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유감과 원효 유감

“원효는

제도권 밖의 비주류일 때만

진정한 가치가 있는 분이다

 

공부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닮음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중국 삼국시대 전공자가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으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한국사를 전공하면서부터 역사소설을 읽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소설 속으로 사실적인 역사지식이 섞여 치면서 내용의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며, 설령 내가 쓴다고 하더라도 작가에 한 참 미치지 못할 것임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내 짜증스러운 감정이 이는 것, 이것이 바로 ‘소설 유감’이다.

오랜만에 김선우 작가의 <발원1·2-요석 그리고 원효>라는 소설을 읽게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설 유감을 겪게 된다. 책 표지의 부제가 ‘원효 그리고 요석’이 아니라 ‘요석 그리고 원효’라고 돼 있는 것을 보고, 책을 펼치기 전부터 심상치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역시나 현대적인 관점으로 원효를 재해석한 창의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역사란 어차피, 그 역사를 읽는 현대적인 시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점에서 역사에 대한 현대적 관점 도출은, 소설의 자유 속에서 한껏 날개를 펼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때론 그 소설적인 자유가 자칫 또 다른 고정관념을 만들 수 있게 되는 상황이라면, 이것은 응당 경계되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작가의 원효에 대한 사랑은 극진하다. 이것이 자장과 의상 그리고 김춘추를 원효의 대척점에 놓고, 민중적인 원효상을 그려내기 위한 보수귀족의 표상으로 만들게 하였다. 소설에 필요한 갈등구조를 귀족출신의 자장과 의상 그리고 야심가인 김춘추에게서 구한 것은 매우 창의적이며 참신하다. 그러나 자장이 김춘추에 의해서 몰락하고 의상은 경주불교에 비판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장과 의상을 김춘추를 옹호하는 전위부대와 같은 어용승려로 그려낸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원효야말로 자장계를 제거한 공백 속에서, 김춘추에 의해 대안으로 떠오른 최대 수혜자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즉 소설 속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장과 의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실로 통탄을 금치 못할 크나큰 소설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원효사랑은 원효를 자꾸만 불교의 핵심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원효 같은 파격적인 인물은 주류가 아닌 비판자일 때, 더 멋있고 보다 높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임간록> 권상에는, 동시대를 산 화엄종의 제4조인 청량징관과 이통현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징관은 매우 엄격한 행동양식을 유지한 반면, 이통현은 원효와 같은 활달하고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즐겼다. 그러자 당시의 사람들은 ‘화엄가라면 징관 같아서는 안 되고 의당 이통현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책의 편저자 혜홍은 이에 대해서, ‘이통현이 출가하면 청량처럼 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주류와 비주류의 행동양식에는, 필연적으로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관점인 것이다.

원효시대 원효와 함께했던 혜공·혜숙·대안·사복과 같은 분들은, 모두 비주류의 비판자일 때만 당위성을 가지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소설가는 이들을 자꾸만 주류로 만들고 싶어 한다. 사실 한국불교의 혼란과 문제점은 이러한 측면에서 연유한 바가 크다. 원효는 제도권 밖의 비주류일 때만 진정한 가치가 있는 분이다. 그런데 원효가 닮아가야 할 이상인격이 되면, 한국불교는 미래가 없는 불투명함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원효는 멋있고 용납 가능하지만, 모두가 원효인 것은 극도의 혼란만을 초래할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원효 유감’이라고 말하고 싶다.

원효의 자유를 찬미하기 전에, 왜 붓다는 원효처럼 하지 않았나를 한 번만 생각해보자. 그러면 답은 분명하고 자명해진다. 제도를 넘어선 자유는 방종이며 무책임한 혼란일 뿐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종교인에게 보다 엄격한 윤리적인 기준을 요청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원효는, 현대의 한국불교에서는 이상인격이 될 수 없는, 버려야만 할 대상일 뿐이다. 원효는 공부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닮음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소설가는 소설의 자유 속에서 이 부분을 즐길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소설가의 권리이며 특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지적하는 것은 무례한 월권일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것을 비판하는 것 역시 출가인의 권리이며 의무라는 점 역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원효 유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신문3137호/2015년9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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