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수명이 한 살이나 근검절약된 새해 벽두에 내가 가장 ‘애용’하는 책을 대충대충 펼쳐본다. 두꺼운 양장본이라 평소에 라면 받침대나 낮잠 베게로 쓰기에 최적화된 공자의 <논어>이다. 몇 년 전 한국에 와 강연을 하고 간 ‘세계 가장 위험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이 ‘논어’를 읽고는 공자를 ‘멍청이의 원조’라고 조롱했다. 석가모니부처님보다 10살쯤 어린 ‘멍청이의 헛소리’가 뭔지 살짝 궁금해 슬쩍 펼쳤을 뿐이다. 그런데 구구절절 ‘공자 같은 말’들을 보다가 그만 이런 대목 때문에 내 눈길이 딱 멈췄다. 어느 날, 공자가 퇴근해 돌아왔는데 집에 불이 나 마구간이 홀랑 타버렸다. 하인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물었다.

“사람은 안 다쳤느냐?”

이게 끝이다. 그러니까 마구간의 말(馬)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고 사람걱정만 했으니 지금 봐도 너무 당연하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리고 ‘논어’를 기록한 후대의 여러 제자들이 멍청한 바보들이 아니라면 왜 이처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며 당연한 얘기를 기억하고 기록했을까? 난 그 이유를 잠깐 고민하다가 내 어릴 때부터 취미였던 ‘물구나무서서 세상바라보기’ 카드를 꺼냈다. 어떤 문제든 막힐 때는 거꾸로 생각해보면 대체로 풀렸던 경험 탓이다. 그러니까 이것도 말과 사람이라는 두 핵심단어를 비교하자면, 한마디로 2500년 전엔 한 마리 말값이 사람값보다 더 비쌌다는 얘기다. 사람값보다 말값이 훨씬 비싼데도 공자는 세상물정을 거슬러 감히 사람걱정부터 한 것이다.

하물며 그 사람이 ‘똥값’에 불과한 마구간 일꾼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도 ‘공자어록’에 들어갈 말을 간택하느라 서로 피 터지게 싸우다가 최종결정을 내렸지 않았겠는가.

물론 인간을 절대가치로 보는 요즘 시각으론 지젝처럼 멍청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처럼 한 시대의 보편적 서열을 거부하고 사회적 상품가치를 전복하는 공자의 행동은 경기와 무관하게 값싼 흑인노예의 족쇄를 풀어 자유를 찾아준 링컨대통령보다도 더 멀리 내다보며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멍청한’ 책을 조금 더 넘기다보니 이런 말도 나온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한다.”

언뜻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항상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는 체 게바라의 말이 떠올랐는데, 공자는 이미 오래 전에 비슷한 통찰의 말을 했다. 정의가 죽고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일수록 권력의 벽을 허물려는 ‘헛된 꿈’의 소유자들이 많은 법이다. ‘불가능한 것’이 60여 년 전의 체 게바라 시절에도 많았지만 수천 년 전의 공자 시절에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헛된 꿈’을 함부로 꾸다가 단두대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점잖은 맹자까지도 이런 말을 하며 노여워했겠는가.

“옳은 걸 옳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목숨 걸 용기가 필요하고 틀린 걸 틀렸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밥줄이 끊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무릇 가장 나쁜 세상은 표현을 할 수 없는 세상이고, 그보다 더 나쁜 세상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세상이다. 비록 ‘헛된 꿈’이지만 그 꿈마저 봉쇄된 세상은 단지 좀 더 넓은 감옥에 불과하다. 그동안 난 작가로 살아오면서 무엇이 불가능한지도 모른 채 수없이 ‘헛된 꿈’을 꾸었다. 더구나 문학은 과학이나 수학처럼 공식을 풀어 정답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도 정신적 가치를 잃지 않는 ‘상상 너머의 세계’가 너무 매혹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더 이상 헛된 꿈은 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필자 이산하 시인은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82년 <시운동>으로 등단했다. 시집 <한라산>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와 성장소설집 <양철북>, 산문집 <적멸보궁 가는 길>, 번역시집 <체 게바라 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프리모 레비 시집)이 있다.

[불교신문3174호/2016년2월3일수요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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