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중생은 부처” 절대적 신뢰 가르쳐준다


‘행복으로 가는 길’

5ㆍ16 간화선 무차대회


분노와 갈등과 대립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긍정과 자각의 부족에서 비롯

 

끊임없는 성찰과 정진으로

스스로 ‘청정자성’ 드러내야

보리달마는 일체중생이 바로 부처와 동일한 불성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그것을 자각하여 확신하는 것이 바로 깨침이라고 말했다. 이 달마를 그 출발점으로 하여 중국선은 소위 조사선(祖師禪)이라는 선풍으로 전개돼 중국, 출가수행자만의 전유물이 아닌 누구나 취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은 본지가 부산불교연합회와 공동으로 진행한 재가안거 수행에 동참한 혜원정사 불자들. 불교신문 자료사진

조사선의 출현

2500여 년 전에 발생한 불교는 깨침과 그 전법을 근간으로 전개되어 왔다. 깨침은 곧 번뇌를 떠나서 지혜를 터득하는 것으로서 자기의 완성이었다. 그리고 전법은 깨침의 내용을 널리 타인에게 베풀어서 더불어 슬기롭게 살아갈 것을 지향하는 자비의 실천으로서 타인의 구제방식이었다. 때문에 깨침은 불교가 출현한 시대부터 가장 근원적인 입장에 놓여 있었다. 붓다는 바로 그 깨침을 터득하는 수단으로서 선(禪)이라는 수행방식을 활용하였는데, 그것이 곧 선이 출현한 까닭이었고 의의였다.

이후로 선은 불교의 전반에서 가장 보편적인 수행방법으로서 전승되어 왔다. 특히 인도불교에서는 모든 불법의 전개에서 공통적인 가르침으로서 선이 활용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선만을 위주로 형성된 학파 내지 종파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불교가 발생한 이후 1000년이 지나서 보리달마가 중국에 도래하면서 시작되는 중국 선의 경우는 인도불교의 경우와 비교하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중국 선의 경우에는 인도불교와는 달리 선을 정체성으로 표방하는 교단으로서 소위 선종이라는 개념을 형성시켰기 때문이다. 이로써 선은 깨침을 터득하는 수행 위주로 전개되던 수행방식의 범주를 넘어서 선종의 모든 방면에 걸친 불법의 종합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선은 이제 발심과 수행과 깨침과 교화가 포함된 불교의 자리와 이타의 전체를 구현하는 교단으로 탈바꿈되었다. 조사선이란 바로 그와 같은 개념을 다양하게 담고 있는 새로운 선풍으로서 출현되었다.

중국선은 6세기 초에 중국에 도래한 보리달마 이후를 그 출발점으로 간주한다. 달마가 도래하기 이전 500년 역사의 중국불교에서 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전승되어 온 선종은 바로 달마로부터 비롯된 선풍을 근간으로 하여 그 후손들이 전개시키고 전승시켜온 역사인 까닭에 달마 이전의 선에 대해서는 제외시켜버린 결과이다. 따라서 달마를 그 출발점으로 하여 중국 선은 소위 조사선(祖師禪)이라는 선풍으로 전개되었다. 조사선의 경우에 조사라는 말은 달마조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때문에 조사선이란 달마조사의 선풍으로부터 비롯된 까닭에 중국 선의 초조를 달마로 간주하고, 또한 달마의 선법을 대승선법 내지 최상승선법이라 하여 인도 선의 경우에 비하여 의도적으로 우월적인 차이를 강조하였다. 그 이후로 널리 전개되어 오늘날까지 가장 보편적인 선풍으로 전승되어 온 조사선의 전통에서는 몇 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조사선에서는 근본적인 이념을 일체의 중생에 대한 인격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바탕에 두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일체의 중생에게는 부처와 똑같은 속성이 갖추어져 있음을 전제로 하고, 나아가서 그 속성이 부처와 동일하게 이미 개개인에게 완성되어 있다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의 사상으로 전개되어 일체의 중생에게 그 도리를 일깨워주고 또 확신시켜주는 가르침이었다. 더욱이 그와 같은 조사선의 이념과 도리를 모든 사람이 일상의 생활에서 개개인이 직접 수행하고 터득하며 널리 타인을 향해 실천함으로써 보살도의 구현에 정진할 것을 지향해 왔다.

이후 조사선의 전통에서는 그와 같은 조사선풍을 터득하고 구현하여 대대로 모든 사람에게 전승해가는 원리로써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종지를 강조하였다. 불립문자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든가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언설문자에 의지하면서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결코 언설문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불리문자(不離文字)의 입장이다. 이것은 경전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일체의 경전을 자유로이 의용하면서 진실한 불법을 해명하는 수단으로 삼는 까닭에 언설문자는 일반적으로 개념이라는 뜻에 통한다. 개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선의 입장이 개념의 구성에 의해 성립되어서도 안 된다. 즉 선의 진의는 개념에 의해서 파악되고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교외별전은 대체적으로 불립문자와 동일한 의미로도 활용되지만 똑같지는 않다. 교외별전은 자기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여기에서 교외의 구체적인 의미는 교상(敎相)과 교판(敎判)의 교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조사선에서는 이러한 교상판석을 갖지도 않고 교판을 세우지도 않는 개종(開宗)이라는 것이 교외별전의 의미이다. 때문에 불립문자이고 교외별전이라기보다는 불립문자이기 때문에 교외별전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교외는 교상 이외에 따로 정법안장을 전승한다는 말이지만 바로 그 전승한다는 말이 조사선의 입장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앞의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이 깨침의 형식이라면 직지인심과 견성성불은 그 내용이기도 하다. 직지는 이론적인 모색이나 추론의 결과나 매개체를 거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직접 부딪치는 것이다. 역대조사들의 이심전심이 그랬었다. 이에 직지인심에서 인심(人心)은 일체중생의 자심(自心)이다. 이러한 자심을 직접 철견(徹見)하여 그 본성이 현현됨으로써 성불에 이른다는 것이 교리로 치밀하게 짜여진 단계과정을 거치지 않고 현신(現身)에 곧 증득하여 해탈의 경지에 나아간다는 입장이다. 그것은 깨침을 얻기 위한 인위적인 수행으로 증득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구족되어 있다는 점에서 염오되지 않는 철저한 청정이다.

따라서 견불성의 성불은 범부가 환골탈태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범부로서의 인간 그대로 부처의 깨침을 얻는다는 의미가 강조되는 말이다. 곧 중생이 변화하여 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중생 그대로 부처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인데, 그 성불이 바로 견불성을 계기로 하여 성취되기 때문에 견불성성불이라 한다. 그렇다고 견불성이기 때문에 성불한다는 구조가 아니라 견불성 그것이 곧 성불이라는 구조이다.

이리하여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이 직지인심의 현현으로서 견불성을 말하는 형식이라면, 직지인심과 견불성성불은 그 작용으로서 내용이다. 곧 견불성은 직지인심의 현현이기 때문에 견불성은 견불성성불이고 깨침의 현성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구비하고 있는 불성의 작용으로서 조사선이 지향하고 표방하는 모습이었다. 

현대사회에서 조사선의 역할

보리달마는 일체중생이 바로 부처와 동일한 불성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그것을 자각하여 확신하는 것이 바로 깨침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모든 중생의 청정본심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서 중생이 반드시 주체가 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설파한 까닭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달마는 몸소 늙은 몸을 이끌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승선법을 전승하는데 전력하였다.

조계혜능은 누구나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깨침의 자성을 현재의 삶에서 충실하게 활용하는 것이 곧 성불의 행위라고 말하였다. 혜능은 자신이 그랬듯이 중생 모두가 현재의 자신을 철저하게 긍정하는 것이 바로 불법의 실천이고 자신의 본래성을 구현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때문에 부처는 부처를 위하여 설법하지 않고 중생을 위하여 설법했음을 천명하였다.

나아가서 마조도일은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의 분별이 없는 삶을 평상심(平常心)으로 간주하고 그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깨침의 작용이라고 설하였다. 평상심이란 곧 본래청정한 마음으로서 탐심과 진심과 치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평상심이 깨침이라는 말은 일체중생의 본래성을 전체 긍정하는 입장에서 조금도 어긋나거나 분별과 집착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서 이것을 실천의 측면으로 표현한 말이 즉심시불(卽心是佛)이었다. 마조에게 있어서 즉심은 평상심에 즉한 행위로서 그런 경우에야 비로소 부처라는 의미였다. 임제의현과 동산양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일체중생에 대하여 어떤 차별도 없는 불성의 소유자로 간주하고 개개인이 그 자성을 자각하여 부처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수많은 조사들로부터 조사선풍의 사상적인 근원으로서 형성되고 강조되어 온 이와 같은 본래적인 불성 곧 청정자성에 대한 절대긍정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중생 각자의 자각이 요구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것이 좌선, 염불, 기도, 주력, 간경, 불사 등의 다양한 행위를 통하여 우리들 자신에게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점은 바로 평상심의 실현에 대한 화두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에서 당면하고 있는 수많은 분노와 갈등과 대립의 씨앗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긍정과 자각의 부족으로부터 기인한다. 때문에 조사선풍에서 기치로 내세우고 있는 일체중생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본래의 청정한 불성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바로 평상심의 구현임을 개개인이 자각할 것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불교신문3103호/2015년5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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