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2559년 부처님오신날 특집/
특별 대담 - 고은·정병조 평화를 말하다

 

지난 11일 수원에 위치한 고은 시인 자택에서 고은 시인과 정병조 교수가 만나 정담을 나누고 있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平은 어느쪽에 치우치지 않고

완전한 균형을 이룬 상태…

모든 생명 균형을 이룰때

평화가 시작된다

기자 :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평화에서 시작된다. 평화에 대한 불교의 메시지는 무엇이며, 나아가 사회와 세계 평화, 남북평화를 위해 불교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의견을 부탁드린다. 또 마음의 평화를 어떻게 얻어갈 것인지 자유롭게 말씀해 주셨으면 한다.

정병조 교수 : 평화로운 마음에 대한 교학적인 해석은 삼독심(三毒心, 탐·진·치)을 제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많은 경전과 설법에서 삼독을 제거하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 말에 어패가 있다. 인간이 이룬 문화와 물질문명은 결국 욕심의 산물이다. 무언가를 만들고,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문화가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를 없애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보니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비판한 것처럼 불교가 은둔의 종교로 가려고 한다.

불교에서 평화로운 마음을 얻기 위한 과정은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에서 찾아봐야 한다. 욕망을 끊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할 내용으로 해석하자는 뜻이다. 예를 들어 도둑이 잠든 사람들 사이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물건을 훔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는가. 그 에너지를 선한 방향으로 돌린다면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거나,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을 해줄 수 있다. 욕망을 컨트롤해 중도의 방향으로 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불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아닐까 한다.

고은 시인 : 공감되는 지적이다. 욕망을 떠나라는 것은 근본주의 시각이다. 욕망 근본주의에 사로잡히다 보면 결국 파산에 이르게 된다. 정신적, 물질적 파산이다. 반대로 이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금욕주의적 태도는 지극히 이루기 어려운 말이다.

예를들어 불교에서 무소유를 너무 쉽게 말한다. 무소유를 강조하면 자칫 일반인들에게 불교가 거짓을 이야기한다고 몰릴 수 있다. 물질로 이뤄진 세상에 무소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젖을 독점 소유한다. 보장된 소유다. 이러한 기초적인 욕망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욕망을 조절하는 방법을 제시해야 맞다. 여러가지 욕망을 조절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법을 제시해야 한다.

고은

욕망 끊으라는 교학적 가르침은

현대인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욕망 조절하는 방법을 제시할 때

‘정신· 물질’ 조화 이룰 수 있어

정병조 : 불자로서 늘 고민하는 문제지만, 우리가 어릴 때 비하면 지금의 소유는 너무 송구스럽다. 너무 잘 산다. 어릴 때 집안에서 내 소임은 호롱불 관리였다. 기름을 붓고, 심지를 매만지는 일이다. 또 6·25 때를 생각하면 참 힘들었다. 많은 것을 소유하지도 않았다. 그에 비해 지금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산다. 부모님께, 조부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소유를 했지만, 행복하지 않다. 고민도 예전보다 더 많아졌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 사회는 욕망을 컨트롤 하는 장치가 없다. 종교, 특히 불교에서 이런 장치를 마련할 수 있다. 방법은 물질과 마음세계가 조화를 이룰수 있도록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끊임없이 물질의 발전만을 추구해 왔다. 한국 문화와 역사, 우리의 정신과 가르침을 도외시 했다. 자연히 인성이 길러지지 못하고 경쟁만 머리에 익히게 된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원효나 의상을 몰랐고, 반가사유상이 왜 훌륭한지 배우지 못했다. 대신 예수님은 위대한 성자라고 알았고,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교과서에서 배웠다. 자연히 한국인으로서 가져야 할 자부심을 갖지 못한 것이다. 대학에 들어와 접한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저런 미소를 만들어 낼수 있을까. 극락의 세계에 들어가면 저런 미소가 지어질까 생각했다.

칼 야스퍼스가 1960년대 일본에 갔다가 일본 국보인 금동미륵보살을 보고 “어떻게 인간이 이런 미소를 만들 수 있느냐”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보살상도 우리 조상이 만든 것이다. 그러한 자부심과 자존감을 회복할 때, 우리는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사회와 어울리며 공존하는 법을 회복할 수 있다.

고은 : 어릴 때 기억은 같다. 절대빈곤의 시대를 살았다. 대부분 사람들이 세끼를 먹지 못했다. 조부께서는 저녁에 빈 아궁이에 불을 떼기도 했단다. 굴뚝에 연기가 나야 ‘저 집은 밥을 먹는구나’ 생각하기 때문에 체면상 불을 뗐다고 한다.

어릴 때 서로 나물을 뜯다보니 멀리까지 가야 나물을 캘 수 있었던 까닭에 어머니는 늦게까지 집에 오지 못했다. 나는 고모의 등에 업혀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무수하게 박힌 별을 봤다. 내겐 그 별이 밥으로 보였다. 고모에게 저것좀 가져다 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있다. 고모는 “저건 별이야. 먹는게 아니라 보는거야”라고 말했다.

출가해 생활할 땐 양말을 기워 신고, 뒤집어 신었다. 소금으로 양치를 했는데, 소금마저 없으면 냇가에서 고운 모래를 채취해 양치를 했다. 한국전쟁 땐 부산 범어사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생활해야 했는데, 산내 암자인 미륵암 김치가 얼마나 짠지 김치 한 가닥으로 3명이 식사를 했다. 그런데 지금 절 생활을 보면 아찔하다. 법의 냄새 대신 돈의 냄새가 난다. 천민자본주의 대신 가난의 미덕을 지향할 때, 대중을 사회를 이끌 힘이 생긴다.

정병조 : 불교는 소승에서 대승으로 발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대승이란 이타의 가치를 추구한 사상이며, 재가불교 운동으로 세상을 이끈 힘이기도 하다.

고은 : 우리 불교의 역사를 보면 삼국시대 격의불교시대를 거쳐 고려 왕실불교로 인해 대중과 멀어졌다. 재야성, 대승성을 갖추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정병조

과거에 비해 많은 것 소유했지만

결코 더 행복해지지 못했다

부처님 말씀은 이미 완성돼있어…

사회에 어떻게 적용할까 ‘과제’

정병조 : 요즘 사회에서 CEO란 말을 많이 사용한다. CEO란 팔방미인이다. 이것저것 다 잘하는 리더쉽을 말한다. 하지만 스님들이 CEO가 되어서는 안된다. 수행자에게는 고집불통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백척간두에서 한발 더 나가는 마음으로 수행할 때 오히려 대중이 감화를 받고, 불교의 바른 가치가 살아나게 된다.

고은 : 타종교도 마찬가지지만 수행자가 사라지는 현상이 안타깝다. 만해스님도 그랬지만 이(理)사(事)의 구분은 필요없다. 처음부터 행정을 보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니다. 수행을 하다가 때가되면 잠시 소임을 맡았다가 다시 수행자로 돌아가는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

정병조 : 서구사회에 불교 열풍이 거세다. 그런데 특징을 보면 재가불교다. 무진장스님이 한번은 미국에 간 적이 있다. 당시 기자가 스님에게 “스님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무진장스님이 이런저런 특징을 설명하자 기자가 다시 물었다. “미국에는 혼자 사는 채식주의자들이 수천명 된다. 그들은 또 명상이나 수행도 한다.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미국인 현각스님의 책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보면 미국인들의 수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20여 명의 직장인이 100일간 같이 생활하며 수행하는 것인데, 새벽에 예불로 시작해 좌선, 염불, 사경을 한다. 순번제로 음식을 준비해 같이 식사를 하고 출근했다가 퇴근 후 수행을 하는 일상이었다. 서구인들은 수행을 특정인, 출가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재가자들이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불교 종주국인 한국불교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고은 : 자끄데리다(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의 책을 읽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서구 석학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매우 높은 수준이다. 한국불교도 그들의 책을 역수입해 새로운 불교를 연구해야 한다. 또 구미의 자발적 수행공동체는 불교가 지향해야 할 좋은 모델이다. 우리가 그 모델을 수입해 새로운 수행공동체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기도와 대규모 법회보다 소규모 수행공동체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닮아 있다.

행자가 줄어드는 원인을 저출산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사회에 독신자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 왜 일까. 우리가 젊은 세대에게 불교를 제대로 전해주지 못하고 있다. 과감하게 서구의 불교를 받아들여 젊은 세대에 맞는 불교의 이론과 수행법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는 수행을 ‘나만 추구하면 되는 것’으로 여기는 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세상을 오탁악세로 규정하지 말아야 한다. 세간은 모든 것을 갖춘 곳으로 보며, 모든 과제의 출발점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런 시각의 변화는 깨달음을 혼자 갖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나누는 것으로 인식전환을 가져올 것이다.

평화는 결국 사람의 문제

불교와 사회학 접목 통해

평화를 만드는 종교로 성장

정병조 : 지금은 혼탁의 시대다. 빈부격차는 날로 커지고 있으며, 남북갈등과 일본의 군사적 성장 위협 등 사회적 정치적 외교적 혼란을 겪고 있다. 그런 속에서 불교가 어떠한 메시지를 줄 것인가 고민이 된다. 불교학자 입장에서 보면 지나치게 원리적이고 국수주의적인 한국불교의 모습을 극복하는 것이 우선 과제다. 불교대학 교수 채용을 보면 화엄학 전공자, 천태학 전공자로 공고를 한다. 안타깝다.

화엄학과 천태학 등은 소수의 학자들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응용불교학에 눈을 돌려야 한다. 교학을 세상에 어떻게 적응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곧 사람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재직 시절 한 제자가 논문으로 ‘임신중절에 대한 불교적 견해’를 썼는데, 교수 스님들이 심사를 사양했다. 스님들이 검토하기에 부적절하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러나 실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이미 부처님께서 잘 말씀하신 화엄학을 더 연구해 발전시키려는 노력인가, 가르침으로 사회현상을 해석해 주는 일인가. 미국 미시간대학에 불교생태학회가 있다. 생명공학을 전공한 교수들이 모여, 예를들면 오존층 파괴에 대한 불교적 견해를 제시한다. 불살생의 가르침으로 오존층 파괴 현상을 줄일 대안을 제시한다.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불자의 자세 등이 그들의 연구과제다. 우리도 응용불교로 빨리 전환해야 한다.

고은 : 우리에게는 실학의 역사가 있다. 실학은 실제 학문이며, 실체가 있는 담론을 말한다. 실학불교 시대를 열자고 제안하고 싶다. 이를 통해 점점 외로워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설 것인가를 연구하고, 마음의 평화를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 길을 제시해야 한다. 마음을 바꾸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가르침은 지금 시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평화란 단어를 한번 보자. 평(平)은 어디로도 치우치지 않고 평평한 상태를 의미하는 한자다. 모든 생명이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다. 바로 인간의 꿈이다. 반면 아직까지 실현된 바 없는 불행한 글자이기도 하다. 화(和)는 물질에서 온다는 점을 말한다. 쌀(禾)이 입(口)을 만족시킬 때 평화로운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평화는 지극히 물질적이고 근본적인 데서 시작한다. 뇌의 극한은 정신이다. 마음이 아니라 합리적 사고이며, 정신의 극한은 결국 물질로 구성된다. 부처님도 마음은 그림자라고 했다. 합리적인 부분에서 평화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옛날에는 3대가 모여 빈한한 식사를 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과거에 미남, 미녀 소리를 들으며 살았던 지금의 노년세대들이 혼자 식당에서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이룬 물질의 풍요가 어쩌면 헛된 행복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물질과 정신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결과가 그런 것이 아닐까. 성장을 위한 성장은 행복을 성장시키지 못한다. UN에서는 얼마 전 행복의 날을 제정했다. 그리고 세계 55개국 작가들에게 행복을 주제로 한 시를 한편씩 써서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 시를 모은 책을 보면서 정말 행복하지 않은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다면 행복을 주제로한 노래가 왜 필요하고, 이론이 왜 필요한가. 죽어서야 삶을 알고, 잃어버려야 사랑을 알고, 불행해야 행복을 느낄수 있다는 역설적인 모습이 떠 올랐다.

불교가 전쟁과 불행을 말한 적이 없다. 부처님은 평화와 행복을 이야기했다. 불교의 가치는 세상을 행복하고 평화롭게 이끌기 위한 가치이지, 불교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원효·의상·반가사유상 대신

예수 로뎅의 작품 교육받은

세대는 ‘문화 자존감’ 부족

역사·문화교육 회복할 때

인성회복도 같이 이뤄진다

정병조 : 선생님의 말을 들으니 여전히 불교는 개척해야 할 광활한 영역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육바라밀의 가르침을 답습하지 말고, 육바라밀을 사회에 어떻게 실현시킬가를 제시하는 불교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불자 인구가 감소하는데 연연하지 말고, 불교가 시대를 위해 무엇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외형적 성장보다 내적인 충실함을 갖추다 보면 불교는 저절로 잘 되게 돼 있다.

서구에는 이미 기독교인이 없다. 그러다보니 가톨릭이 아시아 선교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며, 필리핀·한국·멕시코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개신교는 문화적 관습에 불과하며 교회를 가서 성경을 배우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역으로 설사 한국서 불교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보다 더 많은 서구인들이 불교를 따를 것이고,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소멸되지 않지 않겠는가. 그러한 당당하고 넓은 사고를 가지고 불교의 성장 대신 불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 속에서 불교는 세계에 평화를 주고, 마음의 평화를 제시하는 종교가 될 것이다.

천민자본주의와 결탁된 종교가 살아남은 역사는 없다는 점을 다시한번 우리 불자들이 마음에 새겨야 한다.

고은 :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음이 행복할 때 사회가 평화로워진다. 행복이란 마음이 크게 파동을 치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를 얼마나 지속하는가의 문제다. 불교는 이미 교학적으로, 수행의 방법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만드는 이론을 완비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사회에 적응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 대안을 재가불자들의 자발적인 단체 수행, 물질을 부정하지 않고 정신과 조화를 시키려는 노력 등에서 만들어야 한다.

정병조 : 공감한다. 평화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이다. 사회학과 불교학이 접목을 이룰 때 불교가 평화를 추구하는 교학을 지닌 종교를 넘어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종교로 발전할 수 있다. 이제 우리끼리 하는 공부는 극복하고, 사회적으로 통용이 가능한 불교를 하자. 그 대의에 공감이 되면 개인과 사회가 행복하고 평화로워지기 위한 다양한 길은 금세 찾을 수 있다. 이미 길은 부처님께서 제시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모든 사람들이 평화로운 마음으로 행복해 지길 바란다.

■ 고은 시인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고은 시인은 1958년 문단에 입문한 이래 시집, 소설, 평론집 등 저서 150여 권을 발행했다. 대표적 저술로 <고은 시 전집>, <고은전집>, 서사시 <백두산>, 연작시 <만인보> 등이 있다. 전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초대 의장과 한국작가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미국 버클리대 초빙교수(시론 강의), 하버드대 엔칭연구소 연구교수, 서울대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단국대 석좌교수와 <겨레말 큰 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고은 시인의 시와 소설은 전 세계 27개국에 번역돼 출간됐으며, 국내 및 해외 문학상 18회, 훈장 2회를 수상한 바 있다.

■ 정병조 교수

고려대 기계공학을 전공하던 중 1966년 박종홍 박사의 철학 특강을 듣고 한국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재수를 선택, 다시 동국대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했다. 영남대에서 불교철학 석사, 동국대에서 불교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로 정년했다. 한국불교연구원장과 한국불교학회장, 한국철학회 이사와 인도 네루대 객원교수, 불교신문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동국대 부총장과 금강대 총장을 지냈다. <한국 불교철학의 어제와 오늘> <실천불교> <불교문화사론> <한국불교사―영문판> <반야심경의 세계> 등 다수의 저술이 있다.

[불교신문3108호/2015년5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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