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 초석 마련한 서운스님

서운스님(1903~1995)은 늦깎이다. 세속나이 47세 서울전매서장까지 지내다가 전쟁 중에 외동딸을 잃고 출가자의 길로 들어섰다. 스님은 늦은 나이에 출가했음에도 치열하게 정진했다. 한편으로는 정화운동을 주도하고, 조계종 총무원장과 학교법인 동국대 이사장을 지내며 오늘날의 종단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서운선사법어집>에는 후학들을 챙기고, 불사마다 시주를 아끼지 않은 스님의 모습이 잘 기록돼 있다. 대구 동화사 주지로 있을 때, 청도 운문사를 방문해 학인, 비구니 스님들과 함께 대중공양을 했었다. 반찬도 없이 멀건 시래기된장국으로 공양을 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학인 스님들을 보며 서운스님은 대견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했다. 함께 간 스님에게 “반찬도 없이 공양하는 것을 보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있는 돈을 다 털어 주고 운문사를 나섰다고 한다. 또 스님은 상좌들에게 심부름을 시킨 뒤에는 10원짜리 한 장까지 깐깐하게 챙기지만, 누구든 불사한다고 권선책을 들고 찾아오면 시주했다. 특히 개금불사는 두말 않고 동참했다. 상좌가 이유를 물으니 스님은 “다음 생에 미남으로 태어나고 싶어서”라고 답해 웃음을 주었다.

 

‘우리시대 천진불’ 석주스님

자비한 미소와 하심으로 대중을 대했던 석주스님(1909~2004)을 일컬어 범룡스님은 “천하를 사랑하는 이”라고 했다. 선서에 조예가 깊었던 스님은 가장 좋아하는 글귀 ‘오유지족(吾唯知足, 나는 오직 만족할 줄을 안다)’을 직접 써 만나는 사람마다 직접 나눠주기도 했다. 특히 석주스님은 어린이청소년 포교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불교 동량을 길러내는 불사에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세납 쉰을 훌쩍 넘긴 1965년 서울 칠보사에 어린이법회를 창립했고, 같은 해 청소년교화연합회 발족에도 참여했다. 칠보사에 어린이 합창단도 만들고, 한국불교아동문학회를 창립해 ‘한국불교 아동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도시속의 도인 석주 큰스님>에는 어린이포교에 대한 스님의 원력이 잘 담겨져 있다. 아이들이 절에 와서 시끄럽다고 불평하는 불자들에게 스님은 “보살님, 아이들이 떠드는 것은 본능입니다. 본능을 무조건 막으면 아이들과 가까이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아이들은 부처님처럼 맑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부처님 대하듯 해 보십시오. 오히려 아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타일렀다. 어린이 청소년을 멀리하면 한국불교의 미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야산 호랑이’ 성철스님

1981년부터 입적할 때까지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스님(1912~1993)은 불자들에게는 3000배를 시키는 스님으로 유명했다. 스님을 만나려면 절돈 3000원을 내야 한다는 건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얘기다. 성정이 불같던 스님은 ‘가야산 호랑이’로 불리기도 했다. <성철스님 시봉이야기>에서 해인총림 방장 시절, 엄하게 수좌들을 지도했던 스님의 일화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안거 때면 스님은 불시에 선방에 들어가 수좌들의 정진을 점검했다. 한 손에는 죽비를 들고 혹시라도 조는 수좌가 있으면 “졸지 말고 밥값 내놔라, 이놈아” 하며 거침없이 죽비를 내리쳤다. 참선 안하고 졸면 절에서 주는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고 꾸짖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소임자 스님들에게 “주지 이하 소임사는 너거들은 수좌들이 밤에 똥을 싸놓고 뒹굴어도 허물 잡지 말고 외호나 잘해야 된데이”하며 수좌들을 두둔했다. 스님은 “부처님 혜명을 잇겠다고 결제가 되면 졸든지 말든지 좌복 위에 앉는 수좌들 모습이 좋다. 저 속에서 인물이 나오는기다”며 수좌들을 아꼈다.

 

‘참사람의 향기’ 서옹스님

임제선사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창조적으로 해석해 ‘참사람 운동’을 제창한 서옹스님(1912~2003)은 백양사 설선당에서 좌탈입망의 모습으로 원적에 들었다. 출가자로서 스님의 삶은 늘 치열했다. 임제대학에서 공부할 때 ‘진실자기(眞實自己)’라는 졸업 논문으로 당시 일본 불교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들의 학설을 비판해 화제를 모았다. 또 일본 임제종 총본산 묘심사에서 3년간 정진하면서 ‘여불(如佛)’이란 호칭을 얻기도 했다. 귀국 후에 제방에서 간화선 수행을 지도한 스님은 1995년 참사람 결사운동을 벌이며 수행문화를 확산시켰다. 출가동기를 밝힌 대중법문에서 스님은 “출가보다 더 어려운 것은 출가 후의 수행이 아닌가 생각된다”며 “처음의 발심을 굽히거나 바꾸지 않고 초지일관해 수지한다는 것은 견실한 정진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출가의 동기, 그 자체보다 출가 후에도 정진력을 잃지 않는 신심이 더 위대한 것인지 모른다”고 말해 앞 뒤 옆도 돌아보지 않고 뚝심있는 정진을 강조했다.

 

평생 ‘하심'…문턱 낮춘 월하스님

정화불사와 통합종단 출범에 기여하고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정을 지낸 월하스님(1915~2003)스님은 종단 행정과 수행을 대표하는 자리를 거쳤지만 평생 하심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동국대 이사장 시절 시자가 있음에도 직접 속옷과 양말을 빨았고, 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전각은 문턱이 낮아 만나길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언제든지 만나줬다. 영축총림 방장으로 추대된 뒤 스님의 건강을 염려한 제자들이 면회를 제한하자, 스님은 불같이 화를 내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니 만나러오는 사람을 막지 마라고 제자들에게 일갈했다. 상을 내지 않는 자비행도 전해진다. 나눔의 집 건립 소식을 듣고 스님이 가명으로 1억5000만원을 보시한 게 뒤늦게 알려졌다. 검약한 수행자였던 스님은 상좌들에게 늘 시은(施恩)을 무겁게 여기라고 가르쳤다. “시줏물이나 사중 돈 쓰는 게 시뻘건 쇳물을 마시는 걸로 알아야 한다” 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공부하다 죽어라’ 혜암스님

조계종 종정 재임 중이던 2001년 12월 마지막 날 원적에 든 혜암스님(1920~2001)은 “공부하다 죽어라. 공부하다 죽는 것이 사는 길이다”며 치열한 정진을 강조했다. 스님 자신은 평생 장좌불와를 했다. <공부하다 죽어라>에서 정찬주 작가가 혜암스님과 나눈 대담을 보면 스님은 “일본에서 <선관책진>을 읽다 장좌불와를 다짐했고, 절에 들어온 날부터 시작했다. 거기에 3일, 5일, 7일이면 견성한다고 기록해 놔서 여유 있게 1주일을 잡아 견성성불 하겠다고 결심했다. 행자 때부터 1주일 지나면 태평양 바다에 빠져버리겠다는 마음으로 공부했다. 1주일 지나면 다시 1주일을 내세워 자꾸자꾸 하다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모르고 저녁인지 낮인지 몰랐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상을 내서 하는 장좌불와는 소용없다며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나 공부해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후학들에게 일러주었다.

 

염불선 제창한 청화스님

원로의원을 지낸 청화스님(1923~2003)은 청빈한 수행자의 표상이다. 하루 한끼 공양을 하고 장좌불와를 했다. 염불선을 제창한 스님은 염불삼매를 통해 본래면목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제자들이 염불선 수행을 이어가고 있다. 출가자로 지낸 56년간 스님은 혹독하리만치 고행을 실천했다. <마음 부처가 사는 나라>에서는 구례 사성암에서 동안거 결제에 든 청화스님의 수행담이 소개돼 있는데 “암주 보살에게 방세를 주어 아랫마을로 보내고 홀로 삼동 한철을 공부했다. 암주보살이 절 안에 둔 고양이 때문에 가끔 사성암에 올라가면 스님은 껌껌한 바위 웅덩이에 찬 샘물을 큰 양동이에 받아 아주 천천히 머리에서부터 붓고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자비행도 남달랐는데 본지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광주 추강사에 주석하던 시절, 2~3일치 쌀밖에 없어 스님들이 대중공사를 하며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절에 객스님이 찾아오자 청화스님은 주저함이 없이 쌀독에 남아 있는 쌀을 객스님 걸망에 담아주었다.

 

‘절구통 수좌’ 법전스님

한번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일어설 줄 몰라 ‘절구통 수좌’라 불렸던 법전스님(1925~2014)은 봉암사 결사에서 평생 스승인 성철스님을 만났다. 세속나이로 서른 둘, 스님은 일대사를 해결하지 못하면 금생을 묘적암서 끝내겠다는 각오로 문을 걸어 잠그고 정진했다. <누구 없는가>에서 스님은 그 때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때맞춰 밥을 해 먹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다. 닷 되쯤 분량의 밥을 한꺼번에 해서 바구니에 담아 두고 때가 되면 찬 밥 한덩이에 김치 몇 쪽을 올려 끼니를 때웠다. 겨울이었지만 물 데우는 것이 번거로워 샘물 한 바가지 떠먹는 것으로 대신했다. 베개도 이부자리도 없이 옷을 입은 채 두 세 시간 눈을 붙이고 참선하고 나무하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화두에 사무쳐 절박하게 정진하면서, 씻지도 않고 몇 달을 지내다 봄이 가까워오자 스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게송을 읊었다. 묘적암서 한 철은 법전스님이 꼽은 생에서 가장 절박하게 공부했던 때다.

 

해외포교 선구자 숭산스님

숭산스님(1927~2004) 하면 떠오르는 게 해외포교다. 스님은 1960년대부터 일본을 시작으로 홍콩, 미국, 캐나다와 유럽 곳곳에 선원을 개원해 세계인들에게 선을 지도했다. 1972년, 미국포교가 절실하다는 지인의 권유에 태평양을 건너간 스님은 로드아일랜드 주 할렘가에 작은 아파트 월세를 얻었다. 운영비가 없어 낮에는 세탁기 수리공으로 일하고 잡일을 하며 저녁엔 예불하고 기도했다. 그러다 세탁소에서 스님을 알아본 브라운대학 동양종교학과 교수와 인연이 되면서 학생들이 법당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스님이 일본어로 법문을 하면 브라운대 교수가 영어로 통역하는 형태로 진행되다, 나중엔 스님이 직접 영어로 법회를 진행했다. 뛰어난 영어실력은 아니지만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선의 나침반>을 보면 한 제자가 스님에게 왜 미국까지 와서 포교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스님의 대답은 간단했다. “너 때문에.”

 

선교율을 통달한 일타스님

조계종 전계대화상과 원로의원을 역임한 일타스님(1929~1999) 집안에는 스님이 자그마치 41명이다. 돌아가신 날까지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며 독실한 불심을 보여준 외증조할머니의 영향으로 외가 모든 식구들 35명이 전재산을 정리하고 해인사로 출가했다. 스님의 누나와 형, 어머니와 동생, 아버지도 차례로 출가했다. 초등학교를 마친 일타스님도 통도사에서 고경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오대산 적멸보궁서 매일 3000배씩 7일 동안 기도하고 <능엄경> 제6권 사바라이장의 연비에 대한 구절을 읽으며 오른손 네 손가락 열두마디를 모두 연비한 스님은 손가락과 함께 모든 업장을 녹였다. 교학에도 밝았는데 <아! 일타스님>에는 스님이 해인사 강원(현 승가대학) 학인들에게 한 당부가 실려 있다. “경전을 공부하려면 무엇보다도 한문 문법을 통달해야 하고, 한문 문법을 통달해 문리를 얻으려면 무조건 <서장> 300독을 하는 게 좋다. 가사장삼을 입고 법당에서 100일 기도를 하는 요량으로, 부지런히 기도삼아 서장 300독을 하기 바란다. 틀림없이 문리가 확 터질 것이다.”

 

‘한국불교 지성’ 지관스님

“잘못되거나 불행한 현실과 이웃을 탓하거나 배타하지 말고, 잘못된 현실을 거슬러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 대단한 용기와 의지가 필요한 때다. 하루에 잠깐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외우거나, 염불하며, 참선 정진하라. 자동차는 기름을 연료로 목적지에 도달하며, 사람은 수행이라는 연료로만 행복해질 수 있다.” 지관스님(1932~2013)이 본지 인터뷰에서 불자들에게 한 당부로, 십수년 전 일러준 가르침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율사이면서도 교학에 뛰어났던 스님은 평생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왔다. 스님은 <가산불교대사림>라는 한국불교사에 다시없을 족적을 남겼고, 고승비문, 계율연구 등 명저를 저술했다. 총 22권 중 15권까지 발간된 <가산불교대사림>은 불교 최대사전으로, 스님은 사전 발간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다. 정병삼 숙명여대 교수는 “스님의 혼이 깃든 작업”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스님은 사전 원고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은 직접 썼고, 생전에 ‘ㅎ’ 종료항목까지 주요핵심술어 집필을 완료했다.

 

理·事 넘나들던 정대스님

이(理)·사(事)를 넘나들며 종단발전에 기여했던 정대스님(1937~2003). 전북대 영문과 재학 중 군복무를 마치고 돌연 출가를 결심하고 전주 위봉사로 갔다. 그곳에서 전강스님을 만나 1년간 시봉하다가 인천 용화선원서 ‘정대’라는 법명을 받고 출가자의 삶을 시작했다. 은사 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엉덩이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고 한다. 종단 행정에도 두각을 나타낸 스님은 화성 용주사와 여주 신륵사 불사로 사찰을 새롭게 일신했다. 또 스님은 총무원장 소임을 맡아 1999년 사태로 혼란에 빠진 종단을 안정화시켰다. 이후에 스님은 “필요하다면 총무원의 수위를 맡아서라도 종무행정의 쇄신을 통해 불교중흥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이었지. 지금 돌이키면 출가자로서 수행의 길을 뒤로 하고, 종무행정에 투신한 것에 전혀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후회되지도 않아”라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인재불사를 위해 스님은 2002년 모친 故 최은수(법명 청정심)여사로부터 물려받은 유산과 사재를 털어 재단법인 은정불교문화진흥원을 설립했다.

 

‘비구니계 큰 별’ 묘엄스님

묘엄스님(1931~2011)은 한국불교 비구니계를 대표하는 강사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청담스님의 딸이기도 한 스님의 삶은 현대한국불교사와 궤를 같이 한다. 성철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은 유일한 스님으로 봉암사 결사에도 동참했고, 성철, 자운, 운허스님으로부터 선과 율, 경을 배웠다. 수원 봉녕사에 승가대학을 설립하고, 최초의 비구니 율원을 개원해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비구니 승가교육 발전에 일조했다. 봉녕사 사격이 일신된 것도 스님 덕분이다. 스님이 윤필암 스님 30여 명과 처음 봉녕사에 갔을 때는 쓰러져가는 옛 절이었다. <회색고무신>에는 당시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어려운 살림에도 스님들을 가르쳐야겠다는 원력으로 강원을 열어야겠다고 결심한 스님. 교육환경은 열악했지만 공부하겠다며 50명의 사미니가 찾아왔다. 학인들과 공부하기 위해 강당불사에 나선 묘엄스님은 어렵게 시주를 얻어 불사를 시작했다.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스님들이 직접 팔을 걷어 부치고 운력을 하는 모습은 재가자들을 감동시켰다.

 

석정, 관조스님도 입적

이밖에도 무형문화재 불화장 석정스님(19 28~2012)과 사진으로 불교문화재의 우수성을 알리던 관조스님(1943~2006)이 우리 곁을 떠났다. 붓 하나로 사찰을 불국정토로 장엄한 석정스님은 열네살에 일섭스님을 만나 불모의 길로 들어섰다. 불화를 그리는 것은 물론 2007년 전국 사찰의 불화를 집대성해 <한국의 불화> 40권을 완간하기도 했다. 입적할 때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은 스님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얼마에 맡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어떤 절이라는 생각도 버리고 주지나 화주가 신심이 있는 지 없는 지도 따지지 말고 오로지 그림그리기에만 열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탱화는 사람보다 오래 삽니다. 또한 절은 없어져도 탱화는 인연 따라 남게 됩니다. 그러니 돈, 맡긴 사람, 절이 큰가 작은가는 따지지 말고 오로지 열심히 그려야만 합니다.” 스님의 가르침은 여전히 큰 울림으로 전해진다. 카메라 하나 짊어지고 전국 사찰을 찾아다닌 관조스님은 꽃살문, 대웅전, 석조유물 등 많은 이들이 지나쳤던 불교문화재의 아름다움을 렌즈에 담았다. 특히 목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꽃살문에 대한 사진기록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입적 후에는 법구를 동국대 일산병원에 기증했고, 스님이 평소 촬영한 19만7846컷의 사진을 종단에 기증하며 마지막까지 보시행을 펼쳤다.

[불교신문3156호/2015년11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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