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 정화 : 1954~1960

해방공간 불교혁신의 실패, 6·25전쟁 기간의 불교 위축 등은 이후 불교의 대사회적 활동을 제약하였다. 더욱이 1953년 봄, 승려 이대의 건의서로 제기된 비구·대처간의 사찰 양도 문제의 결렬은 자율적인 타협의 기회 상실을 의미하였다.비구·대처승 대립1954년5월21일, 이승만 대통령의 제1차 불교유시 담화 이후 불교계는 비구·대처간의 대립과 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는 타협과 양보의 부재 이후 타율적인 문제 해결이었다. 더욱 문제시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 이후 나타난 사태에서 불교적인 접근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회법에 의지하고 심지어는 폭력이 난무하는 사태를 야기하였음은 불교의 명예를 저버린 처사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로부터 시작된 불교계 분규(정화, 법란)는 불교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불교재산을 망실시킨 해방이후 최대의 치욕이었다. 이러한 성격을 갖고 있었던 이 시기분규의 개요를 정리하겠다.1954년 봄, 불국사 법규위원회에서 검토된 사찰 양도를 거부하였던 비구 수좌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가 내려지자 그를 불교정화로 활용키위한 기민한 대응을 하였다. 이승만의 유시는 비구승의 축출을 의미하였다. 선학원의 수좌들은 불교정화운동의 발기, 정화운동발기인대회의 조직, 재경 비구승 중심의 교단정화운동추진준비위원회 구성,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 등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1954년 8월 24~25일 선학원에서는 64명의 비구가 참여한 가운데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가 개최되었으며, 그 대회에서는 불교정화의 방침을 결정하고 종헌의 제정위원과 추진위원을 선정하였다.한편 당시 종권을 장악한 집행부측에서도 이승만의 유시가 있자, 일단 6월20일 교무회의를 개최하여 승단을 수도승단과 교화승단으로 구분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종헌을 제정하였다. 이는 곧 종단을 주도하였던 대처승들도 변화된 현실을 수용할 입장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비구승들은 이 기회를 활용하여 불교 정화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들이 의도한 정화는 대처승의 축출이었다. 그러나 대처승들은 교화승이라는 명분으로 승단에 잔류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즉 문제의 출발부터 서로 다른 의도가 있었다. 이런 이질적인 입장을 조율키 위한 양측의 회담이 1954년10월10일에 열렸으나 결렬되었다.비구측은 불교 정화를 위해 수 차례나 경무대를 방문하고, 태고사(현 조계사) 입주·점거 시도 등을 추진하였다.증폭되는 갈등대처측은 국회에 청원서 제출, 태고사 재탈환 등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종단 주도측은 독신승 중심의 사찰 운영을 선언하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정화에 대한 유시로써 자신의 입장을 계속하여 표명하였다. 그런데 당시 비구측은 기존 집행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키 위해 조계종의 종조를 지눌로 변경하였다. 즉, 비구측의 보조종조론과 대처측의 태고종조론이 대립하였다. 비구측의 논리는 환부역조(煥父易祖)로 지칭되면서 대처측의 거센 비난을 받았으며, 당시 종정이었던 만암스님은 환부역조를 비판하며 정화의 방법을 비판하였다.비구·대처측의 대립은 어느 한편이 일방적으로 승복될 상황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불교 교리에 대한 해석의 자의성, 비구·대처 양측의 자기 중심적인 사찰 운영권 장악 의지가 게재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불교계가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고, 문제가 사회적 차원으로 비화되자 주무부서인 문교부는 수수방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문교부는 조정을 시도하였는데, 1955년2월4일 문교부 장관실에서 양측의 대표 각 5인이 참석한 가운데 사찰정화수습대책위원회가 열렸다. 기존 종단인 총무원측(대처)에서 권상로, 임석진, 김상호 등이 선학원(비구)측에서는 효봉·청담·경산스님 등이 참석하였다. 당시 그 회의에서 결의한 승려 자격 8대 원칙은 독신자, 삭발염의자, 불구가 아닌 자, 백치자가 아닌 자, 3인 이상의 승려단체 생활을 하는 자, 4대 범계(殺, 盜, 淫, 妄)를 하지 않는 자, 술과 고기, 담배를 하지 않는 자, 25세 이상자 등이었다. 이후 정부(문교·내무부)에서는 이 원칙에 의거, 사찰정화대책 실시 요령을 통첩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그 조처는 정상적으로 이행되지 않았다. 비구측의 단식 투쟁, 대처측의 교화승 위상 조정 등이 그 암초였다. 또한 그 와중에서 양측의 충돌로 유혈사태가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사태 해결을 위해 국회에서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한편 대처측은 그 대립의 근거지를 법륜사로 옮겨 독자적인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문교부에서는 양측을 조정시키기 위해 사찰정화대책위원회를 5차례나 개최하였으나 실마리는 풀리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문교부는 비구승 중심의 사태해결에 나서 비구측이 점차적으로 사찰정화에 나섰다. 이에 힘입은 비구측은 1955년8월12일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종헌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비구측 중심으로 진행되자 대처측은 마침내 문제를 법원의 소송제기로 해결하려고 하였다.이후 각 사찰에서는 비구·대처간의 사찰 장악을 위한 유혈 충돌이 있었고, 간혹 승려의 자살 소동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대세는 양측이 세속적인 법을 통한 정당성 확보를 위한 치열한 갈등이었다. 한편 정부의비구승 중심의 정책이 추진되었지만 각 사찰 및 교계 사업을 담당한 기업체·재단의 재정은 상당부분 대처승측이 관리하였다. 그리고 승단이 비구·대처로 양분되자, 신도들도 그들과 인연이 있는 측으로 이원화되었다. 이같은 대립은 불교계가 완전 양분되었음을 말한다. 1959년1월5일 비구·대처측이 분쟁 종결을 위한 성명서가 발표되었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멀어진 불교대중화이러한 갈등과 대립을 노정한 분규가 4~5년간 지속되는 가운데 불교의 위상은 추락하였고, 불교의 수행·포교·사업에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불교의 대중화를 추구하기는커녕 오히려 불교정신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이러한 현실에 변화를 제공한 것은 1960년4월19일의 4·19혁명이었다. 비구승을 옹호한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으로 대처승측은 그간의 울분과 설움을 일거에 노출시켰다. 이에 조계사를 비롯한 전국 사찰에서 대처측 승려의 점거가 나타나면서 승려간의 충돌이 재연되었다.그러자 비구측 총무원은 1960년5월 연석회의와 임시종회를 개최하여 정화이념 확립방안 강구 등 그 대응책을 모색했다. 대처측은 변화된 현실의 위세를 배경으로 비구측 총무원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직무집행정지에 관한 소송을 서울지방법원에 제기하였다. 이에 대하여 비구측은 1960년11월19일 제2차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종권 소송에서 대처측이 승소할 경우 순교·항쟁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불법에 대처승 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행진하였다. 11월21일 조계사에서는 비구측의 입장을 지지하는 전국신도비상대회가 개최되었으며, 비구측 승려들의 단식 농성이 있었다.이러한 가운데 11월24일 대법원은 대처측의 논리가 정당하다는 ‘종헌 등의 결의 무효에 대한 판결’을 통해 원판결(피고 비구측 승소)을 파기하고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는 판시를 하였다. 이에 비구측 승려 400여명이 법원에 난입하였고, 승려 6명이 대법원에서 ‘순교’라는 이름으로 할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비구 승려 24명이 기소되었다. 대법원 난입사건은 비구·대처간의 분규가 얼마나 극심하였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실례였다.- 김광식 근·현대불교연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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