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강원도의

한 작은 마을에 있습니다

시내서 그리 멀진 않지만

큰 산 사이

골짜기 마을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생명과 죽음의

상반된 모습을 본

며칠이었습니다

선선한 여름날 저녁입니다. 새들의 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땡볕 속에서도 닝닝 대며 날개 치던 말벌들은 사라지고 가까운 산의 능선들은 문득 선명해집니다.

아까 이른 저녁밥을 먹고 산책을 하다가 경운기 옆에 누워있는 농부를 보았습니다. 마을 도로변 옥수수 밭 옆이었습니다. 인기척이 들리자 그이는 다시 몸을 일으키며 쑥스러운 듯 웃었습니다. 얼굴이 까맸습니다. 지금은 옥수수 수확 때니 얼마나 바쁘고 힘들었을까요. 제 발소리가 지친 농부의 휴식을 훼방 놓은 것 같아 미안하더군요.

저는 지금 강원도의 한 작은 마을에 와 있습니다. 시내에서 그리 멀진 않지만 큰 산들 사이 골짜기 마을입니다. 그래서 밤이면 곧잘 날카로운 짐승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무성한 수풀들이 우거져 있습니다.

녹음들, 한껏 짙푸른 녹음들은 얼마나 사나운지 피 비린내가 나는 듯합니다. 자연의 거센 생명력 앞에 인간은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 아득한 천공을 향해 우주선을 띄우는 능력을 가졌지만 제 맨몸 하나로는 고작 10m의 절벽도 올라가지 못합니다. 이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누가 뭐라 든 자연의 일부, 흙과 물의 자손임을 새삼스레 확인하게 됩니다.

이 넘쳐나는 여름날의 생명 속에도 죽음의 풍경이 있습니다. 어제 다녀온 근처 저수지가 그랬습니다. 몇 해 전 이 마을에 처음 왔을 때 발견한 곳인데, 물이 맑고 풍경이 좋아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것 같았지요. 하지만 저수지는 오랜 가뭄으로 말라 있더군요. 제방 쪽에 물이 고여 있을 뿐 계곡과 이어진 상류는 헐벗은 바닥을 다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물 빠진 저수지 바닥엔 마른 나무들과 바위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고 무척 황량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물이 차오르면 이 죽음의 공간은 일변합니다. 수초들이 파릇하게 돋아나고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물방울을 날리며 튀어 오르고, 낮에는 금빛 햇살이, 저녁이면 산허리를 가리며 엷은 안개가 피어오를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생명과 죽음의 상반된 모습을 본 며칠이었습니다. 인간의 분열된 내면, 존재자의 불안과 고독과 공포를 그린 화가 뭉크가 그랬다지요. 생명의 신과 죽음의 신은 하나이며, 생명과 죽음의 대순환 속에 인간의 삶이 있다고. 그래서 뭉크는 그의 음울한 그림과는 달리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무량한 시간 속에서 왔다가 다시 무량한 시간 속으로 돌아가는 찰나의 삶을 살면서 그러나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햇볕과 비와 바람을 만나는지요. 이 지상의 하루에는 새벽부터 밭고랑에 엎드려야하는 노동이 있고 나무 그늘 아래서 서로 땀을 닦아주는 사랑이 있고 저문 창문에 불빛이 켜지는 기쁨이, 그리고 돌연히 마주치는 한밤의 울음이 있습니다.

조금 전 다리를 건너오는데 누가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길갓집 담벼락에 살구나무가 한 주 서 있었습니다. 나뭇가지엔 살구들이 익어가고, 어떤 것들은 이미 땅에 떨어졌더군요. 이 작은 살구 한 알에도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이 있겠는지요. 흙 묻은 살구 알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불교신문3125호/2015년7월29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