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 / ‘10·27법난 피해자’ 청담문도회 문장 혜성스님

계엄사령부에서 37일간 감금

22일 동안 모진 고초 당해

15년 전부터 파킨슨병 투병

 

대종사 특별전형 대상자 돼

종단 어른으로 존경받지만

휠체어 의지해 겨우 이동하며

고통스런 노후 보내고 있어

 

“청담학원 계승해 대학교

설립하려는 꿈도 사라졌다”

피해자 아픔 반드시 보상돼야

1980년 10·27법난 당시 계엄사령부로부터 모진 고초를 받은 청담문도회 문장 혜성스님이 지난 16일 본인이 설립한 청담고등학교를 방문해 후학들을 격려했다.

1979년 12·12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가 1980년 10월27일 불교계를 정화한다는 미명 아래 무차별 폭력을 가한 사건이 일어났다. 불교계는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10·27 법난’이라 부른다. 정당한 방법에 의한 정권창출을 하지 못한 신군부는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국민들의 환심을 사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그 와중에 일어난 사건이 10·27 법난이었다. 법난 당시 신군부가 언론을 통해 발표했던 내용들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고 불교계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그 피해자 중의 한명이 당시 도선사 주지였던 혜성(慧惺)스님(청담문도회 문장)이다. 10·27 법난이 일어난 지 35주년을 맞아 지난 14일 스님이 설립한 서울 청담종합사회복지관에서 그 참혹했던 상황을 직접 들어보았다.

10·27법난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10·27법난 당시 어떤 상황이었나요?” 말하는 것이 불편한 스님에게 자료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스님, 그때 군인들이 새벽예불을 마치고 나오는데 잡아가서 어디론가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군복으로 갈아 입혔지요?” 그러자 스님은 손을 내저었다.

“군복이 아니고 죄수복이고요.” 스님은 사실과 다른 부분도 정확하게 지적했다.

“군인들이 고문하고 경찰관들이 조사를 했어요.” 다시 기록에 나와 있는 내용을 말했다. “스님. 그곳(서빙고, 10·27 당시 계엄군이 상주하며 불교비리를 추궁했다고 함)에 끌려가서 온갖 구타와 고문을 당했지요? 스님 속명(이근배)도 부르면서 뺨도 때렸어요?”

스님은 기억하고 싶지 않는 일인 듯 “네”라는 외마디로 대답했다. 당시 스님은 노인복지사업으로 혜명양로원 골조공사를 하고 있었고 이미 청담중·고등학교도 설립해 운영하고 있었다. 그 과정을 물었다.

“그때만 해도 교육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적을 때였어요. 그런 교육은 사회(국가)에서 하면 되지 중이 쓸데없이 그런 사업을 하냐는 시대였어요.”

스님은 전쟁고아를 보살폈던 김기용 불자의 기부로 인연맺은 혜명보육원을 기억하면서 교육사업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취지를 설명했다. 그러던 와중에 스님은 서빙고를 끌려가 22일 동안 조사받으며 온갖 고초를 당했다(총 감금기간은 37일)고 했다.

“저를 부정축재자로 몰아 ‘전언통신문’을 받으면서 온갖 고문을 당했어요. 젊은 군인들이 부정축재 사실을 불 때까지 돌아가면서 참지 못할 고통을 주었어요. 1개 분대로 구성된 군인들이 몽둥이로도 때리고 욕설을 퍼붓고….”

끔직한 일은 스님 혼자만이 아니었다. 상좌였던 도현스님(하와이 무량사 주석)도 함께 끌려와 추궁을 받고 있었다. 이런 끔찍한 일을 겪고 나올 때 각서를 써야 했다고 했다.

“그동안 여기에서 고문받았다는 말과 일어난 모든 일을 일체 외부에서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했어요.”

그 당시 후유증으로 스님은 탈장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스님이 부정축재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다. 신군부가 발표한 17억5000원에 대한 금액은 한 푼도 회수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스님은 “도선사 아래 절 땅이 없어 신도들이 오기 불편해서 하천 복개공사를 맡아 편의를 도모하려 했었는데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 후 스님은 계속되는 악몽과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스님을 시봉하고 있는 관계자는 “스님은 잠시 동안 깜빡 주무실 때도 크게 비명을 지르거나 허공에 손을 헤집는 악몽을 꾸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밝혔다.

스님에게 “악몽을 요즘도 계속 꾸는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군인. 군인”이라는 말을 했다. 아마도 군인들이 꿈에 계속 나타난다는 의미로 보였다.

스님은 다시 어눌하게 말했다. “제일 억울했던 것은 종단이 힘이 없었어…(이런 일이 일어 났어요) 우리를 도와주지도 못했고 오히려 조사사실을 그대로 믿고 체탈도첩(멸빈)을 했어요. 다시는 이런 일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스님의 논리는 정연하지 않았지만 종단에 대한 원망이 깔려 있었다. 종단이 힘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무고하게 고초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더구나 신군부가 조사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해 자신을 멸빈시킨 조치에 대해서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서슬 퍼런 신군부 통치아래 종단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임을 이해했을 터이지만 터무니 없는 일을 당한 것에 대한 마음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듯 했다.

1970년대 교육과 복지사업을 했던 스님은 10·27 법난 당시 도선사 주지로 소임을 보면서 청담학원 설립과 더불어 대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원대한 꿈도 가지고 있었던 새로운 사실도 털어놨다.

“(청담학원 세우고 나서) 중·고등학교에 이어서 대학교를 설립하려 했는데…(그 꿈이 사라졌다) 복지법인은 땅이 있어 가능했고…(대학교는 자금이 필요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기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스님의 상좌인 도권스님이었다. 내용은 종단 법계위원회에서 혜성스님을 ‘대종사’ 법계 특별전형 대상자로 결정했다고 했다. 종단의 최고 법계인 대종사는 원로의원이나 총림 방장급 스님들이 받는 품계로 무척 경사스런 일이다.

스님의 휴대전화에 벨이 또 울렸다. 주변에서 이 소식을 듣고 축하하는 전화였다. 스님은 그저 “어, 어”하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구체적인 말을 잇기에는 몸이 많이 불편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세수로 이제 여든에 접어든 나이라 어찌보면 거동이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평생 올곧은 수행자로 살아온 스님에게 지금의 병환과 몸이 불편한 것은 분명 35년 전 예기치 못했던 10·27법난으로 고초를 당한 후유증 때문이 분명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나오는데 “종단이 힘이 있어야 해”라고 되뇌이던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스님은 당시에 종단이 똑바로 정신을 차렸더라면 이처럼 심각한 피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종단의 멸빈조치(법난 후 스님은 3년만에 완전 복권이 됐다)로 마음이 아픈 모양이었다.

10·27법난이 일부 내부고발에 의해 신군부가 불교계에 가한 무차별 폭력이었다는 점에서 혜성스님의 정신적 육체적 아픔과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듯 했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사건이고 아직도 피해자의 아픔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위로가 진행되지 않았기에 10·27법난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혜성스님이 지난 14일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혜성스님은 … 

1957년 청담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2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 불교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65년 도선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1971년에는 중앙종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은사인 청담스님의 유지를 이어 혜명보육원과 혜명양로원을 설립해 운영했으며 청담학원을 설립해 교육사업에도 앞장섰다. 1980년 도선사 주지로 있다가 10·27법난을 당해 온갖 고초를 겪었다. 이후 교육사업과 복지사업에 매진해 청담고등학교 교장, 중앙승가대학장, 청담종합사회복지관장 등으로 활동했다. 조계종 종정 표창, 문화부장관 표창, 서울시장 표창 등을 받았다.

[불교신문3147호/2015년10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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