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지기 원행스님의 불교현대사에 대한 기록

10·27 불교법난

원행스님 지음/ 에세이스트

눈썹 돌리는 소리

원행스님 지음/ 에세이스트

 

 

10·27법난 때 모진 고문당해

10월만 되면 계절병 도지 듯

발목과 무릎 통증으로 고생

 

월정사서 출가해 은사 스님과

전쟁 때 전소된 사찰 복원해

삼화사, 구룡사 차례로 중창

오대산으로 돌아와 수행전념

월정사 부주지 원행스님을 지난 20일 출판기자간담회서 만났다. 스님은 <10·27 불교법난>을 통해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불교가 치욕을 당한 사건의 배경과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월정사 부주지 원행스님은 10월27일이 다가오면 계절병처럼 발목과 무릎이 아프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10·27법난 때 고문당한 후유증이다. 35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원행스님은 “그들에 대한 원망을 잊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사건이 바로 10·27법난”이라고 강조했다.

원행스님이 당시 사건을 기록한 <10·27 불교법난>과 스님의 수행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눈썹 돌리는 소리>를 펴냈다. 지난 20일 스님을 조계사 인근서 만나 소회를 들었다.

“보조국사 지눌대선사는 ‘땅에서 넘어진 자, 땅 짚고 일어나라’고 하셨어요. 1700년 불교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 10·27법난입니다. 다시 생각하기 싫은 치욕스런 일이지만, 이를 외면해서도, 과거에 묻어서도 안됩니다.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넘어진 바로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아요.”

법난 당시 스님은 월정사 재무 소임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군인들이 들이닥쳐 어디론가 스님을 끌고 갔다. 콘크리트 벽 한쪽에 알루미늄 야구방망이와 야전침대서 뽑아낸 쇠파이프, 양동이가 놓여 있었다. 뭔가 잘못돼도 대단히 잘못돼고 있다는 생각을 할 즈음, 군인 하사 두 명이 다가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중놈아. 빨리 이 옷, 군복으로 갈아입어.”

스님이 기억하는 10·27법난의 시작이다. 결국 일주일 간의 모진 고문에도 횡령 등 아무런 혐의도 나오지 않자 겨우 풀려난 스님은 부러진 발목으로 오대산으로 돌아왔다. 일부 스님은 이유도 없이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스님은 <10·27 불교법난>에서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과 유신헌법을 시작으로 왜 군부가 불교를 탄압했는가에 대한 다각도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다.

원행스님은 “당시 보안사에서 9000여 쪽에 달하는 수사 자료를 작성하고도 아직까지 이를 공개하고 있지 않다. 이 자료가 공개되면 모든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함께 펴낸 <눈썹 돌리는 소리>는 원행스님의 수행 기록이다. 비교적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1960년대 혼탁한 세상을 보면서 고등학생이던 스님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그리고 서울 삼각산의 작은 암자에서 나오는 목탁소리에 이끌려 출가를 했다. 오대산에 큰스님이 있다는 말에 7일간 걸어걸어 월정사에 도착했다. 곧 무너져버릴 것만 같은 탑에 6·25전쟁으로 인해 전소된 월정사. 그곳에서 은사 만화스님을 모시고 불사에 전념했다.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 전 회장의 아버지 조명희 씨가 월정사를 찾았다가 불사를 지원한 이야기를 비롯해 동해 삼화사, 원주 구룡사 주지로 있던 일들을 잔잔하게 기록했다. 삼화사 주지로 부임한 스님은 방치 되다시피한 작은 전각에서 철불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상호가 꽤 원만하고 좋았다. 이에 전문가들과 조사를 하니 고려시대 노사나불 철불이었다. 단번에 문화재가 됐다. “절에 처음 가서 무너져 가는 삼화사를 어떻게 중창할 것인가 노심초사했어요. 다행히 국보 문화재가 발견돼 불사가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었어요. 다 부처님의 가피가 아닐까 생각해요.”

스님은 구룡사 주지로 있던 때를 잊지 못한다. 2003년 탄허스님 열반 20주기를 기념해 법어집을 출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출판기념법회를 하던 날, 급하게 전화가 울렸다. 대웅전이 화재로 전소됐다는 연락이었다. 몇일 동안 아무 음식도 먹을 수 없었다. 대웅전과 함께 스님의 마음도 시커멓게 타 버린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한 노부부가 찾아왔다. 할아버지가 대끔 고함을 질렀다.

“여지껏 50년간 구룡사를 다녔는데, 어찌 주지 스님이 돼 가지고 법당을 지키지 못해 불을 내시었소? 나도 부처님 법 속에서 살다가 죽으면 이곳에서 49재를 지내달라고 했는데, 이게 뭐란 말이오. 큰스님이 빨리 법당을 지어서 나의 원을 풀어주시오.” 그때 할머니가 몸빼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노란봉투를 꺼내 할아버지에게 건네자, 할아버지는 그것을 받아 휙 던지고 갔다. 참회기도를 하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그 봉투를 열었다. 달랑 만원짜리 한 장 들어 있었다. ‘이 돈으로 무슨 법당을 지으란 말인가.’ 그 돈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번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아, 이거다, 저 순수하고 맑은 신심이 모여야 법당이 완성되겠구나.’

책에서 원행스님은 고백을 한다. “한암·탄허 큰스님, 스승 만화스님의 뜻대로 조금도 거짓되거나 허욕을 부리거나 허명을 탐하지 않고 출가자의 본분을 다하면서 선지식 뒤를 따라 왔다. 또 따라가겠다”고.

[불교신문3148호/2015년10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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