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교수, 불사연 세미나서

‘고려시대 불교와 국가’ 조명

 

“불교계, 국가제도에 너무 예속

수도 중심 통제…자율성 훼손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쉽게 몰락” 

지난 2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고려시대 국가와 불교Ⅰ’를 주제로 열린 불교사회연구소 세미나.

 

고려시대 불교가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크게 융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건국 이후 급격히 쇠퇴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단순히 ‘숭유억불’ 정책 때문만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고려시대 국가가 불교계를 우대하는 동시에 통제하기 위해 실시한 승정(僧政)이나 왕사·국사의 임명 등의 제도가 변질되면서 오히려 불교계가 국가 권력에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됐다는 설명이다. 박윤진 고려대 교수는 불교사회연구소가 지난 2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연 ‘호국불교연구 학술세미나’에서 고려불교가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쉽게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불교계가 국가 제도에 의해 너무 종속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수도를 중심으로 불교계가 통제되는 취약성으로 인해 국가의 억불 정책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에 따르면 고려는 초기부터 스님을 관료처럼 선발하고 이들을 승직(僧職)에 임명해 상층의 스님들을 통제하고 보호하려는 제도를 실시했다. 스님들의 과거제도인 승과와 승직을 운영하는 승정(僧政), 국가에서의 주지 임명, 왕사·국사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제도가 불교를 신앙하는 사회에서 국가적으로 불교를 보호·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국가가 불교계를 통제하는 제도로도 기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 국왕이 불교계를 장악하고 자신에 대한 지지를 강화하기 위해 특정 스님에게 주지 추천권을 위임하는 등의 방식으로 승정을 전담시키면서 많은 문제가 야기됐다. 박 교수는 “국왕의 총애를 받는 특정 스님에게 승정이 장악되면서 불교계 종속화는 더욱 심화됐다. 이로 인해 불교계 다양성과 자율성이 많이 훼손됐다”며 “이런 승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고려 말 성리학자들의 불교계 비판을 초래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고려시대 관료와 불교계는 밀접한 관련을 맺었고 몇몇 스님들은 세속 혈족과 결탁해 세력을 확장했다”며 “고려시대 승정 등의 방식으로 불교계가 국가에 너무 예속돼 있었기 때문에 조선 초 제도 변화에 따라 불교계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고려시대 행해졌던 불교의례인 연등회와 팔관회가 국가와 왕실 권위를 상징하는 정치성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건국 직후 고려왕실과 함께 가장 먼저 제거됐다는 주장도 나왔다. 고려시대 당시 이들 의례가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질서체계를 구현하면서 군신간의 친목도모는 물론 일체감을 다지는 의례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강호선 성신여대 교수는 ‘고려시대 국가의례로서의 불교의례 설행과 그 정치적 의미’를 통해 국가적 의례로 설행됐던 불교의례들이 조선왕조의 자리매김을 위해 우선적 철폐대상이 됐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에 따르면 고려 태조의 원당으로 창건된 봉은사는 조선건국과 함께 모든 문헌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조선시대 지리지나 문서 혹은 폐사지로조차도 전하지 않는다. 이는 전조의 지배정통성과 왕권을 상징하는 상징물들을 제거한 것으로 봉은사 태조진전에 있던 고려 태조 동상은 태조가 즉위한 바로 다음날 마전군에 있는 암암사라는 작은 암자로 옮겨졌다. 연등회와 팔관회도 조선건국 초 혁파됐다. 이성계가 즉위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도당에서 폐지할 것을 청한 것이다. 강 교수는 “현 국왕의 정통성과 권위의 근원을 확인하던 연등회와 황제의 의례에 준하는 중심의식인 팔관회는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문화 청산이라는 차원에서 철폐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불교신문3119호/2015년7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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