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현 전집(1, 2권)

이동순 엮음소명출판

일제 식민통치 굴하지 않고

총독부 검열로 삭제당한 시

몇 개월후 다시 싣는 대범함

 

독립운동가이자 아동문학가

민족의 미래는 아이들에 있다

“시심과 불심과 동심은 하나”

 

■ 조종현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소설가의 부친인 조종현 선생은 1906년 전남 고흥서 출생, 1922년 2월24일 순천 선암사에서 금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부산 범어사 전문강원을 마치고 1928년 1월, 대구 동화사에서 운허, 청담스님과 함께 전국학인대회를 개최했으며, 조선불교학인연맹 기관지인 <회광>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29년 잡지 <불교>에 시조 ‘정유화(庭有花)’를 ‘석범’이란 필명으로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자정의 지구> <의상대 해돋이> 등 4권의 시조집을 발간하고 1960년 이태극과 <시조문학>을 창간하는 등 근현대 시조문학의 부흥을 이끌었다.

불교개혁운동에도 앞장서 1931년 발기한 조선불교청년대회에서 임시집행부 서기 및 제정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만해스님이 이끌었던 불교비밀독립운동 조직인 만당 재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46년 서안사 주지로 부임했으나 환속, 1948년 광주제일고 교사와 동국대 이사 등 교육자로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조선불교를 지킨 승려로, 시조시인이면서 동요작가로, 교육자로 살다가 1989년 별세했다.

1983년 설날을 맞아 둘째 아들 조정래 소설가(사진 오른쪽)와 함께 한 조종현 선생(왼쪽). 조종현 선생은 일제강점기 민족의 미래를 아동에서 찾았으며, 많은 동요와 시조를 남겼다.

일제강점기 ‘아동 문학’을 화두로 활동한 대표적 인물로 소파 방정환 선생을 꼽는다. 또 한 사람, 스님으로 교육자로 민족운동가로 살면서 해방된 미래를 위해 아동문학과 시조에 헌신했던 사람이 있다. 불교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조종현 선생이다. 조종현 선생의 일대기와 작품을 엮은 <조종현 전집> 1, 2권이 이동순 조선대 교수에 의해 출간됐다.

 

“감을감을 조르시는 부처님눈은/ 우리애기 젖줄때 엄마눈같소// 방긋방긋 웃으시는 보살님입은/ 말슴할 때 웃으시는 엄마입같소.”(엄마같소, 1931.1.2 ‘불교’)

“아츰일즉 일어나/ 방치우고 밥먹고/ 책보싸서 들고는/ 달낭달낭 가지요/ 유치원에 가지요// 유치원에 가다가/ 게름방이 동무들/ 길가에서 만나면/ 눈곱작이 재질질/ 세수조차 안햇소.”(게름방이 동무들, 1930.2.13 ‘조선일보’)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동요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던 조종현 선생의 마음이 전해진다. 선생이 살아온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시대에 순응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했다. 일제 사찰령을 거부하고 불교 개혁과 대중화 운동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불교독립운동 조직이었던 만당의 자금을 담당했다.

선생은 또한 문인이었다. 동요를 통해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의 앞날에 희망을 주고자 했으며, 정인보 이병기 이은상 최남선에게서 시조를 배우고 1920년대 시조부흥운동을 이었다. 민족의 정서와 가락을 시조에 담고자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 문화유산을 소재로 민족의 기개를 보이는 시조를 다수 썼는데 그중 한편이 ‘보신각종’이다. 잡지 <동광>에 보냈던 이 작품이 일본 총독부 검열에 걸려 삭제되자, 몇 달후 <동광>에 그대로 시를 다시 싣는 대범함도 보였다. 이 책을 엮은 이동순 교수는 “조종현 선생은 홍화문, 육사, 충무공추모 등 작품을 통해 일제시대 항일의식을 드러내며 민족의 해방을 염원했다”고 평했다.

“가난이 흐느끼어/ 물결치는/ 이 거리// 넓은 행주치마/ 애화가 구름 일듯/ 갈수록/ 명경알같은/ 새빨간 가난살이// 한 삼동 겨울밤을/ 문풍지와 같이 떨고// 하루 한 끼/ 비질망정/ 이밥도곤 부러웠다…물같은 백성이란/ 있을 수/ 없는 오늘// 말 없이/ 앞서 가는 폼/ 사자보다 무섭지.”(봄하늘 아래. 시집 ‘자정의 지구’) 해방 후 민족에게 닥친 시련은 한국전쟁이었고, 뒤이은 가난이었다. 격변의 시기를 살면서도 조종현 선생은 ‘백성’을 향한 따스한 시선을 놓지 않았다. 이는 불교학을 전공하고 스님으로 살았던 그의 삶에서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조 선생은 주로 연시조를 발표했는데, 한가지 주제를 집중적으로 형상화한 창작법이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그의 시조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의상대 해돋이’다.

“천지 개벽이야! 눈이 번쩍 뜨인다/ 불덩이가 솟는구나 가슴이 용솟음친다/ 여보게! 저것 좀 보아 후끈하지 않는가.”(‘의상대 해돋이’ 전문)

이동순 교수는 “동해의 해돋이 광경을 직관으로 포착해 순간적으로 폭발시킨 이 감각 앞에서 더 이상 수사가 필요하지 않다. 이 시조가 성속일여의 단순하고 간결한 청빈, 이것이 바로 깨달음(覺)의 순간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시심과 불심과 동심이 하나인 순간”이라고 해설한다.

1960년 이후 조종현 선생은 시조와 불교에 헌신하는 삶으로 일관했다. 불교문화예술원을 발족하고 이사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조계종 고시위원, 동국대 이사, 공주 마곡사 전문강원 원장, 불교통신대학원장 등을 역임하며, <관음경>을 번역 출간했다. 그의 불교에 대한 열정은 여러 기고문과 산문에서, 문학에 대한 열정은 332편의 시조와 동요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신미년 겨울 나는 선생을 청진동 숙소로 찾아뵈었었다. 그 때 선생은 <불교>사 시절, 춘추는 53세, 내 나이는 26세 때였다. 무슨 용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찾아뵈옵고 싶어서다. 선생의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이마가 설정하고 냉기가 온몸을 엄습했다. 방안에는 책상 하나, 메모 용지는커녕 펜대 한 개도 없었다. 책 한권도 눈에 띄지 않고 말쑥했다. 참고 도서 한권 없이 어떻게, 어쩌면 그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선생은 우박같은 머리에서 글이 쏟아지고, 샘솟듯 가슴에서 글이 솟는가 보다.”

만해스님을 찾았던 기억을 조종현 선생은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 그 기상을 평생 동안 마음에 담아가며 문학인의 삶을 지향했다.

[불교신문3172호/2016년1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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