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불교정화를 지휘하다

1차 정화유시 한 달 뒤 6월 24일

‘불교교단정화대책위’ 출범 이어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 비구승대회

종회 열어 비구승 중심 간부진 구성

 

청담스님, 도총섭과 총무원장

연이어 맡으며 정화운동 총지휘

대통령 유시 발표 4개월 만에

대처승 배제 새로운 종단 탄생

 

1955년 1월 정화수습대책위

독신 삭발염의 불범사바라이 등

‘8대 원칙’ 부합 승려 1189명 불과

6월10일 대처승 300여명 조계사 난입

비구승 무차별 폭행이후 새 국면

1954년 11월5일 서울 안국동 선학원을 출발해 조계사를 향해 걷고 있는 비구승 행렬. 맨 앞쪽이 청담스님. 불교신문 자료사진

 

“일인(日人)들이 저의 소위 불교라는 것을 한국에 전파해서 우리 불교에서 하지 않는 모든 일을 행할 적에 … 이 불교도 당초에 우리나라에서 배워다가 형식은 우리를 모범하고 생활제도는 우리와 절대 반대로 되는 것으로 행해 오던 것으로 한인들에게 시행하게 만들어서 한국의 고상한 불도를 다 말살시켜 놓으려 한 것이다. 그 결과로 지금 승도들이라는 사람은 승인지 속인지 다 혼돈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 불교라는 것은 거의 다 유명무실로 되어 있는 것이다.”

1954년 5월20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발표한 불교정화 유시(諭示)의 일부다. 일제의 잔재인 대처승이 한국불교의 법통을 망치고 있으니 하루빨리 내쫓아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일본승들이 와서 한인들을 일본불교로 ‘부처’를 숭배케 한다고 하여 일본풍속으로 승이 고기도 먹고 처첩도 두고 못하는 일이 없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1954년 11월6일 2차 유시).” 이승만의 유시는 무려 7차례에 걸쳐 내려졌다. 국가 최고 권력자의 불교계에 대한 관심은 불교계를 격동으로 이끌었다.

불교정화운동은 청담스님을 비롯한 진보 진영 스님들을 중심으로 이미 일제강점기에 싹을 틔웠다. 그러나 기득권을 지닌 대처승의 장벽에 막혀 돌파구를 좀처럼 찾지 못했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로 전전긍긍하던 비구승에게 유시는 그야말로 단비와 같았다. 1차 유시가 나오고 한 달 뒤인 1954년 6월24일 ‘불교교단정화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8월25~26일엔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가, 9월28~29일엔 전국비구승대회가 선학원에서 열렸다. 9월30일 비구승들은 임시종회를 열어 자체적으로 종회의원을 뽑고 비구승 중심의 간부진을 꾸렸다. 유시 발표 4개월 만에 대처승을 배제한 새로운 종단이 탄생한 것이다. 일사천리의 한가운데에는 청담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비구 종단의 도총섭과 총무원장을 연이어 맡으며 정화운동을 총지휘했다.

대통령의 지지가 지지부진하던 정화의 활로를 열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이승만은 철저한 개신교인이었으며 대한민국의 ‘복음화’를 국시로 내세웠던 인물이다. △크리스마스의 국경일 지정 △형목(刑牧) 제도 신설을 통한 교도소 교화사업의 기독교 전담 △서울중앙방송을 통한 선교 △일요일의 공휴일 추진 등이 비근한 정책적 사례다. 이랬던 그가 뜬금없이 불교정화를 지시한 것을 두고 뒷말이 많다. ‘불교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분열 획책’이란 설, ‘사사오입 개헌 파동으로 야기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물타기’였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청담스님의 회고록인 ‘나의 입산 50년’을 살펴보면 그의 본심을 짐작할 수 있다. 1954년 8월 유시에 대한 감사를 표하려고 경무대를 방문한 청담스님 일행에게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독립한 기쁨은 점점 없어져 간다.…장관을 갈아보아도 그렇다.…우리 민족의 얼이 끊긴 느낌이다.…내가 40년을 미국에서 살았고 기독교를 믿어서 교회에 간다. 그러나 역시 고국에 돌아와서 절을 찾아가니까,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절간에 갔었던 생각이 절로 나며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래서 신라, 고려 때처럼 우리 불교를 다시 일으키고 다시 국민의 정신도 일깨워야겠다.…내가 대통령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불교를 바로 잡아야 해…. 그런데 우리 사람들의 시방 정신은 일본사람 밑에서 배운 시원찮은 영어로서 번역해서 과학, 문학을 받아들이는 그 식이거든.”

불교의 ‘원형’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1958년 모친이 기도하러 다니던 북한산 문수암에 올라 스님들을 격려하던 장면 역시 인상적이다. 2011년 7월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가 주최한 종책토론회에서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는 ‘영적인 분위기와 금욕적인 환경’, ‘불교의 평화로움과 청명한 무욕사상’ 등 이승만의 발언 기록을 제시하며 “사실 불교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인물이었다”고 옹호한 바 있다. ‘4·19혁명’으로 하야해야 했던 이승만의 과오는 뚜렷하지만 불교의 청정성 회복은 어느 정도 진심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무엇보다 여론이 대처승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불도(佛徒)로서 대처를 하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환속(還俗)한 것이니 환속한 사람이 불문을 지배할 수가 없다는 것은 구태여 대통령 유시가 있은 후에 일어날 문제가 아니라 불교계 자체에서부터 정화운동이 일어나야 할 문제인 것은 틀림없는 바다(<매일신문> 1955년 6월12일 사설).” ‘정화는 종권다툼일 뿐’이라는 일각의 주장은 억지를 넘어 저주에 가깝다.

유시가 나오던 즈음 청담스님은 경남 고성 문수암에서 폐관정진 중이었다. 불교교단정화대책위원회는 촉망받던 중진이었던 청담스님이 필요했다. 대선지식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도인인 데다, 조선불교학인대회와 유교법회 주도로 명망을 얻은 선각자였다. 종정 만암스님은 인편을 통해 청담스님을 데려왔고 정화의 실무책임자인 도총섭(都摠攝)을 맡겼다. 오랜 무문관으로 쇠약해진 상태였으나 청담스님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정화의 모든 계획을 입안하고 집행했으며 대처 측과의 담판과 협상도 도맡았다. 또한 정화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방방곡곡을 누볐다.

‘태고사’ 간판 내리고 ‘조계사’ 

정화를 기치로 내건 비구승들은 청담스님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11월5일 청담스님이 선두에서 이끄는 80여 명의 비구승이 선학원에서 출발해 태고사에 진입했다. 대처승과의 실랑이 끝에 11월10일에는 태고사 간판을 내리고 선(禪) 수행 종단임을 표방하는 조계사 간판을, 총무원 사무실 건물에는 ‘불교 조계종 종앙종무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11월14일엔 조계사 법당에서 교단정화 대강연회가 열렸다. 정화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주제로 한 청담스님의 열변에 청중은 뜨거운 갈채로 화답했다.

정화의 또 다른 주역인 금오스님의 상좌인 월주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은 “청담스님의 정화활동은 실로 전방위적이었다”고 술회했다. “간부 스님들을 대동하고 청담스님은 거의 매일같이 내무부 치안국(당시 명동입구)에 들렀다가 문교부(당시 중앙청, 현 광화문 자리)로, 때로는 경무대와 언론기관을 방문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교단정화 불사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그들을 설득했다.”

대통령의 지지와 우호적인 여론에 힘입어 비구승의 승리는 대세로 기울었다. 1955년 1월 문교부의 주선으로 비구승과 대처승 대표 각 5인이 참여하는 사찰정화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양측 대표는 2월4일 문교부장관실에서 ‘승려 8대 원칙’을 확인했다. △독신 △삭발염의 △수도 △20세 이상 △부주육초(不酒肉草) △불범사바라이(不犯四波羅夷) △비불구자 △3년 이상 수도생활자 등이었다. 이 원칙에 부합하는 승려는 1189명이었다. 독신승을 근본으로 한 청정승단의 회복을 염원하던 비구승의 요구가 기어이 관철된 것이다.

법적 정당성을 확보한 비구승들은 대처승을 퇴출하기 위한 실제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6월 350명의 비구승이 조계사 법당에 모여 단식기도에 돌입했다. 졸지에 집과 전답을 잃게 생긴 대처승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6월10일 새벽 300여명의 대처승이 난입해 정진 중이던 비구승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절은 피로 물들었고 31명의 중경사자가 발생했다. 언론은 조계사 테러사건을 대서특필했고 비구승은 대처승의 만행을 규탄하는 승려대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8월2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조계사에서 거행된 전국승려대회를 계기로 정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각각 957명의 비구와 비구니가 참석했다. 조계종 종헌을 통과시킨 이 대회에서 청담스님은 총무원장에 선출됐다. 총무원장에 취임하자마자 청담스님은 대처승으로부터 사찰을 되찾기 위한 과업에 착수했다. 8월22일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 교구본사를 포함한 19개 사찰의 주지 인허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했다. 8월28일엔 서울의 봉은사와 개운사가 접수됐다. 대처승의 저항은 당연히 거셌다. 이후 지난하게 벌어진 물리적 충돌과 소송전의 서막이었다.

[불교신문3125호/2015년7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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