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하되 도를 넘지 않아야

다투되 폭력적이어선 안 돼

선출 후 절대적 권한 부여한

‘천주교 콘클라베’ 벤치마킹 

소생은 82학번이다. 졸업한 해가 1988년이었는지, 1989년이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인연이 질겨서일까? 목멱에서 멀지 않은 곳에 평생직장을 잡았다. 서울 중구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다. 옥상에서 보면 목멱산, 남산이 코앞이다. 살짝 뒤쪽에 자리 잡은 동국대는 마음으로 봐야만 보인다.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닐 터다. 한경에서 소생은 동대 영자(英字)신문 더 동국 포스트(The Dongguk Post) 학생기자로서 품었던 꿈을 26년째 소란 없이 이어가고 있다.

상춘(常春)에 우뚝 솟은 남산은 바다 위 울릉도처럼 다가온다.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의 멧부리 방울 튀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중략) / 멀리 조국의 사직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적마다 어린 마음의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청마 유치환의 그 ‘울릉도’ 다.

(중략) 다음의 구절이 가슴을 후벼 판다. “사직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적마다 어린 마음의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소생은 동국에서 들려오는 어지러운 소식을 직업 상 자주 접한다. 언론 뉴스로도 보고, 지면광고로도 보고, 문자 서비스로도 본다. 나에게 동국은 사직과 같은 것이어서, 서로 다투는 소리에 놀라고, 흔들림에 어지럽고, 혼란에 기가 죽고 허리가 꺾인다.

주장하되 도를 넘지 않아야 한다. 다투되 폭력적이어선 안 된다. 우리가 대한민국 헌법 아래에 존재하듯 동국도 건학이념을 버리면 남남이요 모래알이다. 동국의 건학이념은 이렇게 돼 있다. “본교는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학술과 인격을 연마하고 민족과 인류사회 및 자연에 이르기까지 지혜와 자비를 충만케 하여 서로 신뢰하고 공경하는 이상세계의 구현을 건학이념으로 한다.” 나의 ‘울릉도’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정반대다.

이사회 구성과 총장선출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다고 듣고 있다. 천주교의 콘클라베 비밀회의를 벤치마킹해보자. 천주교는 열쇠로 문을 잠근 채 교황을 만장일치로 추대할 때까지 회의를 지속한다. 토론 과정에서 수많은 잡음이 있었을 터이지만, 끝나면 ‘셧 더 마우스’다. 그리고 교황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한다. 학교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왜 어려운 과정을 거쳐 지도자를 뽑는가.

새 봄이다. 없던 힘도 솟아날 때다. 서로 마주보고 언행의 두엄을 끼얹지 말자. ‘새내기와 헌내기들’이 학교를 믿고 마음껏 공부해도 취업을 할까 말까한 시대다. 학생들은 학생대로, 교직원은 교직원대로, 교수는 교수대로, 총장은 총장대로, 이사회는 이사회대로 소임을 다하면 그것이 곧 동국의 공익이 된다.

[불교신문3191호/2016년4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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