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부산 선암사 원범스님

 

문성·우룡스님에게 경학

경봉스님에게 참선수행

 

“절집에서 소임을 사는 일은 봉사정신이 없고서는 해 내지 못합니다. 주지를 비롯한 소임자들은 스스로의 수행력을 바탕으로 대중을 외호하고 살림을 잘 꾸려나가며 가람수호에도 열과 성을 다해야 합니다.”

부산진구 부암3동 628번지, 천년고찰 선암사 주지 원범(圓梵)스님. 스님은 후학들에게 시주물을 아끼고 스스로 한 알의 씨앗이 되어 부처님 정법을 널리 알리는 일에 힘 쓸 것을 강조한다.

선암사는 창건 이래 수많은 고승 석덕이 머물렀으며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불교계의 선지식들이 주석하면서 법향을 널리 전한 도량이다. 혜월(慧月)·향곡(香谷)·지월(指月)·인환(印幻)스님이 거쳐 갔으며 특히 석암(昔岩)스님 주지 때에는 사세(寺勢)를 크게 신장시켰다. 원범스님은 2004년부터 주지를 맡아 막중한 소임을 감당하고 있다.

스님은 1974년 19세에 범어사에서 흥교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스님이 범어사로 출가한 인연은 이러하다. 고교 때까지 스님은 또래보다 총명하여 학업성적도 우수했다고 한다. 그런 스님이 대학입시 시험을 못봤다. 하필이면 입시날 연탄가스 중독으로 시험도 치르지 못했단다.

“나는 전생부터, 오랜 전생부터 중이었던가 봐. 대학시험도 그래. 하필 그날 연탄가스에 중독될 게 뭐야?”

19살의 재수생. 그러잖아도 한창 인생문제로 고뇌할 시기에 스님의 대학입시 재수는 삶의 고뇌를 깊게 했다. 동국대에 다니던 친구와 함께 술 한 잔 기울이는 자리였다. 그 친구가 숟가락으로 방바닥에 치는 장단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단다.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다. 절에서 배웠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원범스님은 절을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 친구의 장단소리는 마음을 울렸단다. 그제서야 그 친구는 자기가 스님이라고 하더란다. 그 절이 어디냐고 묻자 그 친구는 범어사라 했고 범어사가 어딘지도 모르는 원범스님은 그 길로 물어물어 범어사로 왔단다.

‘삶이 무언가를 공부할 수 있는 곳’ 그 곳이 범어사라 믿고 무작정 절에 갔다. 행자 때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외우는데 천수경 구절에서 “아, 바로 이거다. 성인의 가르침이 여기 있구나”했단다. 예불 때 대중 스님이 법당에 모여 ‘지심귀명례…’ 하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더란다. 그 눈물은 1주일이나 가슴을 쳤다. 그래서 스님은 ‘아마 나는 전생에서도 중이었구나’를 되새겼다.

범어사 강원 치문반에서도 반장을 했다. 그 총명이 어디 숨겨졌으랴. 강원 공부를 하면서도 행자 때부터 지녔던 참선수행의 염(念)이 가라앉지 않아 통도사 극락암 경봉스님에게 가서 화두를 받고 수행지도도 받았다. 스님은 “나는 어른(스승)을 참 잘 만났어. 큰 복이야”라고 했다. 당대의 대강백인 운성·우룡스님에게서 경학을, 경봉스님에게서 참선수행을 지도 받았으니 출가수행자로서의 행복이란다.

해운정사·해인사·봉암사 선방에서 선지(禪旨)를 깊게 한 스님은 해인사와 범어사 승가대학 강주, 창원 천주암 주지, 범어사 재무국장을 거쳐 선암사에 왔다. 2012년에는 총무원 재무부장을 역임하고, 2006년부터 생명나눔실천운동본부 부산지역본부를 창립하여 본부장을 맡아 현재까지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사람살이는 단 하루다. 하루를 잘 살면 그 하루하루가 쌓인 평생은 진정 잘 사는 삶이다. 하루를 지내듯 평생을 살아라. 그런 삶이야말로 항상 당당하고 멋진 삶이 아니냐.”

[불교신문3099호/2015년4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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