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응스님 ‘깨달음과 역사’ 발간 25주년 기념세미나서 주장

이날 세미나에는 100여 명이 참석했다.

오늘날 한국불교를 지탱하는 중심축을 꼽으라면 깨달음이다. ‘확철대오’라는 추상적인 표현 속에서 어느덧 깨달음은 고귀하고 다다르기 어려운 경지에 이르렀다. 깨달음에 대한 막연함이나 모호함에서 벗어나,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으로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은 저서 <깨달음과 역사> 발간 25주년을 기념한 학술세미나에서 이같이 밝혔다. 오늘(9월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세미나는 현응스님의 기조발제와 함께 조성택 고려대 교수,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교수, 정경일 새길기독교사회연구원장의 토론으로 진행됐다. 

교육원장 현응스님

기조발제를 맡은 교육원장 스님은 깨달음을 높은 경지로 격상시킬 것이 아니라 공성과 연기성만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해도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마하박가>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삶의 괴로움을 연기적 관점 즉 원인, 조건, 결과, 생성, 소멸로 파악하는데 이렇게 통찰하는 내용이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서술돼 있다. <하단에 발제문 전문 첨부>

스님은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몸과 마음의 고준한 경지’라는 높은 단계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지만,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며 “부처님 자신도 논리적 사유와 성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고, 녹야원 첫 설법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고 납득시키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며칠”임을 강조했다. 이처럼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기 때문에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게 스님의 견해다.

불교개론서를 통해 공과 연기의 개념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초기경전을 통해 부처님 가르침을 직접 찾아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공과 연기를 이해했다면, 그 내용들을 현대의 삶들의 문제에 바로 적용시키는 과제가 남아 있다. 연기를 잘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역사는 방향과 내용을 선택해 구체적으로 행위하는 것을 말한다. 윤리나 정의, 평화, 공정 등이 역사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보겠다. 이는 곧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의 영역이다.

스님은 “깨달음의 문제는 역사의 영역과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깨달음만 있고 역사의 영역이 없으면 소승적 아라한일 뿐이고 보디(깨달음)가 없는 역사행은 범부중생의 삶일 뿐”이다.이 둘이 결합해야 비로소 ‘보디사트바’ 즉 보살이 된다. 스님은 “연기와 공을 잘 이해하는 깨달음을 얻어 존재들의 변화성과 관계성을 통찰함으로써 실재의식으로부터 해탈한 자유정신을 얻은 자가 아라한”이며 “이런 이해해 도달한 아라한이 그 가 살고 있는 역사에 현실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마음을 내어서 실제로 각종 바라밀행을 행하는 사람을 일러 보살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불교의 모습은 깨달음과 역사의 영역이 분리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님은 “한국불교는 깨닫는 방법에만 몰두하고 있지 삶을 설명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깨달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다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현재의 한국불교의 모습은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조성택 고려대 교수

토론자로 나선 조성택 교수도 ‘이루는 깨달음’이 아닌 ‘이해하는 깨달음’에 대한 현응스님의 견해에 공감했다. 그는 “석가모니부처님은 ‘도인’이 아니라 행동가로, 그래서 부처님을 가리켜 ‘명행족’ 즉 지혜와 실천을 두루 갖춘 분이라고 하는 것”이라며 “지금의 한국불교는 지혜만을 추구할 뿐 실천 없는 불교가 돼 버렸다”고 꼬집었다.

특히 깨달음을 체험으로 보고, 체험한 깨달음만을 유효하다고 보는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언급하며 “깨달음을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특권화 시켰다”며 “이는 독단적 오만이며 수행의 일상성과 사회성을 도외시하는 편견”이라고 비판했다.

조 교수는 “현응스님이 주장하는 ‘이해하는 깨달음’이란 사물을 피상적으로 보는 것(見)이 아니라 투철하게 보는 것(照見)이며 이는 곧 깨달음”이라며 “이 깨달음을 깊이 실천하는 것(行深)이 바로 나와 세상을 두루 구제하고자하는 보살행”이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현응스님의 ‘이해하는 깨달음’이란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과 미래 희망을 만들기 위한 스님의 신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교수

홍창성 교수는 ‘깨달음과 자비 그리고 깨달음과 열반 산출성의 원리’를 주제로 한 토론문에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중심인 대승불교의 자비행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깨달아서 열반에 이른 자들이 무엇이 모자라 중생구제라는 버거운 짐을 져야 하는지”와 무한한 자비심이 어디서 왜 그리고 어떻게 솟아나는지를 살펴봤다.

“깨달음이 자비심을 필연적으로 불러오지 않는다”고 본 그는 “자비심은 깨달은 순간 자기배려심으로부터 경험적으로 나온다”고 봤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자기배려심 또는 사심 없는 배려심에 의해 발생하는데, 자비심은 사심 없는 배려심으로 볼 수 있다. 깨달음은 무아와 연기에 대한 진리를 이해한 것인데 깨달은 이들은 무아를 받아들인 상태이기 때문에 사심 없는 배려심만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들은 자심 없는 배려심, 즉 자비심으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애쓴다.

결국 열반에 든 깨달은 이들이 자비행을 실천하는 것은, 불자라면 모든 유정물이 깨달음과 열반을 얻음으로써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고, 다른 유정물들의 깨달음과 열반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행위하는 것이 언제나 좋고 옳다고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게 홍 교수의 설명이다.

정경일 새길기독교사회연구원장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장은 현응스님이 이야기하는 깨달음과 역사, 즉 보디사트바에 대해 질문했다.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둘 혹은 복수의 집단이 있을 때, 그리고 그 대립이 강자와 약자사이의 것일 때 보살은 약자편을 들고 강자에 맞서는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을까”다.

이에 대해 현응스님은 “자비를 본질로 하는 불교라면 강자와 약자가 대립할 때 정의에 대해 답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한국불교의 현실은 깨달음에 대해서만 얘기할 뿐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미비하다”고 답했다.

이어진 토론시간에도 다양한 논의가 이어졌다.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과 관련해 홍 교수는 현응스님에게 “스님이 만약 공과 연기를 깨달은 버스 운전자라면, 혹은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보살행을 할 것인지”를 물었다. 스님은 “깨달았다고 해서 버스운전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금리를 인상하거나 정치를 할 때는 사회과학적 통계나 판단을 기준에 두고 해야지 깨달음의 내용을 적용시키긴 어렵다”고 답했다. “깨달았다고 해서 사회적 성공이 보장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의 존엄성은 훼손되지 않는다”며 “불교의 무상은 허망함을 통해 연연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며 문제를 객관화 시키고 유연하게 보는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제열 법사는 “현응스님의 주장이 깨달음을 이해의 영역으로 만들고 선정도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경전적 근거가 없다”고 문제제기했다. 이에 대해 현응스님은 “대승불교 대표경전인 <법화경> 내용을 니까야와 아함경 어느 곳에도 찾기 어렵다고 해서 <법화경>을 무시할 수 있냐”고 반문하며 “대승의 방편바라밀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지금의 한국불교는 삼매와 선정에 갇혀 있는 게 문제”라며 “삼매나 선정에 들지 않아도 공과 연기를 이해하고 윤리적 성찰을 통해 진중해질 수 있다”며 삼매와 선정만이 깨달음에 이른다는 견해에 반박했다.

현응스님은 “깨달음을 높은 경지로 격상시키지 말자”며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자는 말이 아니라 공과 연기정도만 이해해도 충분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임을 강조했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깨달음의 내용이나 역사에 무관심하고 깨닫는 방법에만 몰두하고 있는 빈곤한 상황”이라고 지적하며 존재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자비행을 실천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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