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큰스님 ㉞ 원로의원 월탄스님

‘불법(佛法)이 어려움을 당하면

당신처럼 몸을 아끼지 않겠다…’

“정화기념관 명연설 없었다면

할복할 마음 내지 못했을 것…”

 

대법원 6비구 할복사건 직전

처음 대면한 청담스님

그날로 하늘같이 따르게 돼

 

“대통령 설득 데모 단식 등

언제 어디서나 앞장섰던 분

‘정화하려 이 땅에 태어났다’는

어른들 말씀은 빈말이 아니었다

 

고속도로 없던 시절

8시간만에 도착한 해인사에서

저녁공양 마치고 108참회

다음날 아침에도 가장 먼저

법당 문 열었던 분 …” 

1960년 11월 대법원 6비구 할복사건의 주인공인 월탄스님. 스님은 청담스님에 대해 “살아있는 보살이었다”고 회고했다.

조계종 원로의원 월탄스님은 1956년 구례 화엄사에서 금오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60년 11월 ‘대법원 6비구 할복사건’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이다.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스님이다. 목숨을 담보로 한 거사는 이후 정화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지난 12월 회주로 주석하고 있는 단양 미륵대흥선사에서 스님을 만났다. 경허스님이 전국에 46개의 선원을 만들어 비구승의 기반을 다진 구한말부터, 정화의 역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비구승의 정통성을 확인한 ‘1955년 8월 제2차 전국승려대회가 유효냐 무효냐’는 관건은 정화운동의 향방을 가를 열쇠였다. 1심은 대처 측이 2심은 비구 측이 이겼다. 1960년 11월24일 최종 심급인 대법원은 2심판결을 파기 환송함으로써 대처 측의 손을 들어줬다. 청담스님을 위시한 비구 측은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11월19일 조계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의지를 다지고 지혜를 모았다. 월탄스님은 해인사 강원 학인대표로 승려대회에 참석했다. “해인사 정화 때도 앞장섰으니 네가 이번에도 힘을 보태야겠다”며 당시 주지 자운스님과 총무 영암스님이 올려 보냈다.

조계사에 모인 대중은 “재판에서 질 게 뻔하다”며 다들 침울했다. 정화기념관 강연이 열렸고 청담스님이 연단에 섰다. 청담스님은 순교자 이차돈의 묘 앞에서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읊었던 한시 구절을 인용했다. “불법(佛法)이 어려움을 당하면 나도 당신처럼 몸을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숙연했다. “순교해야 할 운명이구나.” 직감했다. “순교할 사람 나오라”는 이야기에 6명의 젊은 스님들이 나섰고 월탄스님도 나갔다.

그날 저녁 청담스님이 순교단을 지대방으로 불렀다. “대법원장 앞에 가서 배를 그어야 한다”며 계획을 설명해줬다. 화신백화점에서 30cm짜리 일본도 7자루를 구입했다. 원래는 청담스님도 할복에 동참할 예정이었기에 7자루다. 검은 작업복과 빵모자 등 변장용품도 샀다. 대법원 판결 당일 조계사를 나서는데, 청담스님이 “잠깐 볼일보고 따라갈 테니. 당신들이 먼저 가있으라”며 앞세웠다. 지금의 경복궁 대한문 자리 대법원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대법원장실까지 무혈입성’ 이었다.

집무실 의자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빵모자를 벗고 품안에서 칼을 꺼냈다. “우리는 비구승입니다. 어찌 종교법을 사회법으로 재단할 수 있습니까. 불법엔 대처승 없습니다. 죽음으로 이를 알리려 왔습니다!” 바로 그었다. 처음엔 10cm쯤 칼로 복부를 가르자 피가 구멍 난 호스에서 나오는 물처럼 튀었다. 두 번째는 20cm 가량 좀 더 깊이 갈랐다. 세 번째 칼질을 하고 나서야 드디어 창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때쯤 연락을 받고 다급하게 올라온 경찰이 내리친 곤봉에 맞아 그대로 실신했다. 사흘 밤낮동안 의식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집무실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은 대법원장이 아니었다. 직무대행 체제였고 미리 소식을 듣고 배수관을 타고 도망갔더라는 후문이다. 월탄스님은 “사건을 담당했던 고재호 대법관이 우리를 맞닥뜨렸다”고 증언했다. 월탄스님을 비롯한 순교단은 난동죄로 4개월 간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다행히 “자신을 위협하지도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고 다만 자신들의 의지만 보여줬다”고 고재호 대법관이 법정진술을 해줬다.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지난 2012년 4월10일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통합종단 출범 50주년 기념법회’에서 법문하는 월탄스님.불교신문 자료사진

월탄스님에게 ‘정화’는 불교계의 4·19혁명이다. ‘대처(帶妻)’는 단순한 풍속이 아니라 부조리였고 사찰의 사유화와 권력욕, 승가공동체 파괴 등 모든 악습이 거기서 파생됐다. 정화는 그래서 “정직한 사람들의 도전”이었다. 청담스님은 할복사건 직전에 처음 대면했다. 그날로 “하늘같이 따랐다”고 했다. “인간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보살이었다.” 월탄스님은 “청담스님의 정화기념관 명연설이 없었더라면 선뜻 할복을 할 마음을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대통령 설득부터 데모 단식 등 언제 어디서나 앞장섰던 어른”이라고도 했다. “청담스님이 안 계셨더라면 정화는 정말 힘겨웠을 것”이라며 “정화하려 이 땅에 태어났다는 어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도 들려줬다. 국가최고지도자였던 그의 유시가 정화를 촉발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자신이 믿었던 기독교 교세의 전폭적 확장을 위한 의도적인 분열 획책이었다는 설이 제기된다. 그러나 월탄스님이 보기에 그것은 불교를 위한 진심이었다. 이승만은 1953년 무렵 삼각산에 나란히 자리한 문수사, 경국사, 흥천사(구 신흥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모친이 문수사에서 지극정성으로 기도해 낳은 아들이 바로 그였다.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일본경찰에 쫓기는 그를 숨겨준 절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돼 자신을 도와준 주지 스님에게 감사 표시를 하러 절을 찾았으나 은인은 온데간데 없었다. 무엇보다 빨랫줄에 기저귀가 걸리고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왜놈들이 임진왜란 때 승병에게 당한 복수를 대처승으로 하는구나”라고 탄식했다는 전언이다.

흥천사도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기생파티가 한창이었다. 수행장이 아니라 유흥장이었다. 대처승인 주지를 불러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따지자 “먹고살려면 어쩔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마지막 방문지였던 경국사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정갈하고 엄숙한, 상식 속의 절 그대로였다. 비구승이었던 김보경스님이 주지였다. 월탄스님은 “그가 비구승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전했다. 청담스님을 비롯해 금오 월하스님 등을 경무대로 불러 “내가 도와줄 테니 한국불교를 살려내라”고 독려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은둔수행하던 당대의 고승들이 속속 서울에 모이면서 정화의 불길이 타올랐다. “비구 500대(對) 대처 7000의 싸움이었다.”

월탄스님은 동국대 종비생 68학번이다. 법주사 교무국장으로 일하던 중 청담스님의 종단 탈퇴 선언 소식을 들었다. 총무원장이던 영암스님과 사이가 안 좋았다. 당시 정화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사찰림을 벌목해 시중에 내다파는 ‘산판’을 많이 했다. 종정이었던 청담스님이 제값을 받지 못했다며 볼멘소리가 상당했다. 부랴부랴 상경한 월탄스님은 청담스님에게는 “아무리 서운하더라도 탈종이 말이 되느냐”고, 영암스님에게는 “존경받아 마땅한 어른을 한낱 행정적 실책으로 내쳐서 되겠느냐”고 양비론을 펼쳤다. 청담스님의 탈종 사태는 영암스님의 총무원장 사퇴와 두 달 후 청담스님의 총무원장 재취임으로 일단락됐다.

월탄스님은 단양 황정산 자락에 미륵대흥선사를 창건해 불사에 매진하는 동시에 후학을 제접하고 있다. 다음은 청담스님을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 일화다.

총림 승격 현안 등으로 청담스님은 해인사를 자주 방문했는데, 월탄스님이 시자로 모시고 다녔다. 고속도로가 없던 시절이다. 김천까지 기차로 가서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오전9시에 출발하면 오후5시에 도착했다. “저녁공양을 먹고 나면 젊은 나도 녹초가 되는데, 스님은 그 길로 법당에 올라가 108참회를 했다. 다음날 아침에도 가장 먼저 법당 문을 여는 이는 청담스님이었다. 청담스님에겐 수행과 행정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었다.” 당신이 여든이 되도록 컨테이너박스에서 숙식하면서 대중과 함께 용맹정진을 하는 이유다.

[불교신문3172호/2016년1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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