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채색 불화 첫 발견

박철상 박사 “19세기 북학파 불교문화 보여주는 그림”

관음상을 잘 그려 당대에도 이름이 높았던 조선화가 형암 김훈(金壎)의 채색 불화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중국과 일본을 거쳐 200년 만에 귀환한 이 불화는 ‘무량수불’을 그린 그림으로, 지난 5월 한 미술품 소장가가 일본 경매에서 구입한 것이다.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했던 김훈의 경우 남겨진 작품이 거의 없어 그림 실체를 확인할 길이 없었는데, 이 불화가 국내로 들어오면서 그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됐다.

고문헌연구가인 박철상 박사는 지난 8월28일 학술연구모임인 문헌과 해석에서 발표한 ‘200년만의 귀환, 형암 김훈의 무량수불’이라는 논문을 통해 이같이 강조했다.

불화 속 부처님의 머리 뒤로는 원광(圓光)이 있고 가사를 걸친 채 서 있다. 오른 손엔 복숭아를 들고 있고 왼손에 불로초로 보이는 물건을 들고 있다. 박 박사는 “특히 얼굴을 보면 정형화된 부처님의 얼굴이 아니라 흔히 볼 수 있는 스님의 모습”이라며 “이는 불교문화가 북학파 지식인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라고 밝혔다.

해외를 떠돌던 이 불화는 어떻게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박 박사는 그림 좌우에 있는 글씨를 통해 그림에 깃든 사연을 찾아냈다. 오른쪽에는 “소재노인의 축수를 위해 형암에게 부탁해 무량수불 일존(一尊)을 공경히 그렸다. 조선의 유최관은 손을 씻고 백 번 절합니다”고 쓰여 있다.

논문에 따르면 이 불화를 제작한 이유는 소재노인의 축수인데, 소재노인은 중국의 학자 옹방강을 지칭한다. 당시는 옹방강이 청나라 학술의 대명사로 불리던 시기로, 김정희는 1810년 연행에서 옹방강과 연을 맺고 귀국했다. 유최관 또한 옹방강을 만나 환대를 받았고, 옹방강이 팔순을 맞자 김훈에게 불화를 주문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박 박사는 밝혔다. 이때가 1813년 2월이다.

그러나 옹방강 사후 그의 수장품은 대부분 흩어졌고 ‘무량수불’ 역시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박 박사는 족자 뒷면에 남아있는 ‘조선화불 해일루장’(朝鮮畵佛 海日樓藏)이란 글씨를 통해 이후 흐름을 추적했다. 박 박사는 “해일루는 청나라 말기 학자인 심증식이 상해에 머물 때 사용한 서재 이름”이라며 “심증식의 수장품은 항일전쟁(1937~1945) 이후 시장에 흘러나왔는데 김훈의 ‘무량수불’ 또한 이때 주인이 바뀌었던 듯하다”고 밝혔다. 이어 “해일루에서 시장으로 나온 뒤 얼마 동안 중국에 남아 있다가, 다시 일본의 한 경매시장에 출현했고 이를 국내 개인이 구입하면서 고향으로 귀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논문에 따르면 김훈은 사대부 출신은 아니었지만 천문학과 불화에 조예가 깊었으며 초의선사, 김정희, 박장암 등과 교유했던 인물이다. 박 박사는 이에 대한 근거로 독립운동가 오세창이 1917년 편찬한 서화가 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들었다. 사전은 김훈에 대해 “중국에 있었더라면 당연히 명류(名流)의 한 자리를 차지했을 텐데, 아무도 없는 물가의 초목처럼 사라져 버렸으니 안타깝다”고 기록했다. “붓질 한 번에 그려 냈는데도 오묘한 모습이 모두 갖춰져 있고 붓질을 두 번 한 곳이 없었다”는 내용도 있어 그의 실력을 짐작케 한다.

박 박사는 “<근역서화징>에 그의 이름이 남긴 했지만 그의 작품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며 “무량수불이 귀환하면서 김훈 이란 이름과 함께 그림에 대한 실체도 확인할 수 있게 돼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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