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해안봉수(海眼鳳秀)

사계절 아름다운 절. 부안 내소사. 백제 무왕 34년(633년) 혜구스님이 “여기에 들어오는 분은 모든 일이 다 소생(蘇生)하게 해달라”는 원력으로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역대 선지식이 주석했고, 근세에는 만허(滿虛)ㆍ해안(海眼) 스님이 불법(佛法)의 향기를 전했다. 지난 13일 열반 42주기를 맞이한 해안 스님의 수행과 자취를 상좌 동명스님(서울 전등사 회주)의 회고와 <해안집> 내용을 참고해 살폈다. 

선정에 든 모습을 해안스님 모르게 촬영했다.

“7일이면 도를 성취할 수 있다”

불교전등회 대종사로 수행지도

내외전ㆍ선교 겸비, 현대교육도 

○… 내소사 부도전에는 ‘범부(凡夫) 해안지비(海眼之碑)’가 서 있다. ‘번뇌에 얽매여 생사에 초탈하지 못한 사람, 해안의 비’라는 의미다. 뒷면에는 ‘생사어시(生死於是) 시무생사(是無生死)’라고 적혀 있다. “죽고 사는 것은 이것(마음)에서 나왔으나, 이것에는 생사가 없다”는 뜻이다. 해안스님이 원적에 들기 전 “비에 뭐를 새기고 요란을 떨지 말라”면서 미리 정해준 글이다. 평생 수행정진과 전법교화에 전념했지만, 아상(我相)에 끄달리지 않는 하심(下心)의 경계를 후학들에게 보여주었다. 또한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전한 것이라 여겨진다. 스스로 ‘범부’라 했지만, 그 누구도 해안스님을 ‘범부’라 여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범부’라는 표현이 ‘진짜 범부’의 마음에 경종을 울린다.

○… 해안스님은 백양사에서 학명(鶴鳴)스님에게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으라”는 화두를 받은 후 생사를 걸고 절박한 심정으로 공부에 집중했다. 이때가 무오년(戊午年)이니 1918년이다. 음력 12월8일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성도절을 기해 7일간 용맹정진을 할 때였다. 7일째 되는 날 저녁.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와 종소리, 그리고 선원의 방선 죽비소리에 환희의 세계를 맛보았다.

그 뒤로 스님은 대중들에게 간절한 원력을 세우고, 진력을 다해 정진할 것을 권했다. “이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일을 마칠 때까지는 생명이 경각에 달린 것으로 알고 죽기 살기로 대들어야지, 엉성하게 해가지고는 공연히 비싼 양식만 축내 빚만 무거울 뿐입니다.” 대중들에게 “7일이면 도를 성취한다”며 정진을 독려했던 것이다. “죽을 각오로 대들어야 영원히 살 길이 열리지 어설피 살려고 버둥대면 오히려 죽는 자리에 놓이게 된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결심으로만 한다면 7일간이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라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결정지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 해안스님은 참선 수행에 뜻을 두고 있는 불자들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불교전등회(佛敎傳燈會)를 창립했다. 1969년 봄. 변산 서래선림(西來禪林)에서 창립한 불교전등회는 매년 4회 이상 정진법회를 갖고 신심(信心)을 견고하게 했다. 1970년 4월 전등회 제1회 정기총회에서 “우리가 견성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자아(自我)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이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면서 “아무쪼록 굳은 입지(立志)로써 원대한 포부를 성취하는 출격장부(出格丈夫)가 되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당부했다.

○… 1969년 3월 제1회 정진법회가 열렸다. 해안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동참한 대중은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했다. 대중은 “나무를 비벼서 불을 구하듯 이 불이 날 때까지 결정코 쉬지 않겠다”면서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사량(思量)과 계교(計較)를 요(要)하지 않고 좌우를 돌아보지 않으며 오직 불을 끄는 데에만 돌진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저희들의 한번 크게 죽기로 하는 강한 신심(信心) 앞에는 산더미같은 업장도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로 화하여 녹아버리고 말 것을 자신하는 바입니다.”

해안스님 기일을 앞두고 상좌 동명스님이 진영을 바라보며 은사의 가르침을 회고하고 있다.

○… 해안스님은 서신(書信)을 통해 상좌나 불자, 지인들의 수행을 격려했다. 각자 여건에 맞는 가르침이 주를 이루었다. 생사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자유인이었지만, 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자비롭고 인자했던 스님의 성품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훗날 동국대학교 총장과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한 서돈각 박사가 1969년 서울대 사법대학원장에 취임할 무렵 보낸 편지이다. “매일 아침에 108배를 모신다 하오니 불퇴전의 굳은 신심으로 구경(究竟)에 보리를 성취할 줄 믿습니다. 언젠가는 선열(禪悅)의 삼매에서 법희(法喜)를 느낄 기회가 있으시기를…”

○… 서돈각 박사는 <해안집> 서(序)에서 “큰스님께서 나에게 무애(無碍)라는 법호(法號)를 주시면서, 언제 어디서나 걸림없는 주인 노릇을 하라는 법문을 내려주시던 감격이 아직도 내 가슴에 생생하다”면서 “그 뒤로 자주 스님을 찾아 마음의 정처(定處)를 묻곤 하였는데, 큰스님의 생활 그것이야말로 바로 걸림없는 낙도(樂道) 생활이었으며, 오직 한없이 자비로써 대중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는 도인(道人)의 진면목(眞面目)이 역연하였다”고 회고했다.

○… 1970년 경 상좌 동명스님(서울 전등사 회주)에게 보낸 서신에는 아버지 같은 은사의 따뜻한 마음이 실려 있다. “이것저것 배우기를 많이 하는 것보다 일행일구(一行一句)라도 똑똑히 알아 소화를 잘해야 한다”면서 “배우기를 탐내는 것은 오히려 손해가 될 뿐 이익이 없다. 공부도 몸이 건강한 연후의 일임을 알고 환절기에 각별히 몸에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 동명스님이 은사 해안스님을 시봉할 무렵의 일화. 예산 보덕사에서 정진법회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해안스님이 다가와 주장자로 우물을 세 번 두드리며 말했다. “이 뭣고?” 동명스님은 지금도 그 당시 일이 생생하다. “사그라진 의심을 돈발(頓發)케 해주시던 순간, 형형(炯炯)하던 스님의 안광(眼光)은 늘 제 뇌리에, 가슴 속에, 육근(六根) 구석구석에 평생 살아 남아, 지금 제 살림의 크나큰 밑천이 되어 있습니다.”

동명스님은 “은사 스님이 열반하신지 올해로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어 42년이 되었다”면서 “그렇게 무심히도 세월이 지났지만, 바로 어제 인 양 스님이 그립다”고 했다. 동명스님은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자상한가 하면 서릿발처럼 엄하셨으며, 바늘 끝처럼 예리하면서도 바다처럼 원만하고 그윽하셨다”고 회고했다.

한편 지난 13일 부안 내소사(주지 진성스님)에서는 전 선운사 주지 재곤스님, 봉래선원장 철산스님, 선운사 주지 경우스님 등 사부대중 150여명이 동참한 가운데 ‘해안대종사 열반 42주기 추모다례재’를 봉행했다.

1970년대 어느날. 법회를 마친 후 대중과 기념촬영을 한 해안스님(왼쪽 네 번째). 스님과 인연이 깊은 서돈각 박사(왼쪽 다섯 번째)도 함께 했다.

■ 해안스님 발자취 

1901년 음력 3월7일 전북 부안군 산내면 격포리에서 출생. 부친 김치권(金致權) 선생, 모친 은진(恩津) 송씨. 어린 시절 이름 성봉(成鳳), 훗날 봉수(鳳秀). 마을 서당에서 한학 공부. 1914년 부안 내소사에서 만허스님에게 득도. 1917년 백양사에서 만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1918년 백양사 광성의숙 보통과 수료. 1918년 성도절 용맹 정진하여 개오(開悟). 1920년 백양사 지방학림 중등과, 사교과 졸업. 1922년 불교중앙학림(지금의 동국대) 졸업, 중국에서 구도 행각. 1925년 중국 북경대에서 2년간 불교학 공부하고 귀국. 부안 내소사 주지 취임. 1931년 월명선원에서 안거. 1932년 부안 산내면 석포리에 계명학원(啓明學院) 설립 무취학 아동과 무학청년들을 대상으로 문맹퇴치 운동. 1936년 대덕(大德) 법계 품수. 1945년 김제 금산사 주지, 1946년 금산사 서래선림 조실 추대. 1950년 내소사에 서래선림 열고 조실로 주석. 1969년 불교전등회 대종사로 추대. 1974년 월명선원에서 수선 안거 이래 36번째 하안거 성만. 1974년 3월9일(음) 내소사 서래선림에서 입적, 세수 74세, 법납 57년. 상좌로 혜산(전 내소사 주지)·동명(서울 전등사 회주)·철산(내소사 봉래선원장)스님 등이 있다. 

■ 해안스님 어록 

부디 지혜로운 사자가 될지언정 어리석은 개가 되지 말지어다. 쓸데없는 망상을 버려야 하니 우리 집안에 해제(解制)니 결제(結制)니 하는 것들이 원래 없다.

- 1968년 1월 서래선림 동안거

알았든지 몰랐든지 모두가 부처입니다. 지금도 부처이고, 과거에도 부처이고, 역시 미래에도 부처이신 여러분입니다.

- 1972년 5월 서래선림에서

친하고 예뻐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해탈을 얻어 자유자재하게 자기 갈 길을 가게 됩니다.

- 1972년 5월 서래선림 보은불사 회향

선(禪)은 일체의 불안과 시비와 속박에서 해방되어 가장 자유롭고 가장 존귀하고 가장 행복한 것이니 만법의 왕이 된다.

- <해안집> ‘깨달음의 혁명’

부처라는 명의는 중생의 다양한 체병을 고치기 위해 갖가지 약방문을 쓰셨으니 그것이 팔만 사천 법문입니다.

- <해안집> ‘선교양종의 한국불교’

오직 천상천하를 통하여 시방세계 가득 차고 삼세고금이 다한, 수명이 무량한 진리가 있으니 이것이 원각(圓覺)이니라, 이 원각을 믿고 이 원각에 귀의하라.

- <해안집> 영가천도법어

[불교신문3195호/2016년4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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