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스님의 전기·문학 조명

석전 박한영 

종걸·혜봉스님 공저/ 신아출판사

 

“나라 잃었는데 무슨 공부냐”

금강산서 도심으로 내려와

독립운동과 승가교육 전념

 

미당 육당 가람 벽초 등

대표 작가들을 길러내고

선운사를 문학의 고향으로…

 

시대 앞서간 스승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라

석전스님의 일대기와 업적을 정리한 동국사 주지 종걸스님. 10년간 전국을 돌며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근대 불교의 역사를 복원했다.

 

군산 동국사 주지 종걸스님이 ‘석전 박한영’(1870~1948)을 화두로 부여잡은 것은 은사 재훈스님의 유훈 때문이었다. “한국불교를 일으킨 큰 스승이다. 더 늦기 전에 선양작업을 해야한다”는 말에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석전스님에 대한 기록은 논문 한 편과 스님의 한시를 번역한 책 한 권이었다. 이후 종걸스님은 ‘영호당 석전 박한영’이란 말만 들으면 전국 어디든 찾았다. 한 박물관은 다섯 번 방문한 끝에 수장고에 있던 서적을 볼 수 있었다. 미국 버클리대에 국내 문서가 있다는 말에 몇 차례 찾았다. 자동차 주행거리만 100만 km를 달렸다.

종걸스님은 “자료를 찾으면 찾을수록 석전스님이 얼마나 큰 스승이었는가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면서 교육사업을 통해 근대 승가교육 체계를 마련했다. 또 선운사가 오늘날 문학의 고향으로 인식되게 한 시인이면서 대강백이었다”고 소개한다.

종걸스님은 최근 영호당 석전스님의 일대기를 정리한 전기, <석전 박한영>을 출간한데 이어 그동안 수집된 자료를 분류해 가치가 높은 것은 근대문화유산 지정을 신청하고, 스님의 일대기를 청소년용 전기소설로 각색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또 석전스님의 한시를 번역하는 일과 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 제작도 구상 중이다. 지난 4월21일 동국사에서 종걸스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병목처럼 좁은 골에 풀과 대만 무성하고/ 멀리 뵈는 누각 터에 연기 자욱 덮었어라/ 시냇물 산꽃이 그때 일을 어찌 알랴/ 고요한 산 중턱에 국사 음성 간 곳 없어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머물렀던 보조암을 찾은 석전스님은 비분의 눈물을 흘렸다. 일제는 구한말 의병을 소탕한다는 이유로 보조암과 은적암 등 조계산의 많은 암자들을 불태웠다. 한국불교의 정신이 불타 버린 것이다.

석전스님은 교육자이면서 강백이었고, 시인이었다. 현재 700여 수의 시가 남아 있다. 그의 제자로 미당 서정주를 비롯해 육당 최남선, 가람 이병기와 신석정 조지훈 김달진 홍명희 등 국내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오세창 등 시인들과 시문학모임인 시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종걸스님은 “고창에 서정주, 부여에 신석정의 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이병기 생가도 최근 복원됐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은사이며 일제강점기 많은 문학작품을 남긴 석전스님의 기념관이 없다는 것은 이해 못할 일”이라고 말했다.

명문장가로서 석전스님을 엿볼 수 있는 점은 “1910년에서 1930년대 세워진 주요한 사찰 비문과 상량문 다수가 석전스님의 글”이라는 것이다. 특히 교구본사급 사찰의 경우 대부분 석전스님의 글을 봉안했다.

“신선도 부처도, 그렇다고 하늘도 아닌데/ 새하얀 바위산에 붉은 연기 감돈다/ 뉘라서 여기 올라 붓을 던졌다 하는가/ 온 몸이 그대로 시(詩)요 선(禪)인 것을” 금강산 헐성루에서 남긴 한시처럼, 석전스님은 출가 후 만해스님과 함께 금강산 신계사에서 수행을 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접하고 “나라를 잃은 마당에 공부를 해서 무엇하느냐”며 도심으로 내려와 송광사와 증심사를 중심으로 선불교를 지키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한편으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교육이 절실하다며 불교고등강숙 숙장, 불교전수학교 교장, 현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전 설립 등에 깊이 관여를 했다. 종걸스님은 “교육자로서 활동하면서 스님은 4만여 권에 이르는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를 많은 제자들에게 나눠줬는데, 구암사에 보관했던 장서가 빨치산 소탕작전 과정에서 모두 소실됐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석전스님이 불교계에 한결같이 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종걸스님은 “빈민을 보호하고, 힘없는 음지의 사람들을 구제하라. 그리고 문화유산을 지켜라는 말을 늘상 하셨다. 현대로 말하면 복지사업을 적극 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그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말이었다”고 전한다.

석전스님은 잡지 창간을 통해 불교문학과 포교활동에도 관심을 보였다. 1913년 발행한 <해동불보>, 1924년 용성스님과 공동 발행한 <불일> 창간호가 남아 그 역사를 대변한다.

“내(최남선)가 오랫동안 (석전)스님을 모신 덕분에 불교의 원류에 대해 익히 들었고, 또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지난번 만주에서 돌아오니 스님께서 찾아 주셨는데, 생각하니 인생의 무상함이 마치 뜬구름과 흐르는 물결과 다를 바 없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런저런 감회에 젖어 스님과 난 멀거니 서로 바라보며 한동안 응시하다가 ‘이젠 늙었어’ 하는 말씀에 불현듯 스님의 춘추가 올해 고희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남선은 석전스님이 70세 되던 1939년 <석전시초> 발간 작업을 시작해 1940년 이를 간행했다. 고희를 넘기는 스승에게 바칠 것이 없던 육당이 스님의 시를 모아 펴낸 것이다.

전통 한문학을 배웠던 석전스님은 문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시는 문예의 소품으로 도를 추구하는 자가 달갑게 여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 자체는 우주간의 청숙한 기운이 흘러나와 된다고 한다. 그래서 시인의 눈빛을 달빛처럼 천고를 비추어 보면 부질없는 세상의 공명을 가볍게 보는 것이다. 시를 말함에 어찌 운율과 절주가 없는 것으로 천지의 조화인 천뢰에 합치되는 것이라 하겠는가.”

전기문은 한 개인의 기록만은 아니다. 한 시대를 살았던 큰 스승을 통해 당시 시대를 읽고, 삶의 방향을 세울 수 있다. 이 책은 석전스님을 통해 일제강점기 우리의 사상과 문학의 시원을 전해주는 기록물이다.

[불교신문3199호/2016년5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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