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림 방장스님 하안거 해제법어

■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원명스님

법성산 길목에서

벗어나지 않길 …

 

 

萬丈寒潭徹底淸

錦鱗夜靜向光行

和竿一掣隨鉤上

水面茫茫散月明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낚싯대 드리우고 맑은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비단잉어는 고요한 밤 달빛을 따라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 순간 낚싯대를 잡아챌 것 같으면 퍼덕퍼덕하며 솟구치리니 장엄하여라. 아득한 수면위로 환희롭고 영롱한 달빛이 쏟아지리라.

 

수행자는 낚시꾼입니다. 어떤 낚시꾼이냐 하면 화두는 낚시 바늘이 되고 무심으로 밑밥을 삼았습니다. 까마득한 천 길 낭떠러지 위에 아무리 오랫동안 앉아있다 해도 미동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봄에 바닥까지 훤히 꿰뚫어 보이는 연못입니다. 너무나 맑고 투명해 어떠한 눈 속임수도 통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철저한 무심이라는 밑밥이라야 주인공 신어(神魚)를 유인할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분별하는 마음이 일렁이면 곧바로 숨어버립니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예리한 일념 화두의 낚시 바늘을 드리우고 모든 것과 혼연일체가 되어 성성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있노라면 밝은 달빛에 매료되어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신어는 비늘을 번뜩이며 물위로 올라올 것입니다. 유유히 헤엄을 치다가 의심스럽거나 경계할 만한 것이 없다고 여긴 신어는 드디어 먹이를 덥석 물게 됩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순식간에 낚아채 올려야 합니다. 그러면 일념화두의 바늘에 걸려 솟아오르며 푸득거리는 모습에서 죽음의 두려움이 아니라 무애자재한 해탈의 한바탕 춤사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푸득거릴 때마다 달빛을 머금은 물방울이 장엄하게 아득한 수면위로 떨어져 내립니다. 이는 생사윤회와 번뇌 망상의 미운에서 벗어나 광명으로 충만되는 환희의 순간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법석은 모든 대중이 90일 동안 주인공 신어를 낚아 올리기 위해 부단히 애쓴 것에 대한 각자의 살림살이를 판단해 보는 자리입니다. 수행의 묘는 명철한 직관력으로 깨닫기 전에는 멈추지 않겠다는 용맹심에 있습니다. 비워낼 것은 철저하게 비워내서 가마솥에 얼음을 던져 넣은 것처럼 흔적을 남기지 말고 섬세함에 있어서는 바늘을 던져 겨자씨를 맞추는 정확함이 있어야 합니다.

아직 미진한 것이 있다면 오늘 해제는 마음을 다잡는 의식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옛 부터 말하기를 한 자식이 출가하면 구족이 천상의 낙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눈뜬 수행자가 되지 못한다면 구족이 지옥의 고통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막중한 짐을 짊어지고 이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모두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斜風時撲面

細雨又沾衣

杖拂垂林露

山中獨自歸

비껴 부는 바람이 얼굴에 불어오는데 가랑비는 나그네의 옷을 적시는구나. 지팡이로 휘적휘적 풀끝에 이슬을 떨치면서 유유히 홀로 산중으로 돌아 왔노라.

 

다시 한 번 간곡히 바라노니 모두가 법성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벗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 해인총림 해인사 방장 원각스님

공부도 때를 놓치면

후회할 일만 남을 것

 

 

去年貧未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貧無卓錐之地

今年貧錐也無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금년 가난이 비로소 진짜 가난이네. 작년 가난은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 금년 가난은 송곳조차 없어졌구나.

 

오늘은 을미년 하안거 해제일입니다. 대중은 각자 본분상(本分上)에서 열심히 정진하였습니다. 이제 3개월 동안 공부한 살림살이를 점검(點檢)해 볼 시간입니다. 대중은 철저히 가난해 졌습니까? 화두가 독로하여 대의단이 타파되어서 탐·진·치 삼독과 일체 번뇌 망상이 다 떨어져 나가서 텅텅 비어 한 물건도 없어져야 ‘반분의 득(半分之得)’이 있다할 것입니다. 떨치고 떨쳐서 이 몸과 이 마음마저 다 떨쳐버려서 떨쳐버렸다는 생각마저 떨쳐버려서 천하의 가난뱅이가 되어야 진정한 공부인(工夫人)이라 할 것입니다. 철저한 가난을 체득한 자라야 염라노자의 밥값 계산에 응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산영우(潙山靈祐)선사가 하루는 제자인 향엄지한(香嚴智閑)에게 물었다. “그대는 백장화상의 처소에 살면서,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하고 열을 물으면 백을 대답했다고 하던데 이는 그대가 총명하고 영리하여 이해력이 뛰어났기 때문인 줄 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생사(生死)의 근본이다. 부모가 낳기 전 그대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천하의 대강백 출신인 향엄스님은 이 질문에 그만 말문이 탁 막혀버렸다. 방으로 되돌아와 평소에 보았던 모든 책을 뒤져가며 적절한 대답을 찾으려고 애를 써 보았으나 끝내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림의 떡은 주린 배를 채워주지 못하는구나” 하였다. 그런 뒤로 향엄스님은 여러 번 위산스님에게 그 답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위산스님은 말하였다. “만일 그대에게 말해준다면 그대는 뒷날 나를 욕하게 될 것이다. 내가 설명하는 것은 내 일일뿐 결코 그대의 수행과는 관계가 없느니라.”

향엄은 마침내 평소에 보았던 책들을 태워버리면서 다짐하였다. “금생에는 더 이상 불법을 배우지 않고 이제부터는 그저 멀리 떠돌아다니면서 얻어먹는 밥중노릇이나 하면서 이 몸뚱이나 좀 편하게 지내리라.” 눈물을 흘리면서 위산을 하직하고 곧바로 남양(南陽)지방을 지나다가 남양혜충(南陽慧忠)국사의 탑을 참배하고는 마침내 그곳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하루는 마당을 청소하다가 우연히 기왓장 한 조각을 집어 던졌는데 그것이 대나무에 ‘딱’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는 활연대오(豁然大悟)하게 되었다.

향엄선사는 거처로 돌아와 목욕재계하고 멀리 계시는 위산스님께 절을 올리고는 말하였다. “스승님의 큰 자비여! 부모의 은혜보다 더 크도다. 만일 그 때 저에게 설명해 주셨더라면 어찌 오늘의 이 깨달음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와 같이 게송을 읊조렸다.

 

一擊忘所知 更不假修冶

動容揚古路 不墮憔然機

處處無從跡 聲色外威儀

諸方達道者 咸言上上機

한번 부딪치는데 아는 바 모두 잊으니 다시 애써 더 닦을 것 없구나. 일상생활에 옛길이 들어나니 초췌한 처지에 빠질 일 없어라. 곳곳이 자취가 없으니 빛과 소리 밖의 위의로다. 제방의 도를 아는 이들이 모두가 최상의 근기라 하리.

 

위산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서 말하였다. “향엄수좌가 드디어 깨쳤구나!” 이 때 향엄의 사형인 앙산혜적(仰山慧寂)이 말하였다. “제가 다시 한번 점검해 보겠습니다. 사제인 향엄스님을 만나 스승님이 사제의 오도송을 칭찬하시던데, 그대가 다시 한번 읊어보게나.” 향엄이 일전의 게송을 읊었다. 그런데 이 게송을 들은 사형 앙산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제는 여래선(如來禪)은 깨쳤지만, 조사선(祖師禪)은 꿈에도 깨닫지 못했네.”

이에 향엄스님이 다시 게송을 읊었다.

 

我有一機 瞬目視伊

若人不會 別喚沙彌

나에게 한 기틀이 있으니 눈을 깜짝여 그에게 보였다가 만약에 알아채지 못한다면 따로 사미를 부르리라

 

이 게송을 듣고 향엄의 깨달음을 인정하고 앙산이 돌아와 위산선사에게 고하기를 “스님, 기뻐하십시오. 지한 사제가 조사선을 깨쳤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가난은 번뇌망념이 다 떨어져 나간 수행의 경지를 표현한 말이지만, 수행자에게 있어서 가난은 수행가풍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곁들어 말씀드립니다. 옛말에 “배고프고 추워야 도 닦는 마음이 일어난다(飢寒發道心)”고 하였습니다. 송광사 구산스님께서도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한다는 법문을 자주 하셨습니다. 발심이 그 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서양에서는 ‘자발적 가난’이란 말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부자로 풍요롭게 살 수 있지만 일부러 가난하게 근검절약하며 정신적이 삶을 추구해 간다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자본주의 폐해가 극에 달한 지금에 와서야 ‘자발적 가난’이라는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지만, 우리 부처님은 2500년 전에 이미 ‘청빈(淸貧)’의 가풍을 세우셨습니다. 청빈이란 굳이 요즘 말로 하면 ‘맑은 가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를 닦기 위해서는 일부러라도 가난해져야 하고, 맑은 가난인 청빈가풍이 갖추어져야만 제대로 수행가풍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身貧未是貧 心貧始是貧

身貧能修道 名爲貧道人

몸이 가난한 것은 가난이 아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진실로 가난한 것이다. 몸이 가난해도 능히 도를 닦는다면 이름하여 청빈한 도인이라 하리라.

 

오늘 해제를 맞이한 총림의 대중들이여! 운수납자(雲水衲子)란 떨어진 납의를 입고 걸망 하나에 지팡이 하나 짚고 구름처럼 물처럼 떠돌아다니며 오로지 화두(話頭) 하나 챙기는 수행자란 뜻이 아니겠습니까.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아무 상관없이 묵묵히 수행해가는 납자가 되어야 합니다. 옛날 선사 스님께서 강조하시던 ‘최잔고목(摧殘枯木)’이란 말이 있습니다.

 

摧殘枯木依寒林 幾度逢春不變心

樵客遇之猶不顧 郢人那得苦推尋

부러져 꺾인 나뭇가지 찬 숲에 의지하니 봄이 와도 요 모양 요 꼴, 나무꾼도 그대로 내버려두는데 목수가 가져간들 무엇에 쓰겠는가?

 

이 게송은 마조도일의 제자인 대매법상(大梅法常)의 게송인데, 법상선사는 깊은 산속 외진 산꼭대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토굴에서 평생을 어렵고 가난하게 수행한 공부인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최잔고목’이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모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수행자란 누가 알아준다고 공부하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공부하지 않는 그런 못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말없이 이 공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마음자세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최잔고목과 같이 되어서야 참으로 공부를 지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납자들은 옳고 그름, 칭찬과 비방, 가지고 못 가짐에 상관없이 오로지 공부에 매진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원효대사도 말씀하시기를 “아무도 막지 않는 천당에(無妨天堂) 가는 사람이 적은 것은(少往至者) 삼독번뇌(三毒煩惱)로 재물을 삼기 때문이며(爲自家財), 유혹이 없는 악도에(無誘惡道) 떨어지는 사람이 많은 것은(多往入者) 몸뚱이 편하게 하기 위해 오욕락으로(四蛇五欲) 마음의 보배를 삼기 때문(爲忘心寶)”이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예로부터 수행자의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가난은 수행자를 수행자답게 만들어주는 보약입니다.

오늘이 해제라고 하지만 도를 성취하는 그날이 진정한 해제날인 것입니다. 해제했다고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항상 언제 어디서나 열심히 정진하는 납자가 되어야 합니다. 화두를 타파하여 확철대오(廓撤大悟)하는 그날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음을 다잡아 애써 정진하는 참수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달마대사가 이르기를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外息諸緣),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으며(內心無喘),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心如墻壁), 가히 도에 들어 갈 수 있다(可以入道)”라고 하였습니다. 육근(六根) 육진(六塵) 경계에서 놀아나 밖으로 복잡한 인연을 만들지 말고, 안으로 공연히 헐떡증을 내어 망집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이, 수행해서 결정코 확철대오(廓撤大悟)하여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발심이 철썩 같아야 도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온 몸과 온 목숨을 바쳐 한번 죽어야 크게 살아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덕이 ‘현애살수(懸崖撒手)’가 기특한 일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得樹攀枝未足奇

懸崖撒手丈夫兒

水寒夜冷魚難覓

留得空船載月歸

가지를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족히 기이한 일이 아니다. 매달린 벼랑에서 손을 놓아버릴 수 있어야 대장부다. 물은 차고 밤은 냉랭한데 고기는 찾을 수 없으니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도다.

 

‘현애살수’란 천 길 낭떠러지에서 나무에 매달린 손을 뿌리친다는 말입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라(進一步)”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결제 때도 목숨 바쳐 공부하지 않고, 해제 때도 목숨 바쳐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느 세월에 생사를 해탈하여 중생을 구제하겠습니까. 모든 일은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공부도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때를 놓치면 후회할 일만 남습니다.

 

百計千方只爲身

不知是身塵中塵

莫言白髮無言語

此是黃泉傳語人

백계천방이 오직 이 몸을 위한 것 이 몸은 티끌 가운데 티끌인 줄 알지 못함이로다. 백발이 말이 없다고 말하지 말아라. 이것이 황천객이 전하는 말이로다.

 

■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스님

뭐를 하든지, 늘상

본마음 확인하시라

 

첫 번째 죽비를 세 번 치면 결제이고, 두 번째 죽비 세 번 치면 해제이다. 그러면 결제와 해제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앞에 먼저 치고, 뒤에 친 차이 밖에 없지, 앞에 쳐도 소리가 세 번 났고, 뒤에도 역시 세 번 소리가 났다.

우리가 도를 닦고. 마음을 닦고. 불법을 수행하는 것은 마음을 찾기 위해서다. 그 이론이 불법(佛法))이다. 마음을 찾는다, 도를 찾는다 그 명칭이나 표현은 각각 다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하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결제를 하고 오늘 벌써 석 달이 되어 해제를 하게 됐다. 결제를 시작했을 때의 자기 마음과 밤낮 할 것 없이 잠을 안자고 정진한 지금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결제를 하고) 지금까지 자기 마음을 생각해보면 누구보다 스스로 더 자기 마음을 알 것이다. 결제를 시작했을 때의 내 마음이 지금은 어떠한가. 그리고 부지런히 수도하고 일상에서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하고 공양하고, 청소하고, 또 선원에서는 죽비를 치고 입선과 방선을 하고, 강원에서는 경전을 공부하면서 그랬던 자기가 석 달을 지나고 보니, 어떻게 되어 있는가.

석 달 전에는 무언가 욕심도 많고, 감정도 많고, 명예심도 있었는데, 부처님의 교리를 통해 부처님의 모든 사리를 분명한 이치로 볼 때 ‘아하 내가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고 있구나’를 알았고, 부처님의 가르침 한마디 한마디에 한 생각을 돌이켜 사로잡혀 있던 육신에서 벗어난 마음, 즉 자기를 들여다보고, 생사해탈하고자 했다.

자기 본연의 마음을 잊고, 사방에 돌아다니면서 보고 듣는 속에서 온갖 감정이나, 욕심이나, 또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생사윤회라고 한다. 모든 욕심의 감정에 물들지 않는 본연의 마음이 있다. 그것을 찾고 그것을 다시 찾지 못했을 때는 물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수도의 목표이다.

기도, 염불, 주력, 독경 선행도 괜찮지만, 수도의 첫 번째 요점은 근본을 먼저 알아야 한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도 “마음을 알지 못하고 공부를 하는 것은 공부한 만큼 수고만 할 뿐이지 아무 이익이 없다”고 했다. 기도, 염불, 주력 등 뭐를 하든지, 늘상 (그것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본마음을 확인해야 한다.

* 8월27일 봉행된 ‘금정총림 을미년 하안거 결제법회’에서 금정총림 방장 지유스님의 법어 내용 일부를 요약했다.

불기 2559년 을미년 하안거 해제법회가 음력 7월 보름인 지난 8월28일 전국 8개 총림을 비롯한 주요 사찰에서 봉행됐다. 팔공총림 동화사에 주석하고 있는 진제 종정예하와 각 총림 방장 스님들은 이날 일제히 법어를 발표하며 쉼 없는 정진, 타파한 화두를 중생들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할 것을 당부했다. 조계총림 송광사는 이날 오전까지 법어를 발표하지 않았다.

 

 

 

“선원 밖은 모두를 받들어 모시는 자세여야”

 

■ 쌍계총림 쌍계사 방장 고산스님

“묘법을 설함 없이

태평을 이루도다”

 

丈夫自有衝天志

不向如來行處行

樹木凌空成大樑

百花滿發振淸香

장부가 스스로 하늘을 뚫을 뜻이 있어서 여래께서 행하신 바 곳을 행하지 아니하도다.

나무는 높이 자라서 대들보를 이루고

백가지 꽃은 만발하여 맑은 향기를 떨치도다.

해제는 다만 일대사를 마침이니 칠통을 타파하고 진성을 발명해서 위로는 네 가지 중한 은혜를 갚고 아래로는 삼악도의 고통을 제도하는 것이 다만 당인의 수중에 있음이요, 부처님에게 있지 아니하며 조사에게도 있지 아니함이니 대중은 또 일러라. 도리어 가히 일을 마쳤는가? 이에 바로 알지 못했을진댄 이를 어찌 해제라 하리요.

 

人人本有眞法身

亦無去來不生滅

虛明自照無障碍

自度他度淨國土

게송으로 이르시되, “사람마다 본래 있는 진법신은 또한 오고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생멸도 없도다. 허명이 스스로 비추어 장애가 없으니 자신도 제도하고 다른 이도 제도하여 국토를 청정케 하리라.”

인생백년이 다만 호흡 간에 있거늘 남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감에 무슨 급한 일이 있으리요. 이 말세에 등한이 놀다가 거리에 홀로 앉아 탄식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

 

衲子正坐靜黙兮

無上大道於此成

無說而說眞妙法

度脫萬類成太平

게송으로 이르시되, “납자가 정좌하여 묵묵함이여, 위없는 대도를 이에 이루었도다. 진실한 묘법을 설함 없이 설해서 만류를 제도하여 태평한 세상을 이루도다.”

 

■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설정스님

하는 일 모두가

텅 비고 비었는가

 

을미년(乙未年) 해제일(解制日)이다.

세월은 유수(流水)처럼 흘러 다시는 돌아 올수 없는 영겁(永劫)의 바다 속으로 빠져버렸다.

공부가 성숙(成熟)되어 일 마친 사람이야 세월이 가고 오는데 무슨 상관이랴 마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 그리고 할 일이 많은 사람에게는 참으로 아까운 시간들이다. 다이아몬드를 섬으로 주고도 살수 없는 귀한 시간들이 가고 있다. 부질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 말고 진실을 향해 갈일이다.

부처는 무엇이고 법(法)은 무엇이며 도(道)는 무엇인가?

영원히 순수하여 조작이 없는 것이 부처요, 일체 번뇌가 다 떨어져 시방세계(十方法界)를 환히 비추는 것이 법(法)이요, 일체의 탁하고 더러움이 다 쓰러져 전후제(前後際)가 끊어져서 홀로 드러나 당당하고 분명하여 법(法)과 법(法)이 상응(相應)하고 티끌과 티끌이 해탈하여 영겁(永劫)토록 자유(自由)하고 걸림이 없는 도리더라.

말인 즉은 부처와 법(法)과 도(道)가 셋으로 나눴지만 실은 하나다.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다. 이렇게 완전한 생활은 아집(我執)이 사라지고 탐욕이 없어지며 다툼도 없어지고 명성과 이익을 위해 살지 않으므로 완전한 사람이요. 진실한 사람, 즉 부처다. 이럴 때 내재(內在)의 연꽃이 활짝 피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경(究竟)이며 우리가 성취해야 할 경지이다. 여기에는 희망도 고통도 미래도 지혜도 미련함도 탐진 오욕도 없다. 오로지 당하(當下)에 꽃이 피는 고요하고 상서로운 곳이다.

 

朗朗輝光照大千

東西南北常安然

諸般所作皆空空

蕩蕩無碍現古風

 

휘영청 밝은 빛이 대천세계를 비치고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도 편안하여라.

하는 일 모두가 텅 비고 비어

휑 트여 걸림 없이 옛 가풍을 드러내더라.

 

■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선스님

본질적인 공부

참선 생활화해야

 

 

영산회상에서 대중들에게 연꽃을 들어 보이심이여!(靈山會上擧拈花)

다자탑 앞에서 자리 한 켠을 나누어 앉으심이여!(多子塔前分半坐)

입멸직후 두발을 곽 밖으로 내 보이심이여! (沙羅雙樹下槨示雙趺)

 

이를 두고 세존께서 이심전심으로 법을 전하신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불타고 있는 현실 세계 속에서 인류가 해결하지 못하는 고통 앞에서 삼처전심이 무슨 도움이 되고 있습니까? 그래서일까 역대 선지식들 중에는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이와 같은 전법수수가 없다고 하시며 조사 스님들 역시 법을 받거나 전해 주신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지금 받고 있는 온갖 고뇌와 고통스런 삶속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신비스런 얘기로만 들립니다. 이 두 가지 불신(不信)의 의미가 각기 다른 내용이니 전자는 깨침으로 알고 믿으면서 부정하는 또 다른 가르침이며 후자인 우리는 삶에 어떤 도움도 느끼지 못하면서 모르니까 그냥 부정하는 생각입니다.

어디 전법 계승일 뿐이겠습니까? 지금까지 내려오는 선서(禪書) 내용들 중에 엉뚱한 역설적 문답이라던지 방과할 눈을 껌벅이고 미간을 찌푸리는 등등의 모습들이 초록은 동색이듯이 한 내용 한 모양으로 통하는데도 본색종사들의 그와 같은 근원적인 소식을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우리네 삶과 무관한 것입니다. 게다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각 종파들의 상업적 홍보 경쟁 같은 모습도 혼란스럽기만 하고, 경제와 민주화 종교까지도 동의어가 되어버린 자본주의 종교 앞에 청정화합 수행승단이 되지 않고 상벌이 분명치 못한 종단 현실 때문에 참선 수행자들과 깨달음에 대한 반감마저 생겨나고 있으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각자의 욕망성취에 끝없이 바쁜 세상입니다.

수행과정도 없는 우리가 선각자들의 깨달은 결과나 그분들의 행적을 또는 제자들이 기록해 놓은 서적들을 자습서처럼 보고 베끼고 외우고 흉내내는 것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하물며 시공을 초월한 창조적 변용으로 요익중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자습서 베끼는 어릴 적 공부가 생각납니다. 이럴 때 일수록 근원적인 공부에 충실해야 합니다.

깨침은 있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자각각타 각행원만(自覺覺他 覺行圓滿)은 대승불교의 핵심이 아닙니까?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며 그대로가 부처라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이 적고 교리행과를 지식으로만 느끼고 자증자오(自證自悟)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천하는 원력이 없거나 미약해서 문제입니다.

해제기간이라 해서 방학을 맞는 학생들처럼 자유로워지는 것은 괜찮지만 실수해서는 안 됩니다. 선원 밖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모두를 받들어 모시는 자세여야지 작은 경험을 안다는 듯이 여유 부리면 안 됩니다. 독재자들처럼 자기 위상만 높게 책정하여 대중을 외면하는 불통자가 되면 안 되듯이 설사 최상의 간화선자라 할지라도 자기 위상을 스스로 훼손하면 전대중과 상식도 불통하는 오만한 자가 됩니다.

청정치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면서 말만 앞세워 삼보정재만 축내는 자가 된다던지 어떤 조직의 계파나 수장이 되어 개인의 권위와 권력으로 군림하는 자세가 활개친다면 신행공동체는 파괴되고 나아가 민주사회도 병들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가 있다고 해도 실천의 눈높이를 낮춰서 오랜 하심으로 행세하는 수행자이어야 합니다. 세간의 일체 현상은 고(苦)이고 무상무아가 근본입니다.

그러나 자기 숙습으로 얼룩져서 여러분의 진여자성이라는 순수성의 농도가 이미 비자연산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얼마나 많은 실험을 통해야 수많은 고뇌를 염화미소로 해결해 버리는 진공묘유의 불생불멸인 에너지 바다, 순수성이 회복될까요?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종지(宗旨)를 체득해야만 되는 본질적인 공부 참선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일체고를 벗어나고 나와 인류가 공동발심으로 행복해지는 삶의 길입니다. 우리의 삶이 열반이고 해탈입니다.

혁범성성(革凡成聖) 부처님의 삼처전심이여! 우리도 자기 개조가 됐습니까? 혁명할 수 없는 사람은 혁명을 못합니다. 자기개조 없이는, 개혁할 수 없는 사람은 개혁을 못합니다. 개선도 못합니다. 크고 넓고 깊고 영원한 순수는 통찰력의 힘입니다.

아 ~ 또 이 산승이 사람들을 피로하게 합니다. 

[불교신문3133호/2015년9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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