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시각장애인 임은주 씨

2004년 10월 어느날 멀쩡하던 눈이 아팠다. 시야가 좁아지고 햇볕에 눈부심이 너무 심했다. ‘망막색소변성증(RP)’ 진단을 받았다. 불치병이었다. 한달만에 오른쪽 눈은 100% 실명됐고, 왼쪽 눈은 빠른 속도로 기능을 잃어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왼쪽 눈 역시 실명에 가까워졌다. 자욱한 안개 속에 알수없는 형체가 어른거리는 정도다. 2%에 불과하는 잔존시력이 마지막 희망의 등불이 됐다. 집안에 틀어박혀 울다지쳐 잠들면서 두달여를 살다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임은주(57)씨 이야기다. 마흔이 훌쩍 넘도록 ‘장애’라는 두 글자는 내 인생과 아무런 상관없다고 여기며 살았기에, 장애등급을 어디서 어떻게 받는지 그것을 왜 받아야 하는지, 받아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시각장애인 문화해설사 1호 임은주씨는 10여년 전 갑작스런 불치병으로 시력을 잃었지만 주눅들거나 아파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처님 앞에서 늘상 ‘감사하다’는 기도를 한다고 했다.

시각장애인등록을 마치고 시각장애인여성회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점자’라는 세계에 발을 들였다. 전자도서도 있고 시각장애인 전용 컴퓨터 스크린리더도 있는 ‘좋은 세상’인데, 시력이 다 없어지기 전에 점자를 배워두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앞섰다. 무엇보다 책읽기 좋아했던 그녀는 앞으로 책을 못본다는 현실이 끔찍했다.

5년여 시간이 흘렀다.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사회교사’를 시작했다. 청주대서 행정학을 전공한 덕분에 ‘사회’라면 자신있다. 녹음을 해서 개인에게 발송하기도 하고, 녹음한 강좌를 시각장애인 정보망에 올려 도움을 주기도 한다.

중학교 고등학교 사회과목을 꿰뚫고 있다보니, 한국역사에 관심이 번졌다. 특히 조선왕조 500년사에 푹 빠져 역사서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2011년 서울 종로구청에서 국내 최초로 시작한 시청각장애인 문화해설사 교육은, 마치 그녀를 위한 ‘정부의 배려’처럼 느껴질 정도로 반가웠다.

그 해 1기 시각장애인 문화해설사가 됐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종묘를 견학하는 시각장애인 단체들을 안내하고 해설하는 역할이다. 앞못보는 사람이, 앞못보는 사람에게 무엇을 안내하고 가르치겠느냐고 묻는다면 착각이다. 내가 앞을 잘 못보기에, 눈이 어두운 이들을 진정 배려할 수 있고 이해가능하게 이끌 수 있는 법.

10년 전 망막색소변색증 발병

조선실록 ‘열공’ 궁궐 지도법사

장애인복지관 검정고시 봉사

山寺 꿈도 못꿔…도심사찰로

“제가 힘들면 제가 이끄는 분들도 다 힘들고 지칩니다. 이왕이면 높은 턱이나 계단을 피해서 걷고 돌조각상 하나라도 손으로 만져보게 해주고, 요즘 드라마 사극과 연결해서 재미나게 이야기합니다. 또 제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다른 장애인들도 마음 편하게 여겨주니 고맙죠. 얼마 전 제주도에서 오신 어르신은 휠체어를 타고 오셨는데, 저더러 참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줬다고 하셔서 어찌나 보람있었는지 몰라요.”

지난 한해 그녀의 해설을 듣고 궁궐을 여행하고 돌아간 이는 1000명이 넘는다. 문화해설사로 5년넘게 살지만, 보수는 교통비 정도다. 그럼에도 더 흥미롭고 재미있는 역사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그녀는 팟캐스트로 조선실록을 탐독하고 온갖 전문역사서를 찾아다닌다.

전화위복이 따로 없다. 입가에 웃음이 끊이지 않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지다. 선천성 시각장애인이 아니다보니, 맑고 영롱한 눈빛이 그대로 살아있다. 왼쪽 눈에 잔존하는 시력에 의지하려는 본능 때문에 고개를 오른쪽으로 치우치거나 눈동자를 약간 돌리는 습관이 생겼는데, 이마저 언니와 조카가 시시때때로 바로잡아준다.

1남5녀의 막내딸로 태어나 위로 언니만 4명이다. 그녀는 “언니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어깨에 힘주고 이렇게 밝고 당당하게 산다”고 했다. 대학시절 건강하고 생기발랄한 여대생이었던 그녀는 친구들과 갑사와 동학사를 집 드나들듯 다녔고, 지금도 독실한 불자 언니들 손에 이끌려 집근처 여래사를 참배하곤 한다.

인터뷰는 지난 4월22일 조계사 마당을 걸으면서 이뤄졌다. 시종일관 지혜와 학식, 센스와 유머를 가감없이 보여주더니 대뜸 물었다. “지금 조계사는 많이 달라졌죠? 눈이 이렇게 되기 전에 대학생 조카랑 서울에 상경한 기념으로 조계사에 왔었거든요. 그때 참 좋았는데…”

[불교신문3102호/2015년5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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