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불스님, 물리학자 카파토스 교수와 '과학과 종교' 대담

지난 1월30일 동국대 국제선센터에서는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과 채프먼대학 교수가 ‘과학과 종교’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사회는 카파토스 교수의 부인이자 캘리포니아 채프먼대학에서 두뇌과학을 연구하는 양근향 교수가 맡았다.

카파토스는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나 고교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 코넬 대학서 천체물리학을 공부하고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까지 채프먼대학 부총장을 지낸 그는 40년 이상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방랑하는 과학자’라는 별명답게 과학으로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정말 많고, 종교나 다른 이론들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는 노학자이다.


수불스님은 “카파토스 교수는 과학자지만 종교에 관심이 많고, 종교와 과학이 소통하는 기회가 될 것 같아 대담을 요청했는데, 귀국 일정까지 하루 늦추고 선뜻 응해줘 고맙다”고 인사했다. “종교와 과학의 경계가 없음을 이미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고 있다”고 말한 카파토스 교수는 “3일전 범어사에서 스님을 처음 만났는데 평생을 알아온 사이 같다”고 전했다.

1시간 30분가량 이어진 이날의 대담을 정리해봤다.

수불스님
카파토스 교수를 만난 지 3일째다. 대화가 잘 됐다. 양자물리학을 전공하고 기후환경, 천체우주에 대한 관심이 많은 학자라고 알고 있다. 고려대 초청으로 한국에 자주 방문해 왔다. 과학자지만 종교에 관심이 많고, 종교와 과학이 소통하는 기회가 될 것 같아 대담을 요청했다. 오늘 대담 때문에 귀국 일정도 하루 늦춘 것으로 알고 있다.

카파토스 교수
3일전 처음 만났는데 평생을 알아온 것 같다. 시간에 대해 얘기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시간의 제한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부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것은 어디 있을까. 우리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와 과학은 경계, 분별이 없다고 믿는다. 이건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것이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사고체계가 그렇기 때문이다. 사실 마음이라는 것은 놀라운 도구다. 마음은 덫이 되기도 한다. 거미줄 같다. 거미줄이 파리를 잡듯, 우리 마음도 그렇게 거미줄에 걸린 것 같다. 그래놓고 부처님께 방법을 묻는다. 결국에 우리 마음에 걸린 것이다.

수불스님
시작과 끝이 동시이 모양 없는 모양에서 뭔가 비롯됐는데 뭐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을까

카파토스 교수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태어나서 사라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연결된 시간이 없다. 시간을 원이라고 한다면, 원은 시작도 끝도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를 알파요 오메가라고 했다. 위대한 선각자들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부처님께서는 시간의 의미를 이해하셨다. 시작 이전에 다른 끝이 있고, 끝 이후에 새로운 시작이 있다. 현대 우주를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부처님 말씀처럼 성주괴공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시작과 끝이 없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 우린 항상 “나 시간 없어”라고 말한다. 서울 사람들은 뛰어다니는데 시간에 쫓긴다. 그들 스스로가 쫓기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
위대한 부처님 가르침을 여기서 참고해보자. 제가 이해하는 바로서 부처님 가르침은 삶이라는 게 연속돼 있다는 것이다. 사실 보면 실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보다 단순하다. 양자역학에서는 실재를 가리는 베일, 또는 탈이 있는데, 역할이 바뀌면 탈 바꾸지만 탈 안 존재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근데 그 역할에 갇혀 탈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양자역학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아 과거로 갈 수 있다. 아주 낯설지 않나. 우리가 꿈을 꿀 때 시간, 장소는 다르다. 부처님께서는 너머를 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불교와 과학에서는 시간은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동의한다. 이걸 과학자한테 얘기하면 어떻게 그런 말 할 수 있냐고 화를 낸다. 매일 아침에 거울 보면 같은 얼굴인가 다른 얼굴인가. 7년만 지나도 여러분 몸 안에 세포가 모두 바뀐다. 어떻게 바뀌는 그걸 보고 어떻게 진짜라고 할 수 있나. 우리 육체라는 것은 실체에서 가장 먼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다. 시작과 끝이 하나다. 우리가 시작이라는 것 이전, 빈 것이었다. 虛 혹은 無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게 아니라, 무엇이든 있을 수 있다. 양자진공이라하는 데 이를 이해하면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도 2600년 전에 공(空)을 말씀하셨다.

수불스님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기 이전에 많은 수행자 존재했을 것이다. 근원에 대한 의문을 품고고 해결점 찾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난 전과 후는 비교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께서 깨닫던 말든 관계없이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는 경우도 있다. 힌두교에서 얘기하는 ‘나는 누구인가(WHO AM I)’가 문제다. 이는 쪼개고 쪼개 들어가지만 영원히 쪼개고 들어가는 것인데 만날 수 없다. 깨달음에 접근한다는 느낌은 있지만 직접적인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한다.

카파토스 교수
심오한 질문이다. 우리 몸은 10조 개가 넘는 세포로 이뤄져 있다. 우리 몸에 세포 대부분은 인간세포가 아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외부생명체다. 걱정할 것은 없다. 10대 1 정도로 박테리아와 사람세포가 있는데 우리 몸은 외부생명에 점령당해 있다. 세포가 이뤄져 있는데 균형을 이뤄 공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몸을 소중히 여길까. 인간의 몸 자체가 인류에 교훈을 준다. 서로 죽이는 대신 엄청난 숫자의 세포가 공생하며 사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나라는 것은 실체라고 보기보다 박테리아에 점령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항상한 것은 무엇일까. 여러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자각이다.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자각하는 존재다.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소리를 듣고 있는 그것에 집중해보자. 내가 바로 그것이다. 소리가 아니라 소리 너머에 있는 그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수불스님
불교에서는 부모미생전에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 우주가 만들어지기 전에 본래면목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도록 한다.

카파토스 교수
존재 이전에 더 많은 것이 존재했다. 존재라는 것은 시간의 연속이다. 지구에 사이클 중에서 지금은 45억만년이 된 것이다. 인간 몸의 순환주기는 50~80년가량이다. 여러분이 45억만년 지나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이 되나. 모든 수준 차원에는 지혜가 있다. 지구에도 지혜가 있고, 태양에도 지혜가 있다. 인간 몸에도 지혜가 있다. 항상 모든 것은 순환하지만, 순환 너머에 존재하는 뭔가가 있다.

수불스님
불교에서는 존재하는 것에는 실체가 없다고 한다. 말은 존재라고 하지만 인식하지 않는다. 철학에서는 존재라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존재에 물음표를 붙이고 있다. 존재라고 얘기하는 순간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고 여겨 실체가 없다고 한다.

카파토스 교수
사실 존재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다. 동상처럼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늘 움직인다. 양자역학에서는 이것을 통합된 양극성이라고 한다. 반대가 있어서 전체가 된다. 존재라는 것이 양자역학에서 움직이지 않고 활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다. 그것을 존재라고 한다. 호흡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계속 숨을 쉰다. 어느 순간 호흡이 멈춘다. 그게 진짜 신비스러운 것이다.

수불스님
불교에서 번뇌망상을 제거하기 위해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병이 있으니 약을 가지고 치료하는 것과 같다. 병은 없어지고 약만 남았을 때 약도 없애야 되는데, 지혜까지 없앨 수 있는 방법이 과학에 있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카파토스 교수
대학에서 가르치는 지혜는 제한된 것이다. 거미줄 얘기를 했는데, 거미줄이 아름답긴 하지만 거미줄일 뿐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얽힌 매듭을 봤다. 아무도 풀 수 없다고 여기던 것이었는데 알렉산더 대왕은 칼을 뽑아 매듭을 내리쳤다. 이것이 스님이 말씀하신, 더 높은 차원의 지혜가 낮은 차원의 지혜를 없애지 않을까 한다.

수불스님
지금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과학도 종교 못지않다. 우리가 인식하는 정도의 차원을 넘어서 앞서갈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카파토스 교수
종교가 과학과 비교했을 때 갖고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수불스님
좀 더 짧은 시간에 과학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은 오랜 기간 동안 연속적으로 변화 발전하는 것을 꾸준히 지켜왔기 때문에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깨달음은 시공을 초월해 바로 터득해서 눈을 뜨는 것이기 때문에 근원적 가치는 바로 눈뜨게 하는 힘이 종교 안에 있는 것 같다. 카파토스 교수는 불교 배웠는지 모르지만, 불교적 가치를 터득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할 때도 일반 과학자와 달리 과학 통해 뭔가 체험한 것은 느낌이 든다.

카파토스 교수
종교가 참과학이다. 종교는 지식보다 단순한 말이나 지식차원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앉아서 호흡을 관하거나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면서 결과가 빠르게 나타난다. 빠르지 않아도 계속 도전한다. 결국 종교가 과학이 도달하는 것보다 더 빠르다. 과학자로서 왜 종교가 빨리 도달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면,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개인적 관계라던가 인간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이다. 현대과학은 고대 가르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고대 가르침이 현대의 양자역학에 의해 옳다는 것이 증명됐다. 종교와 과학의 대화가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친구로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없다.

수불스님
교수님 말씀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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