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서울 탑골공원

 

일제강점기 발행된 엽서에 담긴 원각사지 모습. 10층 석탑과 대원각사비, 팔각정의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 끝에 보이는 원형 건물은 음악당이다. 사진 오른쪽 원각사 무료급식소 주지 원경스님이 유리보호각이 설치된 10층 석탑을 참배하고 불자들의 관심을 당부했다.

서울시내 한복판인 종로2가에 자리한 탑골공원에는 웅장한 규모의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시민들을 맞이한다. 탑골이란 말이 유래한 탑이다. 한때는 동남아시아에서 탑을 지칭하는 ‘파고다(pagoda) 공원’으로 불렸다. 조선 세조가 세운 원각사(圓覺寺)가 있었으며, 대한제국 당시 고종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으로 조성됐다. 부침(浮沈)의 역사를 간직한 탑골공원을 찾아갔다.

조선 세조가 건립한 원각사

연산군, 중종 거치며 ‘폐사’

일제, 10층 석탑 반출 기도

해방후 미군에 의해 ‘복구’

20여년째 무료급식소 운영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4월의 봄날. 탑골공원에는 담소를 나누는 할아버지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인근에 서울노인복지센터가 있어 어르신들이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탑골공원은 할아버지들의 대표적인 휴식 공간이다. 1970년대 산업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서울이 팽창하면서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노년층과 실직자들이 모여들어 하루를 소일하던 곳이다.

탑골공원의 상징은 국보 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다. 3층 기단(基壇)과 10층 탑신(塔身)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탑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1924년 8월15일자 <동아일보>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납석탑(蠟石塔)’이라 호칭하며 유래를 보도했다. “명물명물 하니 서울 안 명물에 탑골공원 납석탑이야 뺄 수가 있습니까. 이 탑은 고려 충렬왕비 원나라 공주가 시집 올 때 가지고 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으나, 그 반대로 우리 조선에서 만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조선 세조 때 원각사를 창건하면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본래 원각사에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무악대사를 위해 창건한 흥복사(興福寺)가 있었다. 세종이 불교 종파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하면서 사찰 기능을 잃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악학도감(樂學都監)이 들어섰다.

1464년 5월 세조의 명에 의해 흥복사 터에 절을 세우는 데 그것이 바로 원각사이다. 왕세자, 종친, 문무백관과 함께 흥복사터를 찾은 세조는 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게 하는 등 불사를 진행했다. 이듬해 도량이 완성되자 경찬법회(慶讚法會)를 대규모로 거행하고,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처음 간행한 경전을 강설하는 간경법회(看經法會)도 봉행했다. 이때 세조가 직접 참여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고층 건물이 없었던 한양의 한가운데 우뚝 솟은 원각사 10층 석탑은 사방 어디에서나 한눈에 들어왔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처럼 한양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나 다름 없었다.

여기서 또 하나 궁금한 점. 원각사(圓覺寺)라는 사명(寺名)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세조의 숙부인 효령대군이 양주 회암사 동쪽 언덕에 석가사리탑을 건립하고 <원각경(圓覺經)>을 강설하자 석가여래가 공중에 나타나 사리를 분신(分身, 여러 개로 나뉨)하는 신이(神異)한 일이 일어났다. 원각사를 세울 때 회암사에서 화현한 석가여래의 사리와 <원각경>을 탑에 봉안하면서 절 이름이 지어졌다. 최완수 간송미술관연구소장은 “불법(佛法)의 신통력(神通力)을 빌어 왕실의 안녕과 왕권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결행된 중창불사였다”고 원각사 창건의 의미를 전했다.

국왕이 직접 참여한 가운데 대규모 법회가 열렸으니, 비록 숭유억불의 시기였지만 원각사는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번성했다. 사대문안 중심인 종로 대로변에 있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절 주변에는 수많은 가옥이 들어섰다. 마을 이름도 탑이 있어 ‘탑골’이라 불렸다.

그러나 원각사의 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성종이 즉위한 이후 억불정책이 강화되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더욱 곤란을 겪었다. 연산군 10년(1504년)에 철거 주장까지 나왔고,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掌樂院)이 옮겨왔다. 기록에 따르면 “전국에서 올라온 기생 1200여 명과 악사 1000명이 기거하는 연산군의 기생방이 되었다”고 한다. 스님들이 주석하며 불조(佛祖)에 예를 올리던 도량이, 기생들의 숙소가 되어 버린 것이다.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은 연산군을 쫓아낸 중종반정이 일어났지만, 원각사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궁궐과 가까운 곳이란 지리적 이점 때문에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신들이 절터에 집을 지었다. 그렇게 원각사는 사라지고 10층탑만 남았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탑골에는 탑을 중심으로 수백호 초가(草家)가 있었고, 이들은 미투리를 삼아 파는 업으로 유명했다”면서 “이 초가의 굴뚝 연기 때문에 탑이 새카맣게 됐다”고 한다. 풍화 작용 등에 의해 10층 탑이 부식되었지만, 전혀 일리 없는 것 같지는 않다. 일설에는 화재로 불에 거슬렸다고도 한다.

연산군 실각 뒤에는 전각은 한성부 청사로 사용됐다. 그러나 1514년(중종 9) 호조에서 원각사 재목을 헐어 다른 관청의 재료로 사용할 것을 왕에게 청하여 허락받았다. 그 뒤로 원각사 건물은 모두 사라졌고, 10층 석탑과 비만 남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연산군 때, 흥청, 운평 등 기생을 원각사에서 살게 하고, 절 안에 연방원을 차렸다. 이어 중종 7년에 선종, 교종 두 종단의 절과 원각사를 철폐하고, 그 재목을 연산군 때 집을 철거당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탑골공원에 자리한 대원각사비. 일제강점기에 나온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이다. <사진 왼쪽> 일제강점기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팔각정. 3개층이 땅에 내려져 있다. 멀리 산 밑에 명동성당이 보인다.

이후 300년 넘게 방치되면서 사지(寺址)로 전락했다. 조선 정조 때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을 기록한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원각사지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거북 받침이 있는 돌비석이 지금은 민가 뒤뜰에 들어가 있어서 사람들이 구경하기를 청하면 주인이 인도하여 보여주고, 나올 때면 돌거북에 담배를 바치고 가라고 한다. 콧속이 우스꽝스럽지만 영감(靈感)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실상은 입장료 셈으로 거두어서 자신이 피운다.”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게된 것은 고종이 서양식 공원을 조성하면서다. 고종 황제의 명을 받은 영국인 브라운이 1897년(1895년, 1899년 조성 설도 있다) 공원을 만들었다. 1893년 조선에 들어온 브라운은 총세무사, 도지부 고문으로 국가 재정과 관련한 일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파고다’라는 이국적인 이름이 붙은 것도 브라운의 영향으로 보인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탑골공원은 한양 중심에 자리하고 있고, 주변에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사람들이 가장 모이기 쉬운 장소다. 1919년 3월1일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만세운동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2월17일 탑골공원에 사람들이 모였다. 땅 바닥에 방치되어 있는 원각사탑 상층부 3개 층을 복원하기 위해서다. 미군 공병대의 기중기가 동원됐고, 라이언 해군 소위가 작업을 지휘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반출을 시도하면서 땅에 내려놓은 것이란 이야기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옮기려는 과정에서 그렇게 됐다는 설이 있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일본으로 가져간 전력이 있으니 가능성이 있다. 한편 중종 7년 원각사를 헐고, 10층 탑을 양주 회암사로 옮기려고 3층을 내려놓은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이때 흰구름이 탑을 에워싸는 이변이 일어나자 중종이 이전 중지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1928년 10월16일 <동아일보>에는 ‘실종한 원각사 불상, 좌대만 광교서 발견’이란 제목의 보도가 실려 있다. “지금 탑동공원 자리에 있던 원각사, 내버린 큰 불상의 앉은 틀만 찾다”라는 부제의 이 기사는 “지금 파고다 공원 자리에 있던 원각사의 대리석대불(大理石大佛)은 조선에 있어 가장 대규모의 것이며, 입상(立像)이었음으로 멀리 일본에서 참배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 뒤의 건물에 자리한 원각사 무료급식소(주지 원경스님)는 자비 실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여년째 어려운 이웃들에게 점심공양을 제공하면서 자비사상을 전하고 있다. 지난 2월28일에는 덕숭총림 방장 설정스님과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소장을 증명으로 관음보살좌상 봉안법회를 봉행했다.

원경스님은 “탑골공원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부처님과 탑을 봉안한 원각사가 있던 의미있는 공간”이라면서 “불자들부터 관심을 갖고 예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스님은 “당장은 어려운 일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탑골공원이나 사지(寺址)가 아닌 ‘원각사’를 재건하도록 원력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인사동(仁寺洞)

한국의 전통을 간직한 곳으로 탑골공원 근처에 있는 인사동은 서울을 방문하는 내외국인들이 한번쯤은 찾는 장소이다. 인사동의 이름은 원각사와 인연이 깊다. 원각사라는 대찰(大刹)이 있어 대사동(大寺洞), 큰절골, 사동(寺洞), 탑골로 불렸다.

[불교신문3195호/2016년4월20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