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풍경 앞에 앉아

비를 노래한 시인들을

떠올리는 일은

빗방울이 한순간의 생몰을

겪듯 허망하고 아름답다

날씨가 하늘의 일이라면

그것을 느끼고 감각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오후 내내 흐리더니 밤 지붕이 찬비로 흠뻑 젖어간다. 이렇게 비오는 날이면 나는 오히려 창문을 활짝 열어둔다. 창을 타고 흘러드는 비 냄새를 맡기 위해서다. 늦가을 비를 맞이하는 기분은 허랑하고 차갑다. 감정은 물고기처럼 습한 공기 중을 유영한다. 마음을 떼어다 어디 흐리고 커다란 물방울 속에 담가놓은 것처럼. 비는 어떤 털을 가진 짐승이기에 창틀 안팎을 서성이며 젖은 발자국들을 남겨두는가.

내겐 비 내리는 날이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시 한 편이 있다. “비가 온다/네게 말할 것이 생겨서 기뻐”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황인숙 시인의 시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다. 비가 온다는 것은 새로운 소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너에게 말 걸 핑계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예쁜 소식을 들고 시인은 직접 빗방울이 되어 사랑하는 이에게로 달려간다. “나는 신나게 날아가/유리창을 열어둬/네 이마에 부딪힐 거야/네 눈썹에 부딪힐 거야/너를 흠뻑 적실 거야/유리창을 열어둬/비가 온다구!” 그러나 시인이 사랑하는 “침울한, 소중한 이”는 창문을 닫아걸고 웅크려 있다. 비 오는 날 창을 열고 사랑하는 이에게 달려가는 마음이 소중한 이의 창 앞에서 부딪히고 흘러내린다.

이수명 시인의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는 우산을 들고 거리를 나설 때면 떠오르는 시다. 시인은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 누군가와 함께 우산을 나눠 쓰고 거리를 걸어보았다면 잊기 어려운 문장이다. 우산을 함께 쓰고 걸어간다는 것은 상대에게 자신의 한쪽을 내어주는 일이다. 서로의 어깨에 지붕을 보태어 한순간 같은 공간 속을 사는 것. 왼쪽 어깨가 서서히 젖어 들어갈 때 상대적으로 더욱 따스해지는 오른쪽 어깨를 떠올린다. 그것은 ‘곁’이 주는 마음의 온도. 우산이라는 좁고 은밀한 공간 속에서 두 사람은 세계와의 완벽한 분리감을 맛본다. 진정한 연인은 세계와의 단절 속에서 생겨나기에. 그럴 때 빗방울 하나하나는 ‘내려오는 투명 가위의 순간’이 된다.

비의 물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시도 있다. 허만하 시인은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고 적었다. 우리가 스케치북에 비를 그릴 때 빗금으로 내려 그어가며 그리듯이, 비는 하나의 물방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중에 길게 그어지는 선(線)들의 춤이기도 하다. 작은 물방울이었던 비는 하강하며 동시에 탄생한다. 살아간다는 말이 죽어간다는 말과 다르지 않듯, 빗방울은 허공에 자신의 궤적을 그리며 짧은 생을 산다. 빛나는 선을 그으며 죽어가는 슬픈 직선들. 허만하 시인은 그 모습을 보며 “비가 빛나기 위하여 포도(鋪道)가 있다”고 말한다. 거리가 비를 맞아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비를 빛나게 하기 위해서 거리가 존재하는 것. 이렇게 비는 모든 사물들의 물성을 바꾸고 풍경을 재배치한다.

비 오는 풍경 앞에 앉아 비를 노래한 시인들을 떠올리는 일은 빗방울이 한순간의 생몰을 겪는 것처럼 허망하고 아름답다. 날씨와 기후가 하늘의 일이라면 그것을 느끼고 감각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한순간의 자연현상이 시인의 마음속에서 특별한 이미지를 얻을 때 그 순간은 언어로서 영원해진다. 그래서 시인은 “비를 가지고 뜨개질을 한다”(길상호, ‘비의 뜨개질’). 빗줄기의 날실과 언어의 씨실을 엮으며. 사라지고 증발하는 순간들을 붙잡아 뜨개질하여 시라는 맑고 따듯한 직물을 얻기 위해서.

[불교신문3158호/2015년12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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