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감상 사전

석지현 지음/ 민족사

“눈은 차가워 얼음과 겹쳐 있는데/ 바람은 때려 땅을 쪼개네/ 저 바다 얼어붙어 평평한 단이요 /강물은 낭떠러지를 능멸하며 깎아먹네/ 용문엔 폭포조차 끊어지고/ 정구(井口)엔 서린 뱀같이 얼음이 엉키어 있네/ 횃불을 들고 땅끝에서 읋조리나니/ 저 파밀고원 어떻게 넘어갈까나.”

신라 혜초스님(704~787)이 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가면서 파밀고원 앞에 다다랐다. 목숨을 건 구법여행 길에서 이 얼마나 절절하고 간절한 외침인가. 혜초스님은 갔지만, 글은 지금도 남아 여정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남긴 시, 선시(禪詩)를 소개한 책이 나왔다. 석지현 시인이 펴낸 이 책은 22년 전 한중일 선사들의 글을 모아 소개했던 내용을 재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선사와 시인 306명의 작품 1431편을 국가별, 연대별로 정리했다. 또 간단한 작가소개를 곁들여 선시가 쓰여진 시대적 배경을 엿볼 수 있다.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향가를 비롯해 백운경한, 태고보우, 나옹혜근선사, 매월당 김시습에서 근래 만해스님까지 고서와 비문 등에서 찾아낸 선시다.

무엇보다 이 책의 특징은 선승들이 느꼈던 깨달음의 희열, 겸허한 침묵 속에서 우러난 생활의 서정을 비롯해 선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한글로 잘 옮겼다는데 있다. 22년 전 처음 출간했을 때 많은 인기를 얻었던 책이다. 석지현 시인은 “최근까지도 당시 책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며 “처음 책을 준비할 때 영혼을 차갑게 울리던 그 감성 앞에 다시 선 느낌”이라고 전했다.

“물 위에 진흙소가 달빛을 밭 갈고/ 구름 사이 나무말이 풍광을 끌고 가네/ 태고의 옛 곡조 허공속의 뼈다귀라/ 외로운 학의 소리 하나 하늘 밖에 길게 가네.” (소요태능, 1562~1649)

선이란 무엇인가. 선을 언어를 부정하는 불립문자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언어 사용을 극도로 절제한다. 오직 자신의 직관적인 깨달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알리기 위해서는 언어와 문자에 의존해야 한다. 저자는 “선사들은 그런 이유로 시를 택했다. 절제된 시를 통해 깨달음의 희열과 가르침을 전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깨달음의 길을 살다간 선지식의 글은 그래서 울림이 깊다.

[불교신문3195호/2016년4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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