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일서기(一書記)에게 주는 글

‘법안’ 뜰 수 있는 ‘돈오’ 체험이

불조경지 초월할 뜻도 세우게 해

우리 종문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

본문: 영특하고 신령한 납자는 바탕이 뛰어나고 남다른 자태를 쌓아서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세속의 벼슬을 버리고, 자기 자신과 세상의 들뜬 명예를 티끌이나 뜬구름 혹은 골짜기의 메아리처럼 본다.

해설: 원오극근스님이 사명(四明)의 설두산에 머물던 제자 일서기에게 보낸 편지다. 사명은 지금의 절강성 영파다. 설두산은 <송고백칙>을 쓴 운문종의 설두중현(980~1052)스님이 큰 회상을 열고 주석하였던 곳이다. 오로지 마음을 깨달아 생사대사를 해결하겠다는 원력이 확고한 공부인이라면, 장차 인연 따라 활발발하게 남한테 이익을 나누어 줄 수 있는 힘을 얻을 때까지 대중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인자중하며 정진한다. 원효스님이 <발심수행장>에서 하신 말씀대로, “자기의 죄를 벗어나야만 비로소 남의 죄를 건져줄 수 있기 때문이다(自罪未脫 他罪不贖).”

본문: 숙세의 대근기(大根器)로서 생사문제를 훌쩍 뛰어넘고 성인과 범부를 끊는 이 일이 있음을 안다. 이리하여 삼세여래가 깨달으신 금강정체(金剛正體)와 역대조사가 단독으로 전한 오묘한 마음을 그대로 밟아 향상(香象)과 금시조(金翅鳥)가 된다.

해설: 참선 중에 돈오(頓悟)를 체험하는 일이야말로 우리 종문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과거 전생부터 법의 인연이 있는 숙세의 영골(靈骨)이라면, 한순간 시절인연 따라 안목이 열려 돈오를 노래함으로써 무생(無生)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비로소 원력으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명히 아는 힘이 생기며, 상(相)을 여의고 공부하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법안(法眼)을 눈뜰 수 있는 돈오 즉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체득함으로써 형상 없는 공부를 할 수 있어야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돈오무생하는 일이야말로 내일을 약속하는 열쇠와 같으므로, 물러섬이 없는 공부를 계속함으로써 보살의 원력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마침내 유 · 무상을 뛰어넘어 살활자재(殺活自在)하게 되면, 늘 ‘향기를 뿜어내는 신령스러운 코끼리(香象)’와 ‘용을 잡아먹는 가루다(金翅鳥)’가 되어 불조의 혜명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본문: 요컨대 억천만 부류 위에서 달리고 날며 뭇 흐름을 끊어버리고 하늘을 나는데, 어찌 고니나 제비가 되어 이기고 지고 높고 낮음에 얽매이며, 목전의 전광석화 사이를 비교하면서 이로움과 해로움에 휘둘리겠는가.

해설: 전후제단(前後際斷)하여 사량분별의 망념을 끊어버리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장천으로 날아오르면, 땅에 붙어살면서 시비분별과 취사간택(取捨揀擇)을 일삼는 고니나 제비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공부인이라면 마땅히 세간의 무상한 이로움이나 해로움(利衰), 칭찬이나 나무람(稱譏), 명예나 훼손(譽毁), 괴로움이나 즐거움(苦樂) 등의 팔풍(八風)으로부터 초연하여 흔들리지 않게 된다.

본문: 이 때문에 옛날 크게 통달한 사람은 세세한 일을 기억하지 않고 천박한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 문득 불조의 경지를 높이 초월할 뜻을 세우고 그 누구도 감당해내지 못할 무거운 짐을 걸머지려고 하였다.

해설: 명안종사라면 오로지 납자를 제접하는 본분의 일에 충실하는 법이다. 이 일단의 일은 아무나 걸머질 수가 없지만, 때가 되어 역발산(力拔山)의 힘을 지니게 되면 인천의 안목이자 사표(師表)로서 세상에 출현하여 보현행원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신문3143호/2015년10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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