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았지만 강렬했던

외출에서 돌아오니

‘백수 과로사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사실임을

가르쳐 주려는 듯

부르는 곳이 많다.

현직 못지않은 환대에

여행 가서 새겼던

인생 2막에 대한 각오는

봄날 아지랑이 마냥 사라졌다.

 

습(濕)이란

이처럼 씻어내기가 어려운가?

빨리 인생 2막을

시작해야 하는데…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조롱박 매달린 운치 있는 오솔길 따라 걷노라니 흥에 겨워 우쭐해서 괜히 소년처럼 길가의 수풀을 걷어 차본다. 가을이 주는 풍요로움과 여유로움이 풍선처럼 청명한 하늘로 피어오른다.

여름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이들이 새 학기를 막 시작하던 8월 말 회사원, 은행원, 교사로 이어진 직장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홀로 여행을 떠났다. 정년에 경험한 여행은 생애 첫 외출처럼 설레고 긴장되고 흥분으로 가득했다. 그동안 많은 여행을 다녔는데 마치 처음인 듯 긴장과 설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곧 아담한 정자와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위로 부는 시원한 바람을 맞는 정년 지난 ‘백수(白手)’는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유유자적 안빈낙도를 즐기는 선비인양 편안함과 여유를 금세 찾았다.

학교를 떠나면 끝날 것 같았는데, 아직 많은 시간이 펼쳐져 있다. 현실적으로도 그렇고 육체적으로도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 앉을 수 없는 나이다. 백수(百壽) 시대라 불릴 정도로 60 이후 무려 30~40년이 남았으니 나의 교직생활보다 더 긴 시간을 다시 살아야 한다. 아이들은 장성해서 직장을 찾아 자식 부양의무에서 벗어났으니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선배들은 아직 세상 물정 모른다고 핀잔한다. 아이 결혼시켜야 하고, 아들은 서울에 전세까지 얻어줘야 하는데 교사생활로 정년 마친 주제에 편한 소리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아버지들에게 부여된 끝없는 짐이 나의 등에도 얹혀있음을 새삼 깨닫는 순간 이제 즐길 날만 남았다는 기대는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물론 나는 그럴 능력도 의사도 없다. 대학까지 마쳐 세상에 내보냈으면 부모로서 제 할 일 다했다는 것이 변함없는 생각이다.

학교를 떠나기 전부터 고민을 했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교육 경험을 살려 새로운 인생을 설계한다는 원칙은 일찍부터 세웠고 한 학교에서 수십년을 봉직하다 보니 지역에 지인들도 많아 이런저런 조언을 보태주지만 새로운 길은 잡힐 듯 하면서도 선뜻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첫째는 자금 부족이 새로운 일을 펼치는 시도를 주저하게 만든다. 나라에서 주는 월급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경영자가 돼야하니 변신이 쉽지 않다. 둘째는 세월만 보냈지 크게 이룩한 것도 업적도 없는, 평범했던 과거가 발목을 잡는다. 현직에 있을 때는 모(某) 모(某) 고등학교 교장이라는 직책이 못난 나를 빛내주었다. 그 때는 다른 조건은 중요하지 않았다. 키, 얼굴, 경제사정, 출신학교 같은 다른 조건은 ‘교장’이라는 ‘태양’의 빛에 가려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후광을 대신할 다른 무엇이 이후에도 있을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래서 안일하고 후광에 안주했던 과거가 새로운 길을 나서려는 나의 발을 잡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인생 2막을 힘차게 맞으려 한다. 나에게 덧씌워진 모든 조건과 허울을 벗어던지고 자식 부모 등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주인이 되어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웰다잉 시대라고들 하는데, 삶과 떨어진 죽음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주인되어 후회하지 않을 삶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발 한발 딛는다면 그것이 곧 주인되는 삶이며 웰다잉이 아니겠는가.

짧았지만 강렬했던 외출에서 돌아오니 ‘백수 과로사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사실임을 가르쳐 주려는 듯 부르는 곳이 많다. 현직 못지않은 환대에 젖다보니 여행 가서 새겼던 인생 2막에 대한 각오는 봄날 아지랑이 마냥 사라졌다. 습(濕)이란 이처럼 씻어내기가 어려운가? 빨리 인생 2막을 시작해야하는데 걱정이다.

[불교신문3143호/2015년10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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