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이 없을 땐

남북 신계사 식구들은

옷을 훌훌 벗고

맑은 신계천에서

멱을 감았다

선녀들이 목욕하던

그 금강산 계곡물이다

해방이후 금강산에서

수영한 최초의 남한사람인

나는, 나무꾼처럼

약수를 길어다가

금강송으로 차를 달인다

그 맛이 법희선열이다

금강산에 부처님의 법향이 전해진 역사는 2000년이 넘었다. 육지보다 빠른 바다의 실크로드를 따라 금강산에 불교가 들어왔다. 김해 영광 강화 등도 타 지역보다 일찍이 법음이 전해진 대표적인 곳들이다.

해금강에는 인도에서 온 배가 닿았다는 선암, 종을 싣고 와 내렸다는 종암 등의 이름이 남아있기도 하다. 신계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 중 하나이자 외금강의 대표사찰이다.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라는 말이 있듯이 봉우리들이 기묘하게 많고, 골짜기마다 많은 수행승들이 정진하였다는 의미이다. 수많은 고승들과 시인묵객들이 거쳐간 신계사는 한국전쟁 발발 1년 후 미군의 폭격에 의해 처참히 파괴되었다.

신라때에는 왕실과 김유신 집안의 지원을 받았고, 고려는 초기부터 태조의 후원에 힘입어 사세는 번창하였다. 탄압받던 시기인 조선시대에도 왕실의 든든한 지원 아래 신계사에는 국가와 왕실의 평안을 축원하는 어실각이 세워졌다.

금강산 자체는 부처님의 법신으로 인식되었고, 왕실에서도 특별히 원찰로 삼았던 사찰들이 많았다. 명산에 명찰이다.

이전에는 신계사로 들어가려면 온정리 온천에서 극락고개를 넘어야 했다. 고개 옆에는 문필봉이 힘차게 우뚝 서있다. 신계사에서 보면 잡힐 듯 가깝다. 북측의 H동무 덕분에 나는 몇 차례 그곳에 오를 기회를 가졌다. 정상에 서면 비로봉 세존봉 관음연봉이 지척이고, 동해바다의 청량함이 가슴속까지 와 닿는다.

금강산에 4년 동안 지내면서 문필봉의 정기를 듬뿍 받아서일까. 나는 지금까지 대학입시기도를 해서 모두 합격시켰다. 부처님의 가호와 금강산의 정기를 더했기 때문이겠다. 본인들의 노력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아늑한 신계사 터에 건물을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를 때 인골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면 나는 그 분들을 위해 법성게를 독송하며 밤새워 기도하였다. 북의 동무들과 같이 밤나무와 남새도 심고 염소도 길렀다. 관광객이 없을 땐 남북의 신계사 식구들은 옷을 훌훌 벗고 맑은 신계천에서 멱을 감았다. 선녀들이 목욕하던 그 금강산 계곡물이다. 해방이후 금강산에서 수영한 최초의 남한사람인 나는, 나무꾼처럼 약수를 길어다가 금강송으로 차를 달인다. 그 맛이 법희선열이다.

법기암터에서 효봉스님 무문관터와 독립운동가 초월스님 이름을 발견한 일. 밝힐 수 없는 누군가가 보광암터와 화엄각터를 알려주고 안내한 일. 이름만 전하던 유마암터를 발견한 일. 제1차 핵실험하던 날에도 공사는 하였고,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상판이 되어있던 나운대사(18세기 금강산 고승)의 비석을 파낸 일. 폭우 속에도 묵묵히 작업하던 날들. 원음으로 들어보는 함경도사투리. 특별지역의 돌을 채석하여 축대를 쌓은 일. 기와를 올릴 때 금강산지역 남북의 9개 기관이 힘을 모아 엄청난 량의 황토를 멀리서 싣고온 일. 군부 허락을 얻어 새해 첫날마다 해금강 일출을 보러가던 일. 능이버섯과 라면을 반반으로 해서 끓여 먹던 일… 기억들이 새롭다.

지난 15일, 낙성 8주년 법회 때 고운정 미운정이 든 북의 ‘동무’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그런데 몇 명은 보이질 않는다. 벌써 저세상으로 떠났다고 한다. 가슴이 멍하다. 리해수 반장선생, 황철식 동무, 김창복 동무! 같이 고생한 동무들이여 고생많았소. 부디 극락왕생하시라요… 동무들도 통일의 일주문에 이미 들어선 사람들이 아니겠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린 피땀들이 통일로 가는 윤활유가 될 것이오.

신계사 법당에서 합장하였다.

[불교신문3147호/2015년10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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