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연수원장 구과스님

지난 12일 공주 한국문화연수원에서 만난 구과스님. 스님은 “자기만의 목표가 뚜렷하다면 그 어떤 시련과 역경이라도 능히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마련”이라며 정진을 독려했다.

구과(九果). 초기불교에서 가르치는 수행의 여러 단계 가운데 하나다. 젊었던 구과스님은 ‘가야산 호랑이’ 성철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해인사에서 3000배를 했다. 성철스님은 3000배를 마쳐야만 만나줬다. 어른이 바닥에 던진 종이 12장 가운데 하나를 골라 얻은 법명이 구과다. 결국 구과스님의 법명은 의미보다 과정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3000배를 100일 동안 할 만큼 옹골찬 수행자였다. 염불이면 염불, 사찰음식이면 사찰음식, 가사불사면 가사불사 못하는 것이 없는 팔방미인이기도 하다. 인내와 노력의 결과이자 “한번 마음먹으면 무조건 해내는” 성격의 결실이다. 스님의 작은 체구는 아담하다기보다 강단지다.

2013년 한국문화연수원장 부임

비구니 최초 종단기관장 ‘주목’

운영 방향은 ‘다 비움 다 채움’

연수원 이용자 50% 기업 유치

 

명상길 사찰음식 다도 등으로

불교 모르는 일반인과 거리 좁혀

 

“먹는 것, 보는 것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부터 수련ㆍ치유 시작”

태화산 마곡사 등 수려한 풍경

활용한 프로그램으로 쉼터 제공

 

“목표 뚜렷하면 그 어떤 시련도

견딜 수 있는 힘 생기게 마련

관건은 ‘공심’…나라든 직장이든

대중 위해 헌신하다보면 이뤄져” 

초년은 불우했다. 아버지가 사촌의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산을 몽땅 날렸다. 등록금을 댈 수 없다는 부친의 한탄에도 기어이 진주교대에 응시해 합격했다. 결국 가지 못했다. 돈은 없었지만 끈기는 어디 가지 않았다.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에 진학하겠다 마음먹고 공무원 시험에 도전했다. 또 합격. 우체국에 취직했다. 생활인으로 열심히 살았으나 대학생에 대한 미련도 무럭무럭 커갔다. 끝내 우체국을 그만두고 야간대학에 3개월쯤 다녔다. 독했지만 어쩔 수 없이 쓸쓸했던 마음의 길은 그 무렵 절집으로 흘러들었다.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스님과의 인연이 오래됐다. 어릴 때부터 불심이 돈독했고 “그날도 아는 언니를 따라 부산 범어사에 놀러 갔는데 큰스님의 덕화에 유난히 끌렸다.” 지유스님 아래서 참선을 배우면서 사실상 사무장 노릇을 했다. 무엇보다 운명이었나 보다. “절에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사바세계 중생의 근심걱정 전부 내려놓고 영원히 절에서 살자는 생각에 머리를 깎았다. 사실 은근히 출가를 권했던 이는 지유스님이었다. 말없이 ‘願成佛 度衆生(원성불 도중생)’이란 글귀와 함께 작은 탁상시계를 넌지시 내놓았다. 분초도 아껴서 쓰라는 뜻이었다.

구과스님은 울산 석남사에서 출가했다. 누구에게나 초심자 시절은 힘겹다. 스님의 시작도 순탄치 않았다. 사미니계를 수지한 뒤 비구니계의 원로인 인홍스님을 시봉하며 정신없이 지냈다. 그러던 중 은사 스님이 이북 출신이었는데 북녘의 사투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실수를 연발했다. 이런저런 오해가 쌓이면서 급기야 가사와 장삼을 빼앗겼다. 상징적인 징벌이 아니었다. 대중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운이 좋으면 운력을 마친 뒤 뒷방에서 혼자 끼니를 때울 수 있었고 하루 종일 굶기도 했다. 말로 다 못할 만큼 서러웠다.

우는 마음으로 매일 1000배를 반복했다. ‘계속 절에 살 것인가 말 것인가’ 기로에 섰다. 문득 평소에 암송하다시피 했던 <치문(緇門)>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출가해서 은사를 바꾼 사람, 결혼했다가 출가한 사람, 환속했다가 재입산한 사람은 승단에서 결코 제 목소리를 내고 살 수 없다.” 경거망동했다가는 평생의 굴레를 짊어질 수도 있었다. 결국 참회에 참회를 거듭한 끝에, 기어이 살아남았다. 물론 지금은 은사 스님과 혈육처럼 가깝다. 구과스님은 “매사에 딱 부러지는 성격의 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신다”며 조심스럽게 웃었다. 노스님들에게 인사를 갈 때마다 듣는 말은 어쩌면 훈장이다. “가장 먼저 나갈 것 같던 아이가 가장 오래 남았다.”

인생의 절반은 참선이며 기도다. 부산 옥천사에서 날마다 3000배를 하면서 능엄주를 100번씩 외웠다. 꿈속에서도 염불을 하는 몽중일여(夢中一如)의 경지에 오르기도 했다. 좌복에 앉아 있는데 육체가 사라지는 경험도 해봤다. “3000배도 처음엔 죽을 만치 힘들지만 막상 일상이 되면 밥 먹는 일처럼 자연스럽다”는 말에는 힘이 느껴진다. 도반들은 “나비가 사뿐히 내려앉았다가 날아오르는 것 같다”며 감탄했다.

구과스님은 “깨달음이란 목표보다는 깨달음을 찾아가는 과정에 수행의 참맛이 있다”고 했다. 스님이 말하는 수행이란 무한한 능력을 지닌 불성(佛性)의 발현을 가로막는 무명(無明)을 걷어내는 일이다. 안주가 아닌 가능성으로서의 삶.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단호했다. “안 되는 건 없다. 안 할 뿐이다.”

양장점을 하던 친척을 둔 덕분에 가사를 직접 제작할 만큼 손재주가 뛰어나다. 그래서 사찰음식 전문가이기도 하다. 사연이 자못 신기하다. 3000배 수행정진을 하던 절의 공양주 보살은 영친왕의 아내였던 이방자 여사의 전속 요리사였다. 그녀에게서 기본기를 다지면서 그리고 절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원주 소임을 맡으면서 자연스레 요리와 친해졌다. 스님이 바라보는 사찰음식은 하나의 승가(僧伽)다. “마늘, 양파와 같은 오신채를 절집에서 금하는 이유는 정신을 헝크는 자극적인 맛 때문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화합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각 재료가 고유한 맛을 유지하면서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게 중요하죠.”

공주 태화산 한국문화연수원장 부임 당시 비구니 최초의 종단 기관장으로 화제가 됐던 스님이다. 꼼꼼한 살림 수완에 힘입어 이용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연수원 이용자 가운데 일반기업체 연수가 50%를 상회하지만 연수원 자체 프로그램 이용률은 10%선에 불과해 빠른 시일 내 30%선까지 올리겠다”는 목표다. 지향하는 연수원의 운영방향은 ‘다 비움 다 채움.’

참선프로그램인 ‘화두, 영원한 행복의 길’은 입문과정과 심화과정으로 나눠 진행된다. 일반인이 참가하는 만큼 참선이론을 먼저 공부한 후 화두를 받고 좌선실참에 들도록 길을 열어준다. 참선뿐 아니라 태화산 백범명상길 산책, 사찰음식, 다도 등으로 불교를 모르는 일반인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스님은 “먹는 것, 보는 것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부터 수련과 치유가 시작된다”며 “태화산과 마곡사 등의 수려한 풍경과 사찰음식, 효율적인 수행 프로그램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이들에게 참된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 어떤 추억과 이력보다, 가장 귓가에 진하게 남는 말은 인욕(忍辱)이었다. 주어지면 주어지는 대로 순응했고 맡은 일은 한 치도 허투루 하지 않는 성품이다. 누구 못지않게 참고 견딘 사람의 경험담이기에 설득력이 크다. 요지는 진정한 ‘참음’은 ‘참음’ 너머에 있다는 것. “오래 참았다는 생각, ‘내가 이만큼이나 참았는데…’라는 생각에 연연하면 절대 참은 게 아닙니다. 마음에 오기와 앙심이 남아있으면 절대 참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더 불행해집니다. 경계해야 할 욕심과 분노만 더한 것일 따름입니다. 힘들다 더럽다 치사하다… 자기 몸뚱이도 조복 받지 못했으면서 도(道)를 이야기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요.”

그리고 목적의식. “자기만의 목표가 뚜렷하다면 그 어떤 시련과 역경이라도 능히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관건은 공심(公心)이다. “나라이든 사회든 조직이든 대중의 이익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다보면 자기의 소원은 저절로 이뤄지는 법”이라는 확신. 정말로 “다 비우면 다 채워질지” 실행해볼 일이다.

■ 구과스님은…원광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84년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1990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석남사 정수선원, 백흥암 선원, 내원사 동국제일선원 등에서 정진했다. 현재 중앙종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3년 12월 한국문화연수원장에 임명돼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3196호/2016년4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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