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y자형태의 물길이 시야에 잡혔다.

학의 날개바람에 끌려온 학의천이 안양천에 이르러 이윽고 몸을 섞는 자리였다.

극락정토의 뜻을 새긴 안양(安養) 땅에는 감로수가 흘러야 제격이었다.

물살이라도 급하면 속이 좀 후련해질 텐데….

가슴속에서 똬리를 틀던 지루한 싸움이 가르마를 타지 못한 채 흙탕물처럼 뒤섞였다.

내 넋두리를 들어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 나는 시간의 힘을 생각했다.

그 힘은 전생의 뿌리로 현생의 꽃을 피워내며 윤회의 향기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없이 걸었다. 구두가 질컥질컥 물기를 게워냈다. 세 시간 후 양재동에 당도했다.

체중이 쭉 빠지고 몸피가 절반쯤 줄어든 느낌이었다. 발바닥이 쓰렸다.

물집이 터진 모양이었다. 새벽이 퍼렇게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아내가 깨어있었다.

한밤중에 어딜 갔었냐고 물었다. 먼 여행을 다녀왔다고 속으로만 말했다. 

삽화=용정운

바람이 느리게 불었다. 풀이파리들이 덤불 사이로 드러누웠다 천천히 일어섰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으나 아직 저녁의 서늘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6월말의 학의천을 감싸는 눅눅한 공기가 긴 가뭄 끝의 장마를 예고하고 있었다. 팔뚝만한 잉어들이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다리 밑 어둑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불룩하게 배를 내밀어 올린 무지개다리는 천변 양쪽의 산책로를 이어주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백로 한마리가 물속을 노려보았다. 낚아채기엔 잉어의 몸피가 부담스러울 것이었다. 새가 큼지막한 날개를 한차례 펼쳤다. 흰 가운을 휘둘러 입는 실험실 연구원의 동작이 눈앞에 스쳤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뜬금없는 영상을 털었다. 새의 겨드랑이에서 빠져나온 깃털 하나가 완만한 미소를 그리며 바람 위에 올라앉았다. 한쪽 다리만을 물속에 담근 새는 다시 명상에 잠긴 듯 정물로 굳었다. 머리에서 미끄러진 곡선이 새의 어깨를 타고 휘어져 내려와 물속으로 빨려들었다. 병목이 긴 조선백자를 수면 위에 세워놓은 모습, 반짝거리는 물비늘은 동양화의 배경으로 충분했다. 사위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여기가 도심을 적시고 지나가는 냇물이 맞나. 풀 깎는 기계음을 듣지 못했다면 백일몽으로 착각할 법도 했다. 그 소리는 베어진 풀잎의 단면에서 빠져나온 초록 비린내와 버무려져 다리를 건너왔다. 다리 위로 올라서자 맞은편 아파트의 창문에 반사된 누런빛이 내 동공 안으로 들어왔다. 시선을 내리자 빛이 엷어지면서 붉게 변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y자형태의 물길이 시야에 잡혔다. 학의 날개바람에 끌려온 학의천이 안양천에 이르러 이윽고 몸을 섞는 자리였다. 극락정토의 뜻을 새긴 안양(安養) 땅에는 감로수가 흘러야 제격이었다. 물살이라도 급하면 속이 좀 후련해질 텐데…. 가슴속에서 똬리를 틀던 지루한 싸움이 가르마를 타지 못한 채 흙탕물처럼 뒤섞였다. 내 넋두리를 들어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방문의사를 알렸을 때, 병구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워했지만 그가 목소리를 고음으로 바꿔 너스레를 칠수록 나는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형이 3년 전에 회사를 때려치우고 시작한 도예공방 개업식에 가보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통화는 했지만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오랜만에 형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나는 돈 떼먹은 놈처럼 주눅이 들었다. 웃음 섞인 그의 호탕한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한 뒤에도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다. 내가 비실거릴 때마다 형은 멘토역을 자임했다. 생물학과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자 형은 내게 컴퓨터기술을 제대로 익히라고 충고했다. 따로 익히고 말게 없었다. 어차피 밥 먹고 노는 게 그거였으므로. 덕분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생체인식기술을 공부했다. 그래봐야 대학원은 지방대출신에게 취업스펙을 쌓기 위한 도피처에 불과했다. 괜찮으니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해보라는 아버지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7급으로 퇴임한 전직공무원의 빠듯한 연금에 숟가락을 얹을 수는 없었다. 반복된 입사지원이 이어졌지만 어디서도 연락은 없었다. 만화방과 피시방을 맴돌던 나를 건져준 사람이 바로 병구형이었다. 자기가 다니던 제약회사에 아로마테라피제품을 생산하는 부서가 생겼다고 했다. 그 회사는 오히려 치약이나 화장품 같은 의약외품으로 불황타개의 돌파구를 찾는 모양이었다.

“IT기술 가진 생물학전공자가 어디 흔하냐. 잔말 말고 원서 내, 전망 있는 회사니까.”

복음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휴대폰에 뜬 형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가슴에 뜨거운 것이 고였다. 고등학교 2년 선배인 형이 까마득히 높아보였다. 턱밑에 매달린 살주머니에 까만 수염이 빽빽하고 오크통같이 튀어나온 형의 배는 고등학교 시절 이후 변함이 없다. 아담한 키에 단이 올라간 헐렁 바지를 걸친 우스꽝스런 외모도 그대로다. 하지만 달마대사 같은 짙은 눈썹에 카리스마가 박혀있다. 눈썹 밑을 바짝 추격하는 깊고 아늑한 눈길은 그가 얼마나 진지한 인간인지 설명해준다. 형은 화학과를 졸업했다. 그 회사가 형의 첫 직장이었다. 전공을 얼마나 살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형은 경비원까지 합해봐야 50명도 안 되는 회사를 십년도 넘게 다녔다. 그가 팀장이 되어 개발한 프로젝트가 히트를 쳤고 회사는 그의 아로마테라피 제품으로 재미를 보았다. 그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도예에 빠져있었다. 퇴근 후에는 언제나 공방으로 향했다. 회식에 자주 빠지는 이유였다. 흙을 만질 때 그는 무아지경에 빠져든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가 자기 발로 회사를 나온 이유가 그의 유일한 취미 때문이랄 수는 없었다. 그는 줄기차게 이어지는 회사의 신상품 개발요구에 숨이 막혔단다. 향수는 원래 유행에 살고 바람에 죽는다. 소비자는 계절마다 새로운 대안을 요구한다. 회사는 소비자에게 새로운 효능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고 냄새와 상품명을 바꿔가며 장단을 맞춰야했다. 냄새로 병을 치유하는 건 어차피 한계가 있었다. 같은 제품이 오래 사용될 수 없는 이유였다. 먹는 수면제를 대신해줄 아로마향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았다. 부서 통폐합 소문이 나돌 무렵 형은 회사를 그만두었다. 며칠 전 형에게 뜬금없이 연락을 한 것도, 그 당시 그가 느꼈을 고통이 문득 내 가슴 언저리를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런 공감의 포장지 속에 숨겨둔 얄팍한 기대가 있었다. 변비처럼 막혀버린 나의 프로젝트에 선임자의 축적된 노하우가 관장약이 될 지도…. 대학시절, 같은 캠퍼스에 다니던 나를 만나면 형은 언제나 자장면을 사줬다. 그는 식성도 좋아 나무젓가락을 쪼개기 전에 허리띠부터 풀었다. 후각신경이 유난히 예민한 나는 꼬부라진 면발보다, 랩을 뜯어내는 순간 훅 올라오던 춘장의 냄새를 먼저 기억한다. 못 본지 3년 만에 새삼스럽게 나는 그의 자장면이 먹고 싶어진 것이다.

천변 산책로를 빠져나와 언덕길로 올라섰다. 병구형이 가르쳐준 신축아파트단지 입구가 보였다. 그가 나를 기다리는 도예공방은 아파트 단지 내 상가의 지하였다. 병구형 말로는 6.25 전까지만 해도 후백제시대에 지어진 제법 큰 절이 이 동네에 있었단다. 그러니까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가 한때 절터였던가 보았다. 침침한 복도 끝에서 형의 공방을 발견했다. 출입문에 걸린 전생(前生)도예라는 간판이 딱 손바닥만 했다.

“밥은 먹었냐?”

첫마디였다.

“밥생각 없어”

“짜장면 시켜주랴?”

오랜만에 먹는 자장면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고량주를 소주잔에 거푸 따라 마시며 군만두를 으적으적 씹었다. 요즘 회사 굴러가는 사정을 대충 털어놓았다. 취기에 약간의 과장도 덧붙여졌다.

“야이 빙신새꺄. 너라도 잘 버텨야 할 거 아니냐.”

형은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는 것 같았다.

“버틴다고 나를 사장시켜줄 것도 아니고 그 회사에 뼈 묻을 일 있나 뭐.”

“제수씨 홀몸이 아니라며.”

갑자기 술기운이 확 날아갔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나의 믿음에 그녀도 합의를 해준 줄 알았다. 아니었다. 내년이면 마흔, 언제 잘릴지 모르는 신세에 아빠라니. 자신이 없었다. 6주째라고 했다. 아내는 들떠있었다. 일곱 살이나 많은 나를 만나 남몰래 공을 들인 결과려니 했다. 그녀는 쇼핑에 열을 올리고 있다. 태어날 아이를 위한 물건들이 늘어나고 책꽂이의 빈 공간은 육아관련 도서로 채워진다. 우리부부가 기르는 강아지, 효리는 슬슬 아내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럴수록 녀석은 내 품으로 파고든다. 녀석이 내 코를 핥았다. 쉰내가 싫지 않았다. 양팔사이에서 고물거리는 조그만 생명체를 꼬옥 껴안았다.

“애고 내 새끼.”

아내의 흘긴 눈이 내 뒤통수를 간질거렸다. 그녀가 이젠 학습지교사도 그만둘 태세다. 부어오르는 발을 구두에 억지로 꿰며 아파트 동 사이를 뛰어다니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넉넉해진 몸무게가 내게로 옮겨와 허리춤에 매달렸다.

“지울까?”

빈말인 줄 알고 있었다. 희번덕 돌려 뜨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본심을 보았다.

“네가 엄마 맞니?”

나도 본심은 아니었다.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으로 옮겨주길 바랐을 뿐. 아내와 다투고 나면 병구형의 동그란 얼굴이 쑥스럽게 떠올랐다.

아내는 한때 병구형의 부하직원이었다. 형이 사귀어보라고 했을 때 그녀의 세련된 매너가 눈길을 끌었다.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회식 후 함께 들어간 모텔에서 나는 그녀의 체취에 홀렸다. 화장품이나 샴푸냄새와는 달랐다. 원시의 생명력이 그녀의 땀내에 섞여있었다. 거부할 수 없었다. 불 꺼진 모텔방의 어둠보다 짙은 생머리와 깊은 골짜기를 타고내리는 물비린내를 기억한다. 병구형이 회사를 나간 다음 날 팀이 해체되었다. 영업부로 재배치된 그녀는 슬며시 사직서를 냈다. 나와 결혼식을 올리고 해가 바뀐 뒤였다. 내가 먼저 던질걸 그랬나,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고 있을 때 사장의 호출이 있었다. 그는 내가 아직 쓸모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줬다. 동요하지 말고 신제품개발에 동참해 달라. 부탁과 명령의 중간쯤에 그의 눈빛이 걸려있었다. 사장은 작년에도 자사의 아로마제품이 시장에서 소멸되는 것을 맥없이 지켜봐야했다. 뒤늦게 출시된 대기업의 유사품에 밀린 탓이었다. 먹이사슬의 한 귀퉁이에서 먹힌 자의 귓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특허를 도둑맞은 거야. 그의 고함이 회의실 유리창에 부딪쳐 공허하게 부서져 내렸다. 그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이를 갈았다. 그는 다시 시작한 아로마프로젝트에 나의 IT기술이 접목되길 원했다.

 

“너도 이거 해볼래? 괜찮은 취미야. 주무르다보면 걱정이 사라지지. 흐흐.”

갑자기 곰팡이 핀 벽지냄새와 옛 무덤 속 같은 차고 습한 흙내가 훅 끼쳐왔다. 형한테서 나는 냄새였다. 그것은 형의 신비로움을 증폭시켰다. 범상치 않은 아우라가 형의 둥그런 몸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그것을 나는 홀아비냄새라고 놀렸다. 총각으로 늙어가는 형이 딱하기도 했으나 그의 자유가 부럽기도 했다. 자유는 내게 자신감과 동의어였다. 입사 후 부서배치를 할 때 형은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선배들에게 내 후각을 치켜세웠다. 이 자식 개코야. 자신이 맡은 아로마개발팀에 적임자라는 의미였다. 나는 우쭐해졌다. 드디어 내 코가 제 값을 해줄 것 같았다. 나는 열과 성을 다했다. 형이 회사를 떠난 뒤에도 나는 살아남아야했고, 그리고, 인정받고 싶었다. 때마침 기발한 아이디어가 내 심장을 마구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뉴욕으로 출장 갔던 동료가 가져온 선물이 내 눈으로 성큼 들어왔다. A사에서 만든 그 전구는 빛의 색을 자유자재로 섞어 원하는 색상을 만들어냈다. 수천가지 조명이 그 자리에서 연출되었다. 스마트폰 어플과 연동되는 방식이라서 화면의 무지개 그림위로 손가락만 움직이면 실내분위기는 언제든 바꿀 수 있었다. 인터넷과 연결하면 와이파이 안테나와 교신하며 원거리작동도 가능했다. 나는 제안서를 올렸다. 빨강 파랑 녹색의 삼원색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원하는 빛을 만들듯, 향기 또한 그럴 것이다. 멋진 가설이었다. 제안은 곧 채택되었다. 그러나 기본이 되는 향의 원액을 찾아내는 일이 문제였다. 수백 번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실패라 부르지 않았다. 실패하는 이유를 더 많이 알게 되었으니 성공확률은 상대적으로 더 높아진 것 아니겠나. 오너의 기대와 연구비도 아직 남아있었다. 2년 동안의 허무를 딛고 나는 드디어 어떤 향기로든 바꿀 수 있는 원액을 만들었다. 이제 그것을 어떻게 합성하면 순식간에 원하는 향기로 피워낼 수 있는 지만 알면 되었다. 다시 지루한 실험이 반복됐다. 나는 서서히 지쳐갔다.

 

“형, 이거 돈 돼?”

“밥은 먹지”

형은 내 눈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온 김에 구경이나 하고 가라.”

작업테이블 위엔 물기 머금은 흙덩이들만 퍼질러놓은 소똥처럼 놓여있었다. 두꺼운 베니어합판에 각목 네 개를 대충 박아 만든 작업대의 모양새가 형의 솜씨다웠다. 테이블 주변으로, 낮 동안 동네 여자들과 그들이 데려온 꼬맹이들이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을 동그란 플라스틱의자들이 보였다. 그것들을 지나 구석으로 몇 발자국을 옮겼다. 장독만한 전기가마가 보였다. 벽에 붙은 선반 위에서는 소품들이 마르는 중이었다. 조만간 유약을 입혀 구워낼 물건들이었다. 정말 이런 걸로 밥이 될까 궁금했지만 형의 둥그런 얼굴에 자신감이 묻어있었다. 후광이 보이진 않았으나 그걸 득도한 자의 행복이라고 부른다면 반박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형이 선반을 벽 쪽으로 밀었다. 벽이 묵직하게 회전하며 뒤로 밀렸다. 공부방만한 공간이 동굴처럼 나타났다. 푸르스름한 불빛이 창문 없는 지하방의 어둠을 힘겹게 쫓아냈다. 천정에 붙은 전구는 화장실에서나 켤 법한 20와트 정도였고 바닥은 그냥 흙이었다. 시야가 어둠에 적응하자 방의 중앙에 놓인 물레가 나타났다. 그런데 요즘의 전기물레가 아니었다. 통나무를 깎아 만든, 그야말로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걸 돌리자면 발로 원통을 비스듬히 차야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지하상가복도는 잊어도 좋을 만큼 적요했다. 오기 전에 형이 전화로 해준 말이 생각났다. 이 근처가 옛날에 도자기를 굽던 가마터였대. 땅을 파면 아직도 사금파리들이 나와. 승려들이 절간에서 쓰는 그릇들을 직접 만들었나보았다. 고층아파트와 절터가 엉뚱한 조합인 듯했지만 호기심은 접기로 했다. 형이 물레 앞에 놓인 통나무 걸상 위로 올라앉아 시범을 보였다. 그가 오른 발로 아랫부분을 찼다. 물레가 돌기 시작했다. 그가 중심에 놓인 수박만한 흙덩이에 물을 축여가며 천천히 쓰다듬었다. 흙이 뾰족하게 올라갔다가 윗부분을 사선으로 밀면 다시 뭉툭하게 내려오곤 했다. 그런 동작이 열 번쯤 반복됐다. 반죽이 완성된 흙덩이는 원뿔형태가 되었다. 그는 윗부분을 두 손으로 쥐듯이 감싸면서 두 엄지손톱을 중심부에 맞대고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그가 양손을 벌리자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고르게 반죽된 회갈색 흙이 넓적한 대접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모든 생명은 흙에서 나온다고 그가 말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주장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의 지나치게 진지한 표정에 머쓱했지만 다양한 형태가 흙에서 태어나는 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형태가 존재를 지배하지.”

그는 거창한 의미부여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처한 삶의 형태가 나의 존재가치를 규정하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해볼래?”

형이 비워준 자리에 기꺼이 앉았다.

“내가 문 열기 전까지 나오지 마라. 오늘 해보고 할 만하다싶거든 자주 와라. 나도 너 같은 조교가 필요하거든. 교육비는 반으로 깎아줄게, 너니까.”

형이 나가고 묵직하게 문이 닫혔다. ‘너니까’라는 마지막 말이 벽에 부딪히며 동굴 속처럼 여러 번 울렸다. 냉기가 뒷목으로 스며들었다. 갇힌 자의 공포가 목털미의 솜털사이로 기어 다녔다. 침을 꼴깍 삼키고 마음을 다잡았다. 형이 하던 식으로 흙을 쓰다듬었다. 아무 거라도 좋으니 그릇을 하나 만들고 싶었다. 물레를 찼다. 원뿔형태가 쉽지 않았지만 손바닥에 전달되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은 만족스러웠다. 오감은 서로 통한다더니, 촉각의 예민함이 후각으로 옮겨졌다. 콧구멍으로 들어온 흙냄새가 내 몸의 실핏줄을 타고 돈다고 느꼈을 때였다. 문득 온몸의 피부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고량주 탓인가 싶었으나 취기와는 달랐다. 내 몸이 어딘가로 옮겨지고 있었다. 청소기의 긴 파이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박동이 빨라지고 심장이 곧 터질 것 같았다. 잠시 후, 토굴에서 빠져나온 듯 갑자기 사위가 밝아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숲으로 에워싸인 공터였다. 당장이라도 검객이 시퍼런 칼을 겨누고 튀어나올 듯 서걱대는 숲에서 서늘한 바람이 빠져나왔다. 눈을 들어올렸다. 대숲 뒤를 병풍처럼 둘러싼 수직의 절벽이 아스라이 높았다. 창처럼 뾰족한 바위산 끝에 구름이 꿰어있었다. 대낮의 하얀 달덩이가 구름사이로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 어딘가에서 돌 틈을 돌아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들려왔다. 바투 다가온 바위 그늘이 기다란 황토무덤 위에 누워 있었다. 내가 조금 전에 빠져나온 그것은 도자기를 굽는 가마였다. 내가 그 속을 어떻게 걸어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불이 꺼져있었지만 아직 열기가 홧홧하게 느껴졌다.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샌 초로의 사내가 가마에서 구워진 도자기를 꺼내고 있었다. 거대한 짐승의 그을린 입을 벌려 하얀 이빨을 하나씩 뽑아내는 것 같았다. 그는 나의 접근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나 역시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눈엔 내가 보이지 않는 것도 같았다. 그의 몸에서 탄내와 쉰내가 섞여서 풍겨왔다. 흙과 검댕으로 얼룩진 사내의 삼베옷 등줄기가 땀으로 축축했다. 그에게 몇 걸음을 더 다가갔다. 그 순간, 심장이 쑥 빠져나가는 놀라움과 흥분이 달려들었다. 눈에 익은 모습, 그는 바로 나였다. 마르고 각진 턱에 희멀건 얼굴, 내가 틀림없었다. 이마와 목에 주름이 많은 그가 나보다 스무 살은 더 먹어 보였으므로 동시간대의 유체이탈이랄 수도 없었다. 말하자면, 나는 몇 백 년 쯤 거슬러 나의 전생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도자기들을 돌려가며 살펴보다 나무망치로 두들기곤 했다. 깨진 그릇들이 한쪽 구덩이로 던져졌다. 찌푸린 표정으로 보아 그가 원하는 작품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때 동료로 보이는 작달만한 사내가 다가왔다. 짙은 눈썹에 구레나룻이 얼굴의 반을 차지한 그도 눈에 익었다.

“그래봐야 왜놈들 좋은 일만 시켜주는 건데 뭘 그리 자세히 봐.”

구레나룻이 핀잔을 놓았다.

“지난 번 물건이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던데….”

도자기를 꼼꼼히 살펴보던 사내의 입에서 긴 숨이 빠져나왔다.

“우리가 이곳에 끌려온 뒤로 성주(城主)놈 눈만 높여놓았지 뭔가.”

“제대로 된 것을 이번에도 내놓지 못하면 내 목을 내놓으라더군.”

“소용없네. 귀신이 감탄할 물건을 만들어주면 그놈이 만족할 것 같은가. 그래봐야 조만간 더 나은 걸 빚어내야할 걸세”

또 다시 청명한 망치소리가 텅 빈 가마 속을 훑고 들어갔다. 참나무 숯에서 나오는 건조한 탄내가 나의 비강에 도달했다. 내 몸에서 다시 열기가 느껴졌다. 향 타는 냄새에 눈을 떴다. 물레가 있던 방이었다. 병구형이 상기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인도에서 가져온 침향(沈香)으로 만든 건데 어떠냐?”

“어떻긴 뭘, 내게 마약이라도 먹인 거야?”

“네가 못 돌아 올까봐 걱정했어.”

형은 내 손에 열쇠 하나를 쥐어줬다.

“아무 때나 와서 흙냄새를 맡아라. 감각의 문이 열리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법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난 네 열정이 부럽다.”

내가 눈썹을 세우자 형은 한숨 끝에 떫은 입맛을 다셨다.

“그 문은 너 같은 사람에게만 열려. 뜨거운 소망을 품은 인간 말이야.”

알쏭달쏭했지만 이번에도 그가 나의 멘토가 되어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회사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날 본 전생의 내가 머릿속에서 망치질을 했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 손으로 빚은 도자기를 깨뜨렸다. 상상의 그릇이 깨질 때마다 내 가슴에도 균열이 생겼다. 그러던 중에도 우리 팀의 아로마프로젝트가 거의 완성단계에 와있었다. 우리는 잉크제트프린터 방식을 벤치마킹했다. 세 가지의 원액이 컬러프린터의 카트리지에서 컴퓨터가 지시하는 대로 섞이는 작동원리였다. 우리가 개발한 화학물질이 짜맞춰놓은 공식대로 뿜어져나가게만 하면 되었다. 내 후각이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눈만 감으면 아카시아와 프리지아의 하얗고 노란 입자들이 나비처럼 떠다녔다. 바닷가의 그림이 나오면 갯내음이 나도록 섞어지고 꽃밭이 나오면 꽃향기를 풍기는 공식, 그것을 명령어로 만들었다. 그걸 스마트폰 앱으로 바꿔 명령체계를 세워주는 건 별로 어려운 기술이 아니었다. 빛이 보였다. 사장은 서둘러 특허신청을 했다. 내 손을 떠난 기술은 결국 회사소유가 되었다. 사장은 부장을 시켜 우리 팀원들을 룸살롱으로 초대했다. 짧은 천조각을 골반에 걸친 여자들이 내 코앞에 젖가슴을 내밀었다. 진한 화장품냄새가 탄소에 훈제된 코냑의 향을 몰상식하게 희석시켰다. 부장의 정성어린 배려로 이차를 나갔다. 나는 아침이면 기억할 수 없는 여자의 몸속에 특허에 대한 집착을 사정해버렸다. 다음날, 병구형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았다.

“미련을 버려. 이번 프로젝트가 상품화에 성공하면 더 큰 압력이 닥칠 거야.”

경고였다. 스마트폰으로 일일이 향료를 조종하는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카트리지를 부착한 TV가 그림에 어울리는 향기를 자동으로 뿜는 기술, 바로 그것을 회사가 요구할 거라는 뜻이었다. 그거야말로 대형프로젝트였다. 화면에는 꽃그림만 뜨지 않을 건 빤한 일. 범죄영화에서 희생자의 시신이 하수도에서 발견된다면 시청자는 유기물이 썩어가는 냄새를 맡을 것이다. 아마도 그 땐 요리프로그램이 상종가를 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 맛보는 요리가 될 테니까. 세상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 기술력이란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앞으로만 달린다. 내가 개발하지 않아도 누군가는 연구실에서 오늘도 밤을 새울 것이다.

“이용당하다 버려지고 싶지 않거든 네 삶의 형태를 스스로 잘 정해야해.”

형이 꾹꾹 눌러 강조했다. 이번엔 그 뜻을 조금 더 알 것 같았다. 굳이 내가 일회용품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상품화 단계 직전, 최종테스트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정상이 보일 때쯤이었다. 시제품테스트에 참가한 일반인들의 반응이 회를 반복할수록 부정적으로 굳어졌다. 향기가 왠지 부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인공조미료를 잔뜩 넣은 찌개 맛 같다고 했다. 말하자면 소비자들은 원시가 살아있는 천연의 향을 그리워했다. 바나나우유에서 나오는 냄새가 아닌, 막 껍질을 깐 바나나의 향기를 원했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원액을 다시 찾아내야했다. 소비자반응에 대한 최종보고서를 받아들었다. 지난 3년의 노력이 움켜쥔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격려가 내겐 잔인했다. 퇴근 길 차 안에서 운전대를 끌어안고 혼자 울었다. 살아있는 향기…. 절실한 열망이 내 심장 속에서 야생마의 발굽소리를 냈다. 회사의 프로젝트는 이미 내 관심의 중심축을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기어이 감각의 문을 열고 싶었다. 병구형의 조교? 아니, 나는 뭐라도 할 용의가 있었다. 그 향기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을 바쳐서라도….

그날 밤 집을 나섰다. 이 밤중에 어딜 가느냐는 아내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전생도예의 문을 열었다. 그곳은 이미 나의 해방구였다. 형이 퇴근한 빈 작업실이 허허로웠다. 벽을 밀어 물레가 기다리는 방으로 곧장 들어갔다. 형의 침향에 불을 붙였다. 시간여행 가이드가 되어줄 터였다. 흙덩이를 올려놓고 물을 적셔가며 물레를 찼다. 물레가 돌고 내 손바닥에 흙의 부드러운 감촉이 달라붙었다. 태고의 흙내가 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빗방울이 마른 마당을 두드릴 때 올라오는 비린내 같은 거였다. 그것은 모든 생명을 싹틔우는 냄새였다. 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나는 다시 긴 터널을 통과하여 장작을 넣는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이번에도 나를 닮은 사내가 망치로 도자기를 깨고 있었다. 산목숨을 자른 듯 쪼개진 파편들이 날카로운 금속성을 질러댔다. 맞은편에 서서 흙을 밟아 반죽하던 구레나룻이 끼어들었다.

“이봐 그렇게 다 깨버리면 뭘 내놓을 거야?”

“파괴가 두려우면 어찌 걸작을 만들겠나.”

“그걸 만들어 뭐하려고. 감춰뒀다 발견되는 날엔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랄 걸.”

나는 도공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미간을 세울 때마다 그의 갈등이 내게 날것으로 전달되었다. 최고의 예술품을 만들고 싶은 욕망과 그걸 만들면 자신에게 불행이 닥칠 거라는 예감, 그 사이에서 그는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최고품이란 일생에 단 한번만 나오는 것이므로, 그 후에도 그런 물건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면 목숨을 내놓아야한다. 최악의 상황에서 단 한번 사용될지 모르는 그 능력, 그것이 형태를 갖추는 순간 불행은 시작된다. 그럼에도 그는 기어이 자신의 걸작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나는 깨지는 도자기의 단면에서 튕겨져 나온 흙냄새를 맡았다. 불속에서 태어난 목숨이 온기를 내주고 죽어가는 냄새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냉장고를 열었다. 새벽 세 시였다. 당근, 양파, 고추, 감자, 대파, 마늘, 자를 수 있는 것을 모두 꺼냈다. 식칼을 들었다. 당근을 자른 단면에 코를 찔렀다. 역시 당근주스에서 나던 냄새와는 달랐다. 이번엔 양파를 두 쪽으로 베었다. 강렬했다. 눈물이 났다. 효리가 재채기를 하며 주위를 맴돌았다. 마늘의 단면은 내 욕망에 더욱 거칠게 저항했다. 고추를 베었다. 청량고추의 매운 향이 후각을 할퀴었다. 감자의 단면에서 나온 즙이 뽀얗게 작은 방울로 맺혔다. 내가 흘리는 식은땀처럼. 이번에는 계란을 깨뜨렸다. 껍질을 깨지 않고는 칼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칼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고는 생명을 감지할 수 없었다. 코끝에 노른자가 걸쭉하게 들어붙었다. 상큼한 비린내, 어린 목숨의 젖내였다. 나는 잘 갈린 칼날과 효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느닷없는 충동이 일었다. 몸서리를 쳤다.

 

다음날 점심시간, 새싹비빔밥을 주문했다. 갓 돋아난 싹들이 어금니 사이에서 으깨졌다. 씹을 때마다 톡톡 터지는 감촉과 함께 상큼한 물기가 배어나왔다. 어릴수록 생명의 향이 강했다. 덜 익은 감이 가지를 꽉 붙잡고 있듯이 덜 떨어진 놈들일수록 저마다의 시원(始原)에 집착한다. 원시의 냄새가 드디어 손에 잡힐 듯했다. 견디기 힘든 욕구에 진저리를 쳤다. 퇴근 후 꽃가게를 들렀다. 장미 백송이를 샀다. 아직 덜 벌어진 봉오리들이었다. 오랜만에 아내가 잇몸을 드러내 웃었다. 임신 5개월째, 볼록해진 배를 내밀고 뒤늦은 축하를 받는 표정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아내의 배에 눈이 갔다. 잠들 수 없었다. 확실하게 짚이지 않는 욕망이 악몽처럼 목을 조여 왔다. 아내가 잠들자 나는 다시 냉장고에서 야채들을 꺼내 자르기 시작했다. 파괴는 창조의 다른 이름이었다. 집을 짓는 행위도 결국 나무를 베고 돌을 깨고 땅을 파헤치는 파괴로 시작된다. 소나무를 잘라보지 않으면 송진의 파릇하고 눅진한 단내를 어찌 알겠는가. 문득 붉은 장미가 떠올랐다. 더 이상 미룰 순 없다. 가슴속에 달궈진 쇳덩이가 식기 전에…. 아내가 거실 화분에 꽂아둔 꽃다발을 뽑아 물기를 털고 쇼핑백에 담았다. 옷을 갈아입었다. 효리가 자다 일어나 따라 나왔다. 바라던 바였다. 망설임의 고통을 줄여준 녀석이 갸륵했다. 꼬리치는 녀석을 점퍼 안에 숨겨 넣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늦게 시작된 장맛비가 퍼붓듯 쏟아졌다. 전생도예 안에는 눅눅하고 괴괴한 공기가 고여 있었다. 나는 작업실을 뒤졌다. 칼과 절구로 쓸 만한 그릇을 찾았다. 흙덩이를 자를 때 쓰는 칼을 숫돌에 갈기 시작했다. 효리는 나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자주 꼬리를 흔들었다. 얼굴의 반쯤이나 차지하는 검고 동그란 눈이 맑았다. 나는 날선 칼끝으로 장미꽃을 가지에서 떼어내 낱낱이 베어가며 냄새를 맡았다. 꽃잎이 피처럼 붉었다. 목숨가진 것의 살냄새가 내 콧구멍 안에서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세숫대야만한 절구 속에 꽃뭉치를 넣고 빻았다. 붉은 액즙이 흘러나왔다. 나는 거기에 다시 코를 박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붉었다. 이번에는 효리를 붙잡아 절구 안에 눌러 넣었다. 동물과 식물의 경계는 무의미했다. 다리와 뿌리의 차이일 뿐.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소의 구별이 산목숨을 차별하진 않았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베어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충동질이 심장을 찔러댔다. 심장소리가 고막에 부딪혔다. 효리가 내 손등을 핥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침 묻은 손등에서 식초 냄새가 올라왔다. 메스꺼웠다. 냉장고를 열어 술을 찾았다. 고량주가 반병쯤 남아있었다. 위벽을 타고 내려가는 자극이 나의 집념을 예각으로 깎아 세웠다. 무딘 칼질은 고통만 가중시키는 법. 결심을 다져 다시 의식을 거행했다. 칼끝이 뱃가죽에 닿았다. 그 순간, 무자식의 공백을 채워주던 효리의 영상들이 나의 축축해진 안구를 빠르게 스쳐갔다. 이를 악물었다. 생명의 향, 오직 그것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세속의 두려움과 근심을 베어냈다. 산목숨이 내지르는 날선 고음들이 벽을 향해 탁구공처럼 튕겨나갔다. 감각의 제단에 바쳐진 목숨이 경계를 넘을 때 뿜어내는 저항이었다. 날카로운 금속이 표피를 통과하자 거기서도 붉은 액즙이 흘러나왔다. 갈라진 틈새에서 태고의 온기가 뭉글뭉글 빠져나왔다. 가늘고 짧은 사지를 나뭇가지처럼 바르르 떨어 만들어낸 진폭이 주변의 공기압을 높였다. 작업실 공간이 풍선마냥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그 팽창이 가라앉았다. 산 것에서 나오는 비린내는 모두 비슷했다.

물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늑했다. 다행히 핏발선 광기가 그곳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침향에 불을 붙였다. 쏘는 듯한 단내가 들숨을 좇아 들어왔다. 물레를 돌려 흙을 쓰다듬었다. 전생을 향해 뻗은 길이 보였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몸이 작아지는 느낌과 동시에 나는 다시 좁은 통로로 빨려 들어갔다. 토굴을 빠져나오자 가마의 입구에 도공이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모닥불 연기가 보름달을 좇아 오르는 밤, 하늘에 뜬 달덩이가 도공의 품속에서도 흰 빛을 뿜고 있었다. 바닥에 앉은 여인의 둔부처럼 펑퍼짐한 원형의 하단부에서 완만한 곡선으로 뽑아 올린 병목이 좁고 길었다. 나는 학의천에서 보았던 바로 그 새를 떠올렸다. 순백의 표면에 서린 긴장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양각으로 도드라진 대 이파리들이 깃털처럼 허공을 날고 용 한 마리가 몸을 비틀어 보름달을 향해 대숲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도공은 그것을 갓난아기처럼 보듬어 쓰다듬었다. 어린것의 피부 위에 그가 코를 대고 눈을 감았다. 배냇냄새에 취한 듯했다.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내린 물기가 달빛에 반사되었다. 그가 도자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내가 천천히 움직였다. 달빛을 모으듯 그가 온몸으로 허공에 곡선을 그렸다. 학춤이었다. 손끝을 어깨 위로 뻗어 올릴 때마다 무릎도 위를 향했다. 무아경의 시간이 흐르고, 동작을 멈춘 그가 엎드려 큰절을 했다. 그의 흰머리가 도자기를 향해 있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땀에 전 베적삼을 달그림자가 핥고 지나갔다. 이윽고 그가 망치를 들었다. 파편이 깨져 날아가는 소리가 호탕한 웃음에 섞여 달빛 아래로 퍼져나갔다.

온몸이 뜨거웠다. 목구멍 속까지 홧홧하고 매캐했다.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올렸다. 침향연기 속에서 사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병구형이 벌어진 앞니를 드러내 웃고 있었다. 나는 놀라움과 반가움을 누르며 형의 손에 이끌려 밀실을 나왔다. 깨끗이 치워진 작업대 위에서 두 개의 술잔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자, 자축하자구.”

만면에 홍조를 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감격스런 표정이었다.

“뭐얼?”

“임마 우리가 드디어 해냈잖아. 실험에 성공했다구.”

머릿속에서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형의 실험이 나를 통해 객관적 필연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다. 한번은 우연이지만 반복적 성공은 필연을 의미했다. 나의 절실함과 열정을 빌려 감각의 문을 연 그가, 드디어 윤회의 틈새로 스며드는 향기를 개발한 것이었다. 매콤한 향내가 목구멍에서 울컥 빠져나왔다. 단내 묻은 형의 목소리가 상가출입구까지 내 뒤를 따라 나왔다. ‘네가 못 돌아 올까봐 걱정했어.’ 하필 그 순간 왜 그 목소리가 생각났을까. 그러니까 나는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어깨가 저절로 떨렸다. 빗방울이 소름 돋은 팔뚝을 타고 흘렀다. 비라도 흠뻑 맞고 싶었다. 차는 내일 가져갈게. 내가 손사래를 치자 형이 우산을 주려다말고 고개를 숙이며 돌아섰다. 얼핏, 그의 눈에서 물기를 보았다. 그리고 무슨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미안하다’였나 ‘고맙다’였나. 학의천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 나는 시간의 힘을 생각했다. 그 힘은 전생의 뿌리로 현생의 꽃을 피워내며 윤회의 향기로 거듭나고 있었다. 한없이 걸었다. 구두가 질컥질컥 물기를 게워냈다. 세 시간 후 양재동에 당도했다. 체중이 쭉 빠지고 몸피가 절반쯤 줄어든 느낌이었다. 발바닥이 쓰렸다. 물집이 터진 모양이었다. 새벽이 퍼렇게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아내가 깨어있었다. 한밤중에 어딜 갔었냐고 물었다. 먼 여행을 다녀왔다고 속으로만 말했다. 그녀가 강아지를 찾았다. 나는 못 봤다고 했다. 아내의 불러오는 배가 내 눈을 찔렀다. 익숙한 비린내가 훅 다가왔으나 억누를 수 있었다. 감로수 바람으로 학처럼 날아와 시큰하게 콧날을 스쳐간 효리 덕분이었다. 샤워를 하고 출근을 서둘렀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사직서를 제출했다. 회사 일은 잊기로 했다. 영혼의 향기, 생명의 냄새를 만드는 기술을 익혔으므로 그거면 되었다. 홀가분했다. 밖으로 나오자 주차장 옆 마당에서 잔디 깎는 기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살아있는 몸에서 나온 풀냄새가 향긋했다. 낮달이 관악산 위로 희미한 얼굴을 드러냈다. 학의 깃털 같은 구름 뒤에서 병구형이 웃고 있었다. 아로마테라피스트의 자장면이 와락 당겼다. 

 

[불교신문3166호/2016년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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