”고 회고했다.

홍봉진 씨의 증언처럼 보성학교는 불교와 인연이 맺었다. 1924년 천도교에서 조선불교중앙총무원으로 경영권이 넘어 갔기 때문이다. 이용익에 이어 13년간 보성학교를 운영한 천도교의 뒤를 이어 불교계가 인수한 것이다. <보성 백년사>에서는 이에 대해 “불교계가 보성고보를 책임지겠다며 나서게 되었다. 그것은 민족 사학인 보성고보가 쓰러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대승적 불교정신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석주(昔珠)스님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당시 불교계는 조선불교총무원과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처음에는 조선불교총무원이 인수했다가 경영이 어렵자 교무원이 인수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운영하는 동광학교(東光學校)를 병합했는데, 천재 시인으로 유명한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도 이때 보성학교로 편입했다.

1924년 보성고보의 새로운 설립자가 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이사 7인은 곽법경(위봉사), 김일운(유점사), 김구하(통도사), 오이산(범어사), 김월재(동화사), 유호암(법주사), 나청호(봉은사) 스님이었다. <보성백년사>에는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이사 강대련(姜大蓮) 스님과 이혼성(李混惺) 스님이 설립자 명단에 수록돼 있다. 혜화동 1번지로 학교를 옮긴 뒤에는 불교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를 설립해 함께 운영했다.

보성고보를 인수한 불교계는 1935년 9월11일 재단법인 고계학원(高啓學院)으로 경영권을 넘겼다.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불교전문학교를 설립하여 두 학교를 운영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학교 건물 등 일제의 재산을 한 푼도 받지 않고 고계학원에 기부했다. 친일 성향이 강한 고계학원이 운영한 보성의 시기는 암흑기로 평가받고 있다. 1934년 3월 <동아일보>는 “보성고보가 문을 닫는 것은 ‘불교 한 단체만의 일이 아니라, 2300만 조선 민중 전체의 중대사”라면서 “따라서 불교는 조선 민족 앞에 일대 과오를 범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일개 책임 문제다. 다른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보성고보는 살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고계학원이 인수한 보성고보는 이후 동성학원(東成學園)이 이어받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동성학원의 초대 이사장은 사비(私費)를 들여 불교 성보를 비롯한 민족문화재를 수호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이다. 보성고등학교는 1989년 종로구 혜화동 시대를 마감하고 송파구 방이동으로 이전해 웅지(雄志)를 펴고 있다.

이세용 조계사 종무실장은 “보성고 앨범에 있는 사진은 각황사의 위치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라면서 “백송과 회화나무 등의 자리를 근거로 연구를 진행해 조계사의 역사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한국 야구 태동기의 자취를 간직한 각황사와 그 일대는 이후 숙명여고, 중동학교 등이 자리 잡아 인재를 양성했다. 일제강점기 전국의 주요 사찰과 불교단체는 야구단을 조직해 대회에 참여하는 등 체육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소개할 예정이다. 조선불교계는 1938년 총본산으로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을 건립했다. 전통과 역사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북한산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했으며, 1954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조계사(曹溪寺)라고 명명했다. 각황사로 출발해 조계사로 거듭난 이후 한국불교총본산의 위상을 이어오고 있다.

자료제공=보성고 역사자료실

오영식 보성고 교사, <보성백년사>

[불교신문3201호/2016년5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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