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령이 보로부두르 순례기4
-자바의 조각가가 아로새긴 붓다이야기

 

천 년도 더 전에 자바의

이름 모를 조각가는 용감하게도

아주 현실적인 표현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분명 부조 속의 이런 장면들이

2600여년 전 카필라성에서

실제로 벌어졌을 테고


 

그 실제상황은

이렇게 조각가의 손끝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이게 보로부두르의 매력…

 

<사진2>

부처님 생애를 마저 살펴봐야겠지요. 이제 본격적으로 사문유관을 통해 수행을 결심하게 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부조에는 병자의 모습이 참 생생하기도 합니다(그림①). 아하, 그런데 유독 흥미로운 장면들이 보입니다. 그건 바로 출가를 꿈꾸고 있는 싯다르타를 붙잡아 두려고 궁궐 속에 그를 가둔 장면입니다(그림②). 쭈그리고 앉은 남자, 날카로운 표정을 지은 남자. 모두들 왕자의 ‘가출’을 감시하는 사람입니다. 그 모습에 푸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천 년도 더 전에 자바의 이름 모를 조각가는 ‘왕자의 가출’을 어떻게 그려 넣을지 얼마나 고민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용감하게도 아주 현실적인 표현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분명 부조 속의 이런 장면들이 2600여 년 전 카필라 성에서 실제로 벌어졌을 테고, 그 실제상황은 이렇게 조각가의 손끝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이게 보로부두르의 매력입니다.

<사진4>

그런데 우리의 싯다르타 태자는 성을 나옵니다. 말발굽소리에 사람들이 깰까봐 천상의 신들이 발굽 아래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그림③). 이후 보리수 아래로까지 나아가는 동안에 벌어진 숱한 사건들, 그 한 장면 한 장면을 더듬어가다가 또 하나의 부조 앞에 멈추고 말았습니다. 보리수 아래에서 보살과 마군의 실랑이 장면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보살의 성불을 막으려는 마군들은 급한 마음에 화살을 쏴대고 그 화살이 꽃송이가 되어 나부낍니다(그림④).

<사진6>

이 장면으로 일은 다 끝났습니다. 폭력을 이기고 살생을 넘어서서 행복과 공생이라는 깨달음의 경지가 펼쳐지는 것이지요(그림⑤). 그렇게 해서 붓다는 탄생했고, 보로부두르 1층 회랑의 상단 부조들은 부처님이 법의 바퀴를 굴리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그림⑥).

보로부두르 1층 회랑의 부처님 일대기는 <랄리타비스타라>라는 불전(佛傳)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이 경은 한문권에서는 <방광대장엄경>으로 통합니다. 1층 회랑을 동서남북으로 장식하고 있는 부조들을 둘러본다는 것은 이렇게 부처님 일대기를 담은 경전 한 권을 읽는다는 말이 됩니다.

휴~.

쉬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보로부두르에는 휴게실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늘을 피할 곳도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너무 더우면 서둘러 내려가 나무 그늘에 숨는 것이 최고입니다. 화장실조차 멀찌감치 떨어져 있습니다. 오직 보로부두르, 이 거대한 탑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적도 아래 자리한 이 거대한 탑은 점점 열기에 달아오르고, 내 온몸의 힘도 다 빠져나갑니다. 그런데 언제까지고 그늘 아래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 보로부두르 어딘가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에 이끌려 다시 돌계단을 올랐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 눈앞에는 <자타카>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를 <자타카>라고 하지요.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들. 물론 그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선량하고 현명하고 남을 위해 희생했고 억울해도 꿋꿋하게 견뎠고 자신의 불행을 다른 이들에게 인생의 교훈으로 삼도록 법문하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십니다. 이같은 이야기 547편이 보로부두르 탑에 새겨져 있다는 정보는 귀가 솔깃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몇 몇 부조를 제외하고는 정확하게 <자타카> 이야기를 읽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학자들이 퍼즐을 맞추듯이 조각조각 찾아 붙였지만 저들도 고심 끝에 포기하고 만 흔적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조들은 아주 사랑스럽고도 익살스런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사진7>

제일 처음에 수다나왕자 이야기가 길게 이어집니다만, 그 부조들을 눈으로 흩으면서 50개 정도를 지나친 뒤에 아주 재미있는 장면과 마주쳤습니다. 정교하게 새겨진 배, 그리고 배에서 내린 남자들과, 그들을 맞이하는 풍만한 몸매의 여자. 그렇습니다. 202번째 자타카인 운마(雲馬)이야기입니다(그림⑦). 배를 타고 무역하러 바다로 나아갔다가 풍랑을 만나 좌초하고, 그러다 야차가 사는 섬으로 흘러들어온 상인들.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불안한 그들 앞에 나타난 아름답고 육감적인 여성들. 이 여성들은 야차였지요. 남편으로 맞아서 즐기다가 새로운 표류자들이 흘러들어오면 예전의 상대남들을 감옥에 가둔 뒤 하나씩 잡아먹는 그 무시무시한….

하지만 상인들은 이런 비극은 꿈에도 모른 채 환락에 젖어 살아갑니다. 그러다 그들 중 단 한 사람이 위험을 감지하고 달아날 길을 모색하는데, 그런 상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하늘을 나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 말(운마)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지요. 그런데 난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관세음보살이 떠오릅니다. “고난이 있을 때면 소리 높여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불러라. 그리하면 고난에서 구제되리라”는 <보문품>의 구절이 보로부두르의 자타카 부조 앞에서 또렷하게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사진8>

한 가지만 더 보여드릴까요? 매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다 보살의 품으로 숨어든 비둘기 이야기, 아주 유명하지요. 비둘기를 구해주려니 매가 굶어죽게 생겼고, 그렇다고 매를 살리자고 비둘기를 내주려니 역시 죽임을 방임하게 될 판이어서 결국 보살은 저울을 가져와 비둘기 몸무게만큼 자신의 살을 떼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시비왕 자타카로 유명한 이 이야기가 보로부두르에 새겨져 있습니다(그림⑧). 저울이 있고 저울 한쪽 접시 위에 비둘기가 올려 있네요. 문자로만 대하던 이야기를 조각으로 만나니 가슴이 일렁일렁합니다. 

[불교신문3133호/2015년9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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