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창원 수선정사 성일스님

동진출가 처염상정의 수행

재소자 교화 원력 실천행

 

“백년 쌓은 재물, 티끌이요

3일 닦은 마음, 천년보배” 

30년 넘게 재소자 포교에 앞장서고 있는 창원 수선정사 주지 성일스님.

 

“아이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세상일에 물 안들고 청정범행 닦고 닦아 서리같이 엄한 계율 털끝인들 범하리까….”

출가하신 스님들이 새벽 예불 때 읊는 발원문의 한 구절이다. 경남 창원 수선정사에 주석하고 있는 성일스님을 뵈면 이 구절이 먼저 떠오른다. 당신의 50여 성상의 수행노정이 바로 드러나는 글귀이기에 그러하다.

“철모르는 어린 시절에 절에 왔으니 은사 스님께서는 저를 늘 안쓰럽게 여기셔서 당신 곁에서 떼놓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일스님은 1962년 10살 나이에 절에 와서 대현(大賢)스님 슬하에서 숙세의 인연으로 맺어진 출가수행자의 길을 걸어갔다. 보봉(寶峰) 대현스님(1923~1985)은 고암 대종사의 법을 이은 분으로 16년간(1965~1981) 창원 성주사 주지를 역임하고 1983년 마산 무학산 자락에 수선정사를 건립, 조촐한 수도처로 삼았다.

성일스님은 성주사 시절 은사를 모시고 살다가 수선정사에서 스승이 떠난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그 당시의 성주사는 지금처럼 번듯한 절이 아니어서 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비만 오면 방안과 법당에 빗물이 흘러 내렸고 논밭 일을 위해 도량 한 켠에 소를 키우다보니 보살피는 일도 만만치 않았어요. 밤에는 호롱불과 촛불을 밝혔고 절 소유 산에서 나무를 마구 베어가는 주민들을 말리는 일도 벅찼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부처님 법을 펴는 스승 밑에서 스님은 출가수행자의 난행고행을 겪으며 스승의 원력을 쫓아가는 나날을 보냈다.

세상일에 물들어 그릇된 길을 갈까봐 당신 곁에서 떼놓지 않으려는 대현스님도 성일스님이 나이가 차자 해인사 강원에 상좌를 보냈다. 1983년에 해인강원에 간 스님은 바로 서장반에 들어갔다. 강원의 초급반을 뛰어넘어 중급반에 들어간 것이다. 1985년 강원을 졸업하기도 전에 스승이 열반했다. 1987년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수선정사에 머물며 도량을 정비하는 불사를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 1997년에는 해인사에 가서 교무국장, 재무국장 소임을 맡기도 했다. 2002년 수선정사에 정착하여 천천히 차근차근 불사를 진행한 스님은 올해 들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법당’을 건립했다. 스님은 12년 걸려 마련한 법당이라면서 감회에 젖었다.

30여년 재소자 교화에 힘을 쏟아온 스님은 2012년 제67회 교정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창원 지역 법사단, 신도들과 함께 매월 창원교도소를 찾아가 법회와 상담을 통해 재소자들에게 부처님 법을 전했다. 부처님오신날 연등 장엄, 재소자 생일법회, 수계법회, 교리경연대회 등을 이끌었다. 교도소 내 법당을 번듯하게 건립하고 운동장에는 관세음보살상도 세웠다.

‘소리없이 본분사를 행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은 늘 마음에 새기며 수행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다짐하는 성일스님.

스님은 후학들에게 ‘수처작주(隨處作主) 처염상정(處染常淨)’을 늘 일러주신다. 어디에 있든 자기 본분을 잊지 말라는 수처작주와 연꽃이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도 맑고 깨끗한 것처럼 불자도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당부한다.

새로 지은 법당의 주련에 있는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라는 글귀가 긴 여운을 갖게 한다.

‘백년간 욕심내어 쌓은 재물도 하루 아침의 티끌이요. 3일간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라.’

[불교신문3117호/2015년7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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